대지도론(大智度論) 제70권 4
大智度論 釋問相品 第四十九 卷七十 卷七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소역.
49. 문상품(問相品)을 풀이함 2
▶論. 問曰:上處處已說“空、無相、無作乃至無起、無所有是般若相”,今諸天子何以復問“何等是般若相”?
▷논. 묻나니, 위의 곳곳에서 이미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 내지 일으킴이 없는 무기(無起), 있는 것이 없는 무소유(無所有)가 반야의 상(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여러 천자들이 무엇 때문에 다시 “어떠한 것이 반야의 상(相)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까?
答曰:佛雖處處說般若波羅蜜,或說空等、或說有、或說果報、或說罪福,不定故,是以今問“何者定是般若相”。復次,是般若波羅蜜如幻化,如似可得,而無定相可取,唯諸佛能正遍知其相;諸天子雖有利智,不能了知故問。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비록 곳곳에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셨으나 혹은 공(空) 등으로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의 유(有)로 말씀하기도 하며, 혹은 과보(果報)를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죄복(罪福)을 말씀하기도 하신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어떠한 것이 정확한 반야의 상(相)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마치 얻을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정상(定相)으로서 취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며, 오직 모든 부처님들만이 그 상(相)을 두루 아실 뿐이니, 여러 천자들이 비록 예리한 지혜가 있을지라도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復次,有人言:是諸天子有後來者,不聞,故問。
또한 어떤 분은, 이 여러 천자들 중에서 나중에 온 이들은 듣지 못한 이가 있기 때문에 묻는 것이라고 말하며,
佛答諸天子:“空等是般若波羅蜜相。”“空相”者,內外空等諸空。若諸法空者,卽是無有男女、長短、好醜等相,是名“無相相”。若空、無相,不復生願著後世身,是名“無作相”。三解脫門是初入般若波羅蜜相,三乘共有。不生不滅、不垢不淨、無所依止、虛空等,是般若波羅蜜深相。
부처님께서는 여러 천자들에게 대답하시기를, “공(空) 등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다”고 하셨으니, 공한 공상(空相)이라 함은 내외공(內外空) 등의 여러 공(空)들이며,
만약 제법이 공(空)한 것이라면 곧 그것은 남녀(男女)나, 길고 짧은 장단(長短)이나, 아름답거나 미운 호추(好醜) 등의 상(相)이 없는 것이니, 이를 바로 상이 없는 무상상(無相相)이라 하며,
만약 공하여 무상(無相)이라면 다시 원(願)을 세워서 후세의 몸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를 바로 지음이 없는 무작상(無作相)이라 하며,
공 무상 무작, 세 가지 해탈문이 바로 처음으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에 드는 초입(初入)하는 것이며,
삼승(三乘)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의지함이 없는 무소의지(無所依止)의 허공 등을 함께 지니나니, 이는 바로 반야바라밀의 깊은 심상(深相)인 것이다.
上三解脫門中“無相” 無男女等外相;“無所有”下“無相相” 無一切法相。
空雖是一,人根有利鈍、入有深淺故,差別說空。無生無滅等論議,如先說。
위의 공 무상 무작의 세 가지 삼해탈문 가운데에는 “무상(無相)“ 즉 남녀 등의 바깥의 외상(外相)도 없으며,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와 그 뒤의 “무상상(無相相)” 등이 일체법의 상(相)이 없는 것이며,
공은 비록 하나이지만, 사람의 근기에 예리함과 둔함이 있고, 들어감에도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에 공을 차별하여서 설명하는 것이며, 무생(無生) 무멸(無滅) 등에 관한 논의(論義)는 앞에서의 설명한 바와 같다.
佛知天子必有如是念:“若般若波羅蜜空、無所有、如虛空相,云何可說?若說,卽是有相。”諸天子以佛威德大故,不敢致難,是故佛自爲說:“佛憐愍衆生,以世諦故說空等諸相。非以第一義諦。”若以第一義故,應難;以世諦故說,則不應難。
부처님께서는, ‘만약 반야바라밀이 공(空)하여 무소유라서 마치 허공의 허공상(如虛空)과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설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설한다면 그것은 곧 상이 있는 유상(有相)이다’라고 반드시 천자들이 생각할 것이나,
부처님의 위덕(威德)이 크기 때문에 여러 천자들이 감히 따지지를 못한다는 것을 아신 때문에 부처님께서 스스로 그들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공(空) 등의 제상(諸相)을 말씀하신 것일 뿐, 제일의제(第一義諦)로써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만약 제일의제로써 말씀하셨다면, 마땅히 따져야 하겠지만,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말씀하셨으므로 따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復次,雖說空,不以著心取相,不示法 若是若非 一切法同一相、無分別,是故復了了說,所謂無所有、如虛空相。無有一法不入此相者,是故說“一切世閒無能破壞”。何以故?一切世閒天、人、阿修羅卽是相故。若異法相違,則有可破;如水能滅火,火不自滅火。口言如實欲破者,竟不能破,何況不實者?譬如盲人蹈踐珍寶,口言非珍寶,竟不能令非珍寶。
또한 비록 공(空)을 말씀하셨을지라도 집착하는 마음으로써 말씀하지 않으셨고, 상(相)을 취하면서 법을 보이지도 않으셨으며, 혹은 옳고 그르다고 하는 일체법이 동일한 일상(一相)이라서 분별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분명히 명료하게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라서 마치 허공상(虛空相)과 같다면, 어느 하나의 일법도 이러한 상(相)에 들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 세간을 파괴할 수 있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일체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 등이 바로 그 상(相)이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달라서 서로를 어기는 이법(異法)이라면 파괴할 수 있으니, 마치 물은 불을 끌 수 있으나 불 스스로는 불을 끄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입으로는 여실(如實)함을 말하면서도 파괴하고자 하는 이가 끝내 파괴할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겠는가? 비유하자면, 마치 소경이 값진 보배를 밟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값진 보배가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값진 보배가 아니게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此中佛更說:般若波羅蜜畢竟空無相故,“相不能破相”。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반야바라밀은 필경공이며 무상(無相)이다’고 말씀하신 때문에 상(相)은 상(相)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復次,有人言:“相不能破相”者,有法能解散,諸法和合,竟無所破、無所失;如斧析薪,分分解散,竟無所失。
또한 어떤 분은, “상(相)은 상(相)을 파괴할 수 없다고 함이란, 어떤 법을 능히 분해하여서 제법의 화합을 흩어버린다 할지라도 필경에는 파괴되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나니, 마치 도끼로 나무를 패어서 조각조각으로 쪼갠다 하여도 마침내는 잃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말하였으며,
復次,諸法無定相,如樹,根、莖、枝、葉和合故名爲樹,樹無定相故無所破。如是等,名爲“相不能破相”。
또 제법에 일정한 정상(定相)이 없음은 마치 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이 화합한 때문에 나무라 하고, 그 나무는 일정한 정상(定相)이 없기 때문에 파괴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등을 ‘상(相)은 상(相)을 파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問曰:色等諸法非覺故,可不相知;心數法是知相,云何言“不知”?
묻나니, 물질(色) 등의 제법은 알아차리는 각(覺)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없지만,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앎의 지상(知相)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此中以實相故,不說如凡夫人虛妄知。是智慧,有爲法故,因緣和合生,虛妄法不能實有所知,是故捨,入無餘涅槃。若智慧 知常無常乃至空、寂滅等,上來已廣破,滅、無所有。若如是者,云何當有知?以是故“相不知相”。
답하나니, 여기에서는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범부가 허망하게 알고있는 지혜는 유위(有爲)의 법이기 때문에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으로, 허망한 허망법은 진실로 앎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버리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는 것이며,
만약 지혜로써 항상하고 무상하다는 상무상(常無常) 내지는 공(空)하고 고요히 사라진 적멸 등을 안다면 위에서 이미 널리 파하여서 없앴으므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 만약 그와 같다면 어떻게 아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때문에 ‘상(相)은 상(相)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相不能知無相”者,內雖有智慧,外空故無法可知;外無緣云何智慧生?是故言“相不能知無相“。譬如刀雖利,不能破空。“無相不能知相”者,有人言:內智慧無定相,外所緣法有定相,心隨緣而生,是故說“無相不應知相”。譬如無刀,雖有物,無刀可斫。
‘상(相)은 상(相)을 알 수 없다’고 함이란, 안에는 비록 지혜가 있을지라도 바깥이 공하기 때문에 알 만한 법이 없는 것이며, 밖으로 조건적인 연(緣)이 없다면 어떻게 지혜가 생길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상(相)은 상(相)을 알 수 없다’고 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칼이 비록 날카로울지라도 허공을 벨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상(無相)은 무상(無相)을 알 수 없다’고 함이란,
어떤 분은, “안의 지혜에는 일정한 정상(定相)이 없거니와 밖으로 반연되는 법은 일정한 정상(定相)이 있으므로 마음은 그 반연하는 바에 따라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은 무상(無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 말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칼이 없으면 비록 물건이 있을지라도 쪼갤 수 없는 것과 같다.
“是相、是無相、相無相皆不可得”者,相不入相。何以故?先有相故。相不入無相。何以故?相無入處故。離是相、無相,更無處可入。
‘이 상(相)이 바로 무상(無相)이니, 상(相)과 무상(無相) 모두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다’고 함이란,
상(相)은 상(相)에 들어가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앞에서부터 상(相)이 있었기 때문이며,
상(相)은 무상(無相)에도 들어가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상(相)이 들어갈 곳이 없기 때문이며,
이 상(相)과 무상(無相)을 여의면 다시는 들어갈 만한 곳이 없는 것이다.
復次,相、所相法不定故,因所相故有相。所以者何?若先有相,無所相者則無相,無所因故。若先有所相而無相者,云何有所相?無所因待故。
또한 상(相)과 상이 되는 소상(所相)의 법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니, 상이 되는 소상(所相)으로 인하여 상이 있는 유상(有相)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먼저 상이 있는 유상(有相)이라면, 상이 될 것이 없는 무소상(無所相)이 곧 무상(無相)이니, 원인이 되는 인(因)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먼저 상이 될 것이 있는 유소상(有所相)이 무상(無相)이라면 어떻게 상이 될 바의 유소상(有所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원인이 되는 인(因)의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復次,相以所相不定,相或時作所相,所相或時是相。是故相不定、不實故,所相亦無;若所相不定、不實故,相亦無。是故說“是相、是無相、是相無相不可得”。
또 상(相)과 상이 되는 소상(所相)은 일정하지 않나니, 상이 때로는 상이 되는 소상(所相)이 되고,
상이 되는 소상(所相)이 때로는 바로 상(相)이기 때문에 상(相)은 일정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소상(所相) 또한 없는 것이며,
만약 소상(所相)이 일정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상 또한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상이 바로 무상(無相)이며, 이 무상(無相)은 바로 상(相)과 무상(無相)을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인 것이다.
如先說空等諸相是實。何以故?是相非五衆所作,非六波羅蜜乃至一切種智所作。是相,無爲故,無法可作,亦無若人若非人能作。人者,菩薩、諸佛等;非人者,諸天等。是相畢竟空故,非有漏非無漏,非世閒非出世閒。先雖說無爲相,但破有爲故說無爲,無爲亦無定相。此中佛欲使是事明了,故說譬喩。
앞의 설명과 같이 공(空) 등의 제상(諸相)은 바로 진실이니, 왜냐하면 이 상은 오중(五衆, 오온)으로서 짓는 것이 아니요, 육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로서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상은 작위가 없는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법이 없으며, 또한 사람이나 비인(非人)이 짓는 것도 아니며,
사람이라 함은 보살이나 모든 부처님 등이요, 비인(非人)이라 함은 모든 하늘들이다.
이 상은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유루(有漏)도 아니요 무루(無漏)도 아니며,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니며,
앞에서 비록 무위(無爲)의 상을 설명하였을지라도 다만 유위(有爲)를 깨뜨리기 위하여 무위를 설명한 것일 뿐, 무위 또한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는 것이나,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聽者作是念:“若無佛則不聞是相,佛於衆生最上故,應當作是相。”是故佛語諸天:“有佛、無佛,此相常住。佛能知是相,故名爲佛。”
듣는 청자(聽者)들이, “만약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相)에 관하여 듣지도 못하였을 것이나, 부처님께서는 중생 중에서 가장 으뜸으신 때문에 마땅히 이러한 상(相)을 지으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여러 하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 상(相)은 항상 있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이 상(相)을 잘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爾時,諸天子歡喜,復白佛言:“世尊!是諸相甚深,雖不可取相而可行,能與人無上果報。佛得是相故,於一切法得無㝵智。”若分別諸法有定相,則是有㝵智。世尊住是諸法實相中,則通達無㝵,能說諸法各各別相,所謂惱壞相是色相,乃至了現知者是一切種智相。”
그 때에 여러 천자들은 기뻐하면서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모든 제상(諸相)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것이며, 비록 상을 취할 수 없다 하여도 상을 취하지 않음을 행한다면 그 사람에게 위없는 과보를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상(相)을 얻으셨기 때문에 일체법에서 장애 없는 무애지(無礙智)를 얻으셨나니,
만약 제법을 일정한 정상(定相)을 기준으로 분별한다면 그것은 바로 장애 있는 유애지(有礙智)가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제법의 실상(實相) 안에 머무른다면, 곧 통달하여 장애가 없고 제법 저마다의 각각으로 구별된 별상(別相)을 말할 수 있나니, 이른바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뇌괴상(惱壞相)은 바로 물질의 색상(色相)이요,
나아가 마음의 심상이 나타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대지(大智)인, 현전지(現前知)로써 분명히 아는 것은 바로 일체종지의 상(相)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佛可其意,爲分別諸相。凡夫所知,諸相各異;佛知皆是空相,空相卽是無相,佛得是無相。得者,是知,無比遍知故名得。是諸法相,今轉名般若波羅蜜故。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뜻을 옳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모든 제상(諸相)을 분별하시되 “범부들이 아는 모든 제상(諸相)은 각각 다른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모두가 곧 공한 공상(空相)임을 안다”고 하셨으며, 공한 공상 그것이 곧 무상(無相)이니,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無相)을 얻으신 것이다.
‘얻는, 득(得)’이라 함이란, 알게 되는 것이며, 비교할 데 없이 두루 알게 되기 때문에 얻는 득(得)이라 하나니, 이 제법의 상을 이제는 반야바라밀로 바꿔서 부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