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0권 2
大智度論 釋佛母品 第四十八之餘 卷七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소역.
48. 불모품(佛母品)을 풀이함② 2
▶論. 釋曰:佛悉知一切衆生所作所行、六十二邪見等諸邪見、九十八結使等諸煩惱,是故說:“佛知衆生心心數法出、沒、屈、申。”
▷논. 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의 짓는 소작(所作)과 행하는 소행(所行)과 62가지의 사견 등의 모든 삿된 사견과 98가지의 번뇌 결사(結使) 등의 모든 번뇌를 모두 아시기 때문에 말씀하기를 “나온 출(出)ㆍ빠져든 몰(沒)ㆍ굽을 굴(窟)ㆍ펼 신(申)하는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안다”고 하신 것이며,
在家者爲愛等諸煩惱所沒名爲“沒”,九十六種邪見出家者名“出”。復次,常著世樂故名爲“沒”;或知無常,怖畏,求道,故名“出”。復次,受九十六種道法,不能得正道故,還沒在世閒。“屈”者不離欲界,“申”者離欲界。色界離、不離,亦如是。
집에 있는 재가자(在家者)는 애(愛, 애욕) 등의 모든 번뇌에 빠지기 때문에 빠져든 몰(沒)이라 하는 것으로, 그것은 96종의 삿된 사견을 말하며, 출가자(出家者)를 나온 출(出)이라 하며,
또 항상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빠진 몰(沒)이라 하며,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면서 도(道)를 구하기 때문에 나온 출(出)이라 하며,
또 96종의 도법(道法)을 받으면 바른 정도(正道)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세간에 빠져 드는 몰(沒)이며,
굽을 굴(屈)이라 함은 욕계(欲界)를 여의지 않는 것이요,
펼 신(伸)이라함은 욕계를 여의는 것이니, 색계(色界)를 여의고 여의지 않는 것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如人立淸池上見魚:或有常在水中 或有暫出還沒 或有出觀四方 或有出欲渡者近岸還沒。
마치 사람이 맑은 연못가에 서서 고기가 노는 것을 보면, 어떤 고기는 항상 물속에만 있기도 하고, 어떤 고기는 잠시 동안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도 하며, 어떤 고기는 나와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보기도 하고, 어떤 고기는 나와서 저쪽으로 건너가려 하다가 언덕 가까에 와서는 다시 돌아가 버리기도 하나니,
佛亦如是,以佛眼觀十方六道衆生:有常著五欲,諸煩惱覆心,不求出者;或有好心,能布施、能持戒,而以邪疑覆心故還沒;有人出五欲,能得煖法、頂法等,觀四諦,未得實法故還沒;有人離五欲乃至無所有處,不得涅槃故還沒。
부처님께서도 그와 같이 불안(佛眼)으로써 시방의 육도(六道) 중생을 관찰하실 때,
어떤 이는 항상 오욕(五欲)에 집착하여서 여러 번뇌가 마음을 가려서 벗어날 출(出)을 구하지 않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좋은 마음으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면서도 삿된 의심이 마음을 가렸기 때문에 다시 빠져 들어 몰(沒)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오욕에서 벗어나 난법(煖法)과 정법(頂法) 등을 얻고, 또 네 가지 진리인 사제(四諦)를 관찰하면서도, 진실한 실법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빠져 들어 몰(沒)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오욕을 여의고 이에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렀으나, 열반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도로 빠져 들어 몰(沒)하기도 하는 것이다.
何等是出、沒、屈、申相?此中佛說,所謂“神及世閒常”。神者,凡夫人憶想分別,隨我心取相故計有神。外道說神有二種:一者、常,二者、無常。
어떠한 것이 나오는 출(出)이고, 빠지고 몰(沒)이며, 굽힌 굴(屈)이며, 펴는 신(伸) 등의 상(相)인가?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그리고 세간(世間)이 항상하다는 상(常)’이니,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에 대해서는 범부들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나'라는 아심(我心)을 따라 상(相)을 취하기 때문에 신(神, 정신)이 있는 것이라고 헤아리며,
외도(外道)가 말하는 신(神, 정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항상하다는 상(常)이요, 둘째는 무상(無常)하다는 것이다.
若計神常者,常修福德,後受果報故,或由行道故,神得解脫。若謂神無常者,爲今世名利故有所作。常無常者,有人謂:神有二種,一者、細微常住,二者、現有所作。現有所作者,身死時無常。細神是常。
만약 신(神, 정신, 아트만)이 항상하다고 헤아린 이라면, 항상 복덕을 닦아 뒤에 과보를 받기 때문에 혹은 도를 행하기 때문에 신(神, 정신, 아트만)이 해탈을 얻는다고 하지만,
만약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이 무상하다고 여기는 이라면, 금세에서 명예와 이양을 얻기 위하여 행하는 유소작(有所作)이 있으며,
어떤 분이 항상한 상(常), 무상(無常)에 대하여 말하기를
“신(神, 정신, 아트만)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미세하면서 항상 머무르는 미세상주(細微常住)하는 것이요, 둘째는 현재 존재하면서 짓는, 현유소작(現有所作)하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면서 짓는 것은 몸이 죽을 때에는 무상하게 되지만 미세한 신(神, 정신, 아트만)은 항상한 상(常)이다”고 하였으며,
有人言:神非常非無常。常、無常中俱有過:若神無常,卽無罪福;若常,亦無罪福。何以故?若常,則苦樂不異;譬如虛空,雨不能濕、風日不能乾。若無常,則苦樂變異;譬如風雨,在牛皮中則爛壞。以我心故,說必有神,但非常非無常。
어떤 분은, “신(神, 정신, 아트만)은 항상한 상(常)도 아니요 무상(無常)한 것도 아니니, 상(常)이라거나 무상하다는 것에는 다 같이 허물이 있으니, 만약 신(神, 정신, 아트만)이 무상하다면 곧 죄와 복이 없는 것이며, 설령 항상하다 하여도 역시 죄와 복이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항상하다면 고(苦)와 낙(樂)이 서로 다르지 않는 것이니 마치 허공을 비가 적시지 못하고 바람이나 해로 말릴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만약 무상하다면 고통과 쾌락이 변하는 것이니, 마치 바람과 비가 소의 가죽 안에 있으면 가죽이 문드러져 못쓰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나'라는 아심(我心)때문에 반드시 신(神, 정신, 아트만)이 있다고 말하지만, 다만 항상한 것도 아닌 비상(非常)이요 무상한 것도 아닌 비무상(非無常)일 뿐이다”고 말하였다.
佛言:“四種邪見,皆緣五衆,但於五衆謬計爲神”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가지 삿된 사견은 모두가 오중(五衆)을 반연하며, 오직 오중에 대하여 잘못 헤아려 그것을 신(神, 정신, 아트만)이라 하는 것일 뿐이다”고 하셨으며,
“神及世閒”者,世閒有三種:一者、五衆世閒,二者、衆生世閒,三者、國土世閒。此中說二種世閒:五衆世閒、國土世閒;衆生世閒卽是神。於世閒相中,亦有四種邪見。
신(神, 정신, 아트만)과 세간이라는 것은, 세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오중(五衆, 오온세간) 세간이요, 둘째는 중생(衆生, 가명세간)세간이며, 셋째는 국토(國土, 주처세간)세간이다. 이 가운데에서 오중세간과 국토세간, 두 세간을 말하는 것으로, 중생세간은 곧 신(神, 정신, 아트만)이다.
세간상(世閒相) 가운데서도 역시 네 가지의 삿된 소견인 사종사견(四種邪見)이 있는 것이다.
問曰:神從本已來無故應錯,世閒是有,云何同神邪見?
묻나니, 신(神, 정신, 아트만)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세간은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신(神, 정신, 아트만)의 삿된 소견과 같을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但破於世閒起常無常相,不破世閒;譬如無目人得蛇以爲瓔珞,有目人語是蛇,非是瓔珞。佛破世閒常顚倒,不破世閒。何以故?現見無常故。亦不得言無無常,罪福不失故,因過去事有所作故。常無常,二俱有過故;非常非無常,著世閒過故。
답하나니, 다만 세간에 대하여 일으키는 상무상(無常相)이라는 상(相)을 파괴할 뿐, 세간을 파괴하지는 않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눈 없는 사람이 뱀을 얻으면 그것을 영락(瓔珞)이라 여길 수 있지만, 눈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뱀이요 영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세간이 항상한 것으로 뒤바뀐 전도(顚倒)을 깨뜨리는 것이요, 세간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무상함을 보기 때문에 무상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죄와 복은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요, 과거의 일로 인하여 지은 바의 유소작(有所作)이 있기 때문이니, 상(常), 무상(無常)이라는 이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요,
비상(非常), 비무상(非無常)에는 세간에 집착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世閒有邊”者,有人求世閒根本,不得其始;不得其始,則無中、無後;若無初、中、後,則無世閒。是故世閒應有始,始卽是邊。
‘세간은 끝이 있다는 유변(有邊)’이라 함이란, 사람이 세간의 근본을 구한다 하여도 그 시작을 얻지 못하나니, 그 시작을 얻지 못하면 중간도 없고 나중도 없는 것이며, 만약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얻지 못한다면 세간은 곧 없는 무세간(無世閒)이니, 이 때문에 세간은 시작이 있어야 하며 그 시작이 곧 끝인 변(邊)인 것이다.
得禪者宿命智力,乃見八萬劫事,過是已往,不復能知,但見身始中陰識,而自思惟:“此識不應無因無緣,必應有因緣,宿命智所不能知。”但憶想分別:
선정을 얻은 이는 전생을 아는 지혜의 숙명지(宿命智)의 힘으로 8만 겁의 일을 보게 되지만, 그것을 초과한 더 이상은 알지 못하나니, 다만 몸이 시작되는 중음(中陰)의 식(識, 의식)만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이 식은 인(因)이 없어서도 안 되고 연(緣)이 없어서도 안 되는 것으로, 반드시 인과 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니, 숙명지(宿命智)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이니, 다만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분별할 뿐인 것이다.
有法名世性,非五情所知,極微細故。於世性中初生覺,覺卽是中陰識。從覺生我。從我生五種微塵,所謂色聲香味觸。
법이 있으므로 세간의 성품인 세성(世性)이라 하나 오정(五情)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며, 세성(世性) 가운데에서 처음의 깨달음인 초각(初覺)이 생기나니, 초각(初覺)이 곧 중음의 의식인 중음식(中陰識)이며, 그 초각(初覺)으로부터 나(我)가 생기고, 나(我)로부터 다섯 가지의 작은 미진(微塵)들이 생기나니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의 오진(五塵, 오정五情)이다.
從聲微塵生空大,從聲觸生風大,從色聲觸生火大,從色聲觸味生水大,從色聲觸味香生地大。從空生耳根,從風生身根,從火生眼根,從水生舌根,從地生鼻根。如是等漸漸從細至麤。
소리(聲)의 작은 미진으로부터 공대(空大)가 생기고, 소리(聲)와 닿임(觸)으로부터 풍대(風大)가 생기며,
빛깔(色)ㆍ소리(聲)ㆍ닿임(觸)으로부터 화대(火大)가 생기며,
빛깔(色)ㆍ소리(聲)ㆍ닿임(觸)ㆍ맛(味)으로부터 수대(水大)가 생기며,
빛깔(色)ㆍ소리(聲)ㆍ 닿임(觸) ㆍ맛(味)ㆍ냄새(香)으로부터 지대(地大)가 생기며,
공(空)으로부터 이근(耳根, 귀)가 생기며, 바람(風)으로부터 신근(身根, 몸)이 생기며, 불(火)로부터 안근(眼根, 눈)이 생기며, 물(水)로부터 설근(舌根, 혀)가 생기며, 땅(地)으로부터 비근(鼻根, 코)이 생기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점점 미세한 세(細)로부터 거친 추(麤)까지 이르는 것이다.
世性者,從世性已來至麤,從麤轉細,還至世性。譬如泥丸中具有甁、瓫等性,以泥爲甁,破甁爲瓫,如是轉變,都無所失;世性亦如是,轉變爲麤。世性是常法,無所從來,如『僧佉經』廣說世性。
세간의 성품인 세성(世性)이라 함은, 세성(世性)으로부터의 이후에는 거친 추(麤)에 이르고, 거친 추(麤)로부터 미세한 세(細)로 전변되어 나와서 다시 세간의 성품인 세성(世性)에 이르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진흙 덩어리 속에는 병이나 항아리 등의 성(性, 성품)이 갖추어져 있어서, 진흙으로 병을 만들었다가 병을 부숴버리고 항아리를 만드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바뀌고 변하여도 도무지 잃는 것이 없으니,
세간의 성품인 세성(世性) 역시도 그와 같아서 바뀌고 변하여 거친 것이 되며, 세간의 성품인 세성(世性)은 항상한 상법(常法)이라 오는 곳이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니, 마치 '승가경(僧佉經)'에서 세성(世性)을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으며,
復次,有人說:世閒初邊名微塵。微塵常法,不可破、不可燒、不可爛、不可壞,以微細故;但待罪福因緣和合故有身:若天、若地獄等;以無父母故,罪福因緣盡則散壞。有人以自然爲世界始,貧富、貴賤,非願行所得。
또한 어떤 분은, “세간의 처음 시작의 가장자리인 초변(初邊)을 미세한 미진(微塵)이라 하며, 미진은 항상한 상법(常法)이라 깨뜨릴 수도 없고 태울 수도 없으며, 문드러지게 할 수도 없고 무너지게 할 수도 없나니, 미세하기 때문이니, 다만 죄와 복의 인연을 기다려 화합하는 것이기에 몸이 있을 뿐이다.
하늘이나 지옥 등에서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인연이 다하면 곧 흩어지고 무너져버린다”고 말하며,
어떤 분은, “자연(自然)으로써 세계의 시초를 삼나니, 빈(貧)ㆍ부(富)ㆍ귀(貴)ㆍ천(賤)은 원(願, 서원)과 행(行,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며,
有人言:天主卽是世界始,造作吉凶禍福、天地萬物;此法滅時,天還攝取。如是邪因,是世界邊。
어떤 분은, “천주(天主, devendra. 신들의 주인인 제석帝釋)가 곧 세계의 시초이니, 길흉(吉凶)ㆍ화복(禍福)과 천지의 만물을 지으며, 이 법이 소멸할 때에는 하늘이 도로 거두어 간다”고 말하나,
이와 같은 삿된 인(因)이 바로 세계에 대하여 극단적인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갖는 변견(邊見, anta-grāha-dṛṣṭi, 변집견)인 것이다.
有人說:衆生世世受苦樂盡,自到邊;譬如山上投縷丸,縷盡自止。受罪受福,會歸於盡,精進、懈怠無異。
有人說:國土世閒,八方有邊,唯上下無邊。
어떤 분은, “중생들은 세상마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고락(苦樂)을 받다가 모두 저절로 그 끝(邊)에 이르게 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산 위에서 실타래를 던지면 그 실이 다 풀어지면 저절로 정지하는 것과 같이, 죄를 받고 복을 받는 것도 다하여서 모여 돌아가는, 회귀(會歸)하나니, 정진이나 게으름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어떤 분은, “국토와 세간은 8방(方)에는 끝이 있으나, 오직 위와 아래만은 끝이 없다”고 말하며,
有人說:下至十八地獄,上至有頂,上下有邊;八方無邊。如是種種說世界邊。
有人說:衆生世閒有邊。如說:神在體中,如芥子、如米,或言一寸。大人則神大,小人則神小。說神是色法、有分,故言神有邊。
어떤 분은, “아래로는 18지옥에 이르고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므로, 위와 아래는 끝이 있지만 팔방에는 끝이 없다”고 말하나니, 이와 같이 갖가지로 세계의 끝인 변(邊)을 설명하고 있으며,
어떤 분은, “중생의 세간은 끝이 있다”고 하며, 또 신(神, 정신, 아트만)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몸속에 있는 것으로 마치 겨자씨 크기와 같고 또 쌀알 크기와 같다”고 말하며,
어떤 분은, “혹 한 치인 일촌(一寸)만 하며, 큰 사람은 신(神, 정신, 아트만)이 크고 작은 사람은 신(神, 정신, 아트만)이 작으며, 신(神, 정신, 아트만)은 물질의 색법(色法)으로서 유분(有分)이기 때문에 신(神, 정신, 아트만)은 끝이 있는 유변(有邊)이다”고 말하였나니,
“無邊”者。有人說:神遍滿虛空,無處不有,得身處能覺苦樂。是名神無邊。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 함은, 어떤 분은, “신(神, 정신, 아트만)은 허공에 두루 편만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몸의 처소를 얻으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닫게 되나니, 이러함을 바로 신(神, 정신, 아트만)은 끝이 없다고 한다”고 말하며,
有人言:國土世閒無始。若有始,則無因緣,後亦無窮,常受身,是則破涅槃。是名“無邊”。復次,說國土世閒,十方無邊。如是等,說“神世閒、國土世閒無邊。”
어떤 분은 말하기를 “국토세간(주처세간)은 그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이니, 만약 시작이 있는 유시(有始)라면 인연도 없어야 하고, 그 후에 다함 역시도 없어야 하며, 항상 몸을 받는 것이므로 열반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인 것이다’고 말하며,
또한 “국토세간(주처세간)은 시방으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다.”고 말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정신세간(精神世間)과 국토세간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다.”고 말하며,
“有邊”者。有人言:神世閒無邊,國土世閒有邊。或言:神世閒有邊,國土世閒無邊;如上說神是色故。或言:上下有邊,八方無邊。如是㧾上二法,名爲“有邊無邊”。
“끝이 있다는 유변(有邊)”이란, 어떤 분은, “정신세간은 끝이 없고 국토세간은 끝이 있다”고 말하며, 또 어떤 분은, “정신세간은 끝이 있지만 국토세간은 끝이 없다고 말하나니,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신(神, 정신, 아트만)이 물질(色)이기 때문이며,
또 어떤 분은, “위와 아래는 끝이 있지만 8방(方)에는 끝이 없다”고 하나니,
이와 같이 통틀어서 위의 두 가지 법을 일컬어 ‘끝이 있는 유변(有邊),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 하는 것이다.
“世閒非有邊非無邊”者,有人見“世閒有邊”有過、“無邊”亦有過,故不說“有邊”、不說“無邊”,著“非有邊非無邊”以爲世閒實。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 비유변비무변(非有邊非無邊)’이라 함은, 어떤 분은 세간에 끝이 있다 하여도 허물이 있고, 끝이 없다 하여도 허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끝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끝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니,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 비유변비무변(非有邊非無邊)에 집착하여 세간의 실체로 삼는 것이다.
“神卽是身”者,有人言:身卽是神。所以者何?分折此身,求神不可得故。復次,受好醜苦樂皆是身。是故言“身卽是神”。
‘신(神, 정신, 아트만)이 바로 몸이다’ 함이란, 어떤 분은, “몸이 곧 신(神, 정신, 아트만)이다. 왜냐하면 이 몸을 나누고 쪼개면서 신(神, 정신, 아트만)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하며,
또 아름답고 추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받는 것은 모두가 몸이기 때문에 ‘몸이 곧 신(神, 정신, 아트만)’이라 말하며,
“身異神異”者,有人言:神微細,五情所不得,亦非凡夫人所見;攝心淸淨,得禪定人乃能得見。是故言“身異神異”。復次,若“身卽是神”,身滅、神亦滅,是邪見。說“身異神異”,身滅、神常在,是邊見。
‘몸과 신(神, 정신, 아트만)이 다르다’ 함은, 어떤 분은, “정신은 미세하여 오정(五情)으로도 얻지 못하고, 또한 범부가 볼 수 있는 바도 아니며, 마음을 가다듬어 청정하고 선정을 얻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에 몸이 다른 것이고, 신(神, 정신, 아트만)이 다른 것이다”고 말하나,
만약 몸이 곧 신(神, 정신, 아트만)이라면 몸이 소멸하면 신(神, 정신, 아트만)도 소멸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삿된 소견이며,
몸과 신(神, 정신, 아트만)이 다르다면 몸이 소멸하여도 신(神, 정신, 아트만)은 항상 존재할 것이므로 이것은 바로 치우친 소견의 변견(邊見, 변집견)인 것이다.
“死後有如去”者。
‘죽은 뒤에 한결같이 그러하게 가는, 여거(如去)가 있다’는 것이란;
問曰:先說常、無常等,卽是後世或有或無,今何以別說如去四句?
묻나니, 앞에서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상무상(常無常) 등’을 설하신 것은 곧 후세(後世)가 있다, 혹은 없다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별도로 그러하게 한결같이 가는 여거(如去)에 대한 4구(句)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上㧾說“一切世閒常非常”,“後世有無”事要故別說。“如去”者,如人來此閒生,去至後世亦如是。有人言:先世無所從來,滅亦無所去。有人言:身、神和合爲人;死後,神去、身不去。是名“如去不如去”。
답하나니, 위에서는 통틀어 일체 세간의 항상하다거나 항상한 것이 아닌 상비상(常非常)이라는 것을 설하셨으나, 후세가 있다거나 없다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하게 한결같이 가는 여거(如去)’란, 마치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이 세상을 떠나 후세에 이르는 것도 그러하나니,
어떤 분은, “선세의 어디에서도 옴이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멸하여 가는 곳 또한 없는 역무소거(亦無所去)이다”고 말하였으며,
어떤 분은, “몸과 신(神, 정신, 아트만)이 화합하여 사람이 되나니, 죽은 뒤에는 신(神, 정신, 아트만)은 가지만 몸은 가지 않는다”고 말하나니,
이러함을 바로 한결같이 그러하게 가는 여거(如去) 또는 그러하게 한결같이 가지 못하는 불여거(不如去)라 하는 것이며,
“非有如去非無如去”者,見“去”、“不去”有失故,說“非去非不去”。是人不能捨神,而著“非去非不去”。如是諸邪見煩惱等,是名“心出、沒、屈、申”。所以者何?邪見者種種道求出不得故,欲出而沒。邪見力多難解,故說常、無常等十四事。外道雖復種種憶想分別,佛言:“皆緣五衆、依止五衆,無神、無常。”
‘그러하게 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닌 비유여거 비무여거(非有如去 非無如去)’ 라 함은, 간다거나 가지 않는다는 것 모두에 허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하는 것이며,
이 사람은 신(神, 정신, 아트만)을 버리지 못하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에 집착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삿된 사견과 번뇌 등을 바로 나오는 출(出)ㆍ빠져든 몰(沒)ㆍ굽을 굴(窟)ㆍ펼 신(申)의 마음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삿된 사견을 지닌 이는 갖가지의 도(道)로써 벗어나는 출(出)을 구하여도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려고 함에 빠지는 몰(沒)하기 때문이다.
삿된 사견의 힘으로는 대개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열네 가지의 십사사(十四事, 십사무기, 십사난(十四難))를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외도(外道)가 갖가지로 생각하고 분별할지라도,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오중(五衆, 오온)을 반연하고 오중에 의지한 것으로서, 신(神, 정신, 아트만)이란 없으며 무상한 것이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