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십주품 (十住品) 6
(11) 第九 法王子住
[[法王子住는 법을 설하는 데 자재롭지 못한 장애를 대치해서 자재롭게 하는 것이다. 즉 선재동자가 勝熱바라문을 친견함으로써 칼산[刀山]에 올라 불구덩이에 들어가 苦行을 행할 때 天과 용과 신과 人과 非人의 오는 자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① 善知十種法
佛子야 云何爲菩薩法王子住오 此菩薩이 善知十種法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善知諸衆生受生과
善知諸煩惱現起와 善知習氣相續과 善知所行方便과 善知無量法과 善解諸威儀와 善知世界差別과
善知前際後際事와 善知演說世諦와 善知演說第一義諦니 是爲十 이니라
[그 전에 어떤 法王子라는 보살님이 있었는데요. “이름이 너무 크지요?” 누가 지어줬는지 하여튼 크게는 지어줬어요. 승속을 막론하고 불명은 다 꿈이니까요. 法王子하면, 法王子가 되고자 하는 꿈을 담는 것이지요. 꼭 지금 無比라야 無比가 아니라, 앞으로 無比가 되고자 하는 꿈을 거기에 싣고 이름을 지어요. 그래서 이름은 자기의 근기나, 자기의 그릇 보다는 좀 크게 짓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열심히 정진해야지요.]
佛子야 云何爲菩薩法王子住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의 왕자주이겠는가?
此菩薩이 善知十種法하나니, 보살은 열 가지의 법을 잘 아나니
何者가 爲十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所謂善知諸衆生受生(소위선지제중생수생)과, 소위 모든 중생들의 수생을 善知= 아주 잘 알며,
[모든 중생이 생을 받는 것= 태어남을 받는 것. → 어떻게 해서 여기 이렇게 태어났는가를 잘 아는]
善知 諸煩惱現起(제번뇌현기)와, 모든 번뇌의 일어남을 잘 알며,
善知 習氣相續(습기상속)과, 습기의 이어감을 잘 알며,
[習氣가 相續한다는 것만이라도 확실하게 믿고, 거기에 맞추어서 살면, 사실 잘 사는 겁니다. 習氣가 相續한다. 공부하는 習氣가 상속되는 사람은 계속 공부하러 오고, 그것이 相續안 되는 사람은 다른 일이 바쁘다고 안 오는 겁니다. 누구는 안 바빠서 오나요? 심심해서 오나요? 심심해서 온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重處偏墜(중처편추)라. 무거운 곳이 먼저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똑 같이 24시간인데, 내가 할 일이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더 소중하고, 무엇이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를 끊임없이 계산하는 겁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계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그러한 실재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習氣는 相續합니다. 세속이야기지만 담배피우는 사람들, 처음에는 아주 싫은 냄새인데, 한 번 피우고, 두 번 피우다 보면 다음에는 피우고 싶고 계속 당기는 그것이 習氣相續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習氣를 잘 익혀놔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대승불교의 가르침, 화엄경 같은 것을 자꾸 가까이 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習氣가 되도록하면 그것이 계속 相續해서 나중에는 보지 말라 해도 보게 됩니다.]
善知 所行方便(소행방편)과, 행하는 방편을 잘 알며,
善知 無量法(무량법)과, 무량한 법을 잘 알며,
善解諸威儀(선해제위의)와, 모든 위의를 잘 이해하며, [解와 知는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善知 世界差別(세계차별)과, 세계의 차별함을 잘 알며,
善知 前際後際事(전제후제사)와, 전생과 후생의 일을 잘 알며,
善知 演說世諦(연설세제)와, 세간의 진리를 잘 알아 연설하며,
善知演說 第一義諦(제일의제)니, 제일가는 의제를 잘 알아 연설하는 것이니[第一義諦=출세간 법= 진리에 대한 가르침]
是爲十이니라. 이것이 그 열 가지입니다.
② 勸學十種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種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法王處善巧와 法王處軌度와 法王處宮殿과
法王處趣入과 法王處觀察과 法王灌頂과 法王力持와 法王無畏와 法王宴寢과 法王讚歎이니라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種法이니,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해야 하는데
何者가 爲十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所謂法王處善巧(소위법왕처선교)와, 소위 法王處= 法王의 지위가 善巧 =익숙하고 훌륭함과
法王處 軌度(궤도)와, 법왕처의 궤범과 법도와, 法王處 宮殿(궁전)과, 법왕처의 궁전과,
法王處 趣入(취입)과, 법왕처에의 趣入=나아가는 것과 들어가는 것과
法王處 觀察(관찰)과, 법왕처의 관찰과, 法王 灌頂(관정)과, 법왕의 관정과, [灌頂= 이마를 만져주거나 물을 부어 주는 것]
法王 力持(력지)와, 법왕의 능력=힘의 유지=力持와, 法王 無畏(무외)와, 법왕의 無畏=두려움 없음과
法王 宴寢(연침)과, 법왕의 宴寢= 휴식, 편안한 잠자리와,
法王 讚歎(찬탄)이니라. 법왕을 찬탄하는 것이니라,
③ 說所以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心無障礙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何以故오? 왜냐하면, 欲令增進하야, 더욱 더 증진해서 心無障碍(심무장애)하고, 마음에 장애가 없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또 법을 들으면 곧 스스로 이해를 열어서 다른 가르침을 쫓지 않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12) 第十 灌頂住
[[灌頂住는 자비와 지혜의 자재롭고 청정하지 못한 장애를 대치해서 청정을 얻게 하는 것이니, 즉 선재동자가 사자당왕녀인 자행동녀를 친견하는 것이다. 王이란 지혜가 자재로운 것이며, 女란 자비를 따라 事를 함께 하는데 오염의 습기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지혜가 원만해지면 자비를 좇아 세간에 처하기 때문에 事를 함께 하면서도 습기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① 成就十種智
佛子야 云何爲菩薩灌頂住오 此菩薩이 得成就十種智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震動無數世界와
照耀無數世界와 住持無數世界와 往詣無數世界와 嚴淨無數世界와 開示無數衆生과 觀察無數衆生과
知無數衆生根과 令無數衆生趣入과 令無數衆生調伏이니 是爲十이니라
佛子야 此菩薩의 身及身業과 神通變現과 過去智와 未來智와 現在智와 成就佛土와 心境界와
智境界를 皆不可知니 乃至法王子菩薩도 亦不能知니라
[灌頂住 다음 왕위를 계승해서 나라의 천지, 동서남북 4해를 잘 다스리라는 뜻으로, 동서남북 4해 바닷물을 섞은 물을 머리에 부어주는 인도의 풍습 灌頂입니다. 여기서는 부처님을 뜻하며, ‘부처가 되어서 세상의 중생들을 잘 가르치고 제도하라.’는 灌頂입니다.]
佛子야 云何爲菩薩灌頂住오? 此菩薩이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의 관정주이겠는가?
得成就十種智(득성취십종지)하나니, 보살은 열 가지 지혜를 성취하게 되는데,
何者가 爲十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所謂震動無數世界(소위진동무수세계)와, 소위 무수한 세계를 진동시키고,
照耀(조요)無數世界와, 무수한 세계를 환히 비추며,
住持(주지)無數世界와, 무수한 세계를 지탱하여 머물고,
往詣(왕예)無數世界와, 무수한 세계에 나아가며,
嚴淨(엄정)無數世界와, 무수한 세계를 엄정히 하고,
開示(개시)無數衆生과, 무수한 중생에게 열어 보이며,
觀察(관찰)無數衆生과, 무수한 중생을 관찰하고,
知無數衆生根(지무수중생근)과, 무수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令無數衆生 趣入(취입)과, 무수한 중생을 취입하게 하고,
令無數衆生調伏(영무수중생조복)이니, 무수한 중생을 조복하게 하는 것이니,
是爲十이니라. 이것이 그 열 가지입니다.
佛子야 此菩薩의, 불자들이여, 이(관정주의) 보살의 身及身業(신급신업)과, 몸과 몸으로 짓는 업과
神通變現(신통변현)과 過去智(과거지)와 未來智(미래지)와 신통으로 변화해 나타냄과 과거의 지혜, 미래의 지혜,
現在智(현재지)와 成就佛土(성취불토)와, 현재의 지혜와 청취한 불국토,
心境界(심경계)와 智境界(지경계)를 皆不可知(개불가지)니, 마음의 경계, 지혜의 경계는 모두 알 수 없는 것이라서
乃至法王子菩薩도 亦不能知(역불능지)니라. 법왕자(9지의) 보살이라 해도 역시 알 수 없습니다.
② 勸學諸佛十種智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諸佛十種智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三世智와 佛法智와 法界無礙智와
法界無邊智와 充滿一切世界智와 普照一切世界智와 住持一切世界智와 知一切衆生智와
知一切法智와 知無邊諸佛智니라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諸佛十種智니,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부처님들의 열 가지 지혜 배우기를 권해야 하는데
何者가 爲十고?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所謂三世智(소위삼세지)와, 三世智 =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지혜, 佛法智(불법지)와, 불법의 지혜,
法界無碍智(법계무애지)와, 법계에 걸림없는 지혜, 法界 無邊智(무변지)와, 법계에 가이없는 지혜,
充滿一切世界智(충만일체세계지)와, 일체세계에 충만한 지혜,
普照(보조)一切世界智와, 일체세계를 두루 비추는 지혜,
住持一切世界智와, 일체세계를 지탱하여 머무는 지혜, 知一切衆生智와, 일체중생을 아는 지혜,
知一切法智와, 일체법을 아는 지혜, 知無邊諸佛智니라. 가이없는 부처님을 아는 지혜이니,
③ 說所以
何以故오 欲令增長一切種智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何以故오 欲令增長一切種智하고,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지혜를 키우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또 법을 들으면 곧 스스로 이해를 열어서 다른 가르침을 쫓지 않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이상 열 가지 對治는 모두 일념의 마음과 초발심時와 一行과 一時 안에서 먼저와 나중의 사이가 없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장애의 법을 대치해 一法, 一心, 一智慧를 이루면서도 一行 속에서 백 가지 다함 없는 법문이 모두 자기 마음의 부동지불로 體를 삼으니, 法事 속에 이 열 가지 다함 없는 법문을 갖추어 同과 別, 一과 多가 자재롭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의 根本無明分別의 종자[種]로 부동지불을 이루고, 법계의 체용을 '믿음으로 나아가 깨달아 들어가는[信進悟入]' 문을 삼기 때문에, 믿음으로 지위에 들어가 닦아 나가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10주 ·10행 ·10회향 ·10지 ·11지를 거치기까지 총체적으로 근본부동지불을 여의지 않고, 一時·一念· 一法·一行을 여의지 않고서 가없고 한량없고 不可說不可說인 법계와 허공계의 미진수 법문이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계와 근본부동지로부터 믿음으로 나아가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법이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용녀가 찰나에 성불한 것과 선재동자가 일생에 불과를 취한 것은 법계의 無性無生:성품 없음과 낳음이 없음이 일생이 되는 것이지 늦고 빠름이 生이 아니다. 즉 법계의 體에는 情見으로 헤아리는 늦고 빠름이나 길고 짧음이나 과거, 현재, 미래가 없기 때문이니, 바라건대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같이 알아야 한다.
바로 지금의 성불이 과거와 미래의 일체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일시에 성불하는 것이니, 법계의 智體에는 별개의 時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 방울의 물이 큰 바다에 들어가면, 문득 큰 바다와 같아져서 새로운 물과 옛 물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情을 버려야 비로소 볼 것이며, 識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가령 3승 중의 10주 보살은 오히려 삼계의 分段生死를 받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生空觀을 배워 闡提의 믿지 않는 장애를 대치하며, 10행 보살은 부분적으로 法空觀을 지어 자리이타의 행을 닦아서 성문의 自利만의 장애를 대치하며, 10회향 보살은 법공관을 지어서 대자비의 원력을 일으켜 성취하고 형상을 6道에 드리워 중생을 교화함으로써 독각의 自度:자기 제도의 장애를 대치하니, 이는 3승 중 3心의 보살이 地 이전의 세 가지 장애를 대치하면서도 다만 正使만을 없앨 뿐 습기는 없애지 못함을 밝힌 것이며, 10지 보살이라야 그 나머지 습기를 끊는 것이다.
이처럼 1승의 가르침에는 근본무명주지의 번뇌로서 문득 일체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를 삼는 것이니, 일체 중생이 모두 스스로 갖추고 있건만 단지 지체(智諦)가 자체성이 없고 의지함이 없어서 능히 스스로 요달치를 못하고 연(緣)을 만나야 비로소 요달하는 것이다.
무엇을 만나는 연(緣)이라 하는가? 세 가지 연이 있으니, ① 고(苦)의 연을 만나는 것으로 괴로움을 만나서 비로소 능히 발심하는 것이며, ② 즐거움의 연을 만나는 것으로 오래도록 인천(人天)에 처하여 내심으로 슬기를 밝히면서도 세간의 낙과(樂果)가 생사가 무상한 줄 요달해서 비로소 진(眞)을 구하는 것이며, ③ 부처님과 1승 보살을 보고 능히 발심하여 부처님의 종지(種智)를 구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연을 만나 바르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함으로써 무명이 본래 부처님의 지혜임을 능히 자각하는 것이니, 3승이 똑같이 마찬가지이지만 의락(意樂)의 깊고 얕음이 제가기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지를 말미암아 신심을 내고 근본지에 근거해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근본지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초발심주(住)에서 곧바로 5위가 일제히 두루하는 것이니, 비록 10주·10행·10회향·10지·11지의 행위(行位)의 법문과 닦아 나가는 궤도(軌度)를 열거했더라도 마치 왕의 보인(寶印)이 한 번 인(印)을 치면 차별이 없는 것과 같아서, 한 마음 대지혜[一心大智]의 인(印)으로 비롯 없는 삼세가 모두 일시(一時)에 있음을 인(印)치고 가없는 모든 법을 지인(智印)으로 다 두루하는 것이다.
이는 지혜가 모든 부처님과 같기 때문이며, 지혜가 중생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며, 지혜가 모든 법과 같기 대문이며, 지혜가 중심과 변두리, 안과 밖, 삼세, 길고 짧음, 가깝고 멂이 없기 때문이며, 지혜가 허공의 양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가령 세간의 허공은 요달해 알 바가 없지만, 무분별지(無分別智)의 허공일념(虛空一念)은 능히 허공을 지나치는 법문을 분별하니, 때문에 경전에서 “일체의 허공은 오히려 헤아릴 수 있지만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근본무명의 체용으로써 부동지가 일체 모든 부처님 및 일체 중생과 더불어 동일한 체성(體性)이며, 동일한 경계이며, 동일한 지해(智海)임을 보는 것이다. 또 발심한 시초부터 부처님 종지(種智)의 집안에 머물기 때문에 겨우 발심할 때라도 즉각 시방에 몸을 나타내면서 성불하는 것이니, 초발심공덕품에 자세히 밝히고 있다.
때문에 이 10주위 중 초발심주에 드는 자는 일체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대자비해(海)의 경계 속 주처(住處)에 머물러 그대로 5위를 전부 닦음으로써 초주와 10지가 한 부처님 지혜의 경계를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만 생소하고 익숙한 관습의 우열을 밝히는 것으로 주(住)와 지(地)의 명칭을 세우는 것이니, 지체(智諦) 안에서는 삼세의 정(情)으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용녀가 1찰나에 이미 3생(生)을 갖춰서 보현행이 원만하고 불과도 성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가령 문수사리보살의 게송에서는 “일념으로 널리 한량없는 겁을 관(觀)하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또한 머무는 것도 없다. 이렇게 삼세의 일을 요달해 알아서 모든 방편을 초월해 10력(力)을 성취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분명히 알라. 삼승이 3기(祈)에 세간을 벗어나 성불한다는 것은 방편의 가르침일 뿐이며, 이 가르침은 실다운 법에 근거하므로 원력(願力)으로 성불하는 등의 일은 설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원력으로 행을 성취하더라도 또한 실다움을 잡아 성불하기 때문에 원력으로 잠시 성취하는 것은 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라. 10주로부터 처음 지위에 들어가는 보살은 그대로 5위를 전부 닦는 것이니, 10주의 행상(行相)에 공통으로 10행·10회향·10지 등의 법문이 있기 때문이다.]]
(13) 六種震動現瑞
爾時에 佛神力故로 十方各一萬佛刹微塵數世界가 六種震動하니 所謂動과 徧動과 等徧動과 起와
徧起와 等徧起와 踊과 徧踊과 等徧踊과 震과 徧震과 等徧震과 吼와 徧吼와 等徧吼와 擊과 徧擊과 等徧擊이라
雨天妙華와 天末香과 天華鬘과 天雜香과 天寶衣와 天寶雲과 天莊嚴具하며 天諸音樂이 不鼓自鳴하며
放天光明과 及妙音聲하니 如此四天下須彌山頂帝釋殿上說十住法에 現諸神變하야
十方所有一切世界도 悉亦如是하니라
六種震動 10주 법문이 끝나고 六種18상으로 震動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설하니 威儀가 감응하면서 ① 대지가 6종류 18相으로 진동하며, ② 天이 열 가지 공양을 비내리듯 함. ③ 시방이 똑같이 설함을 총체적으로 매듭 지음. ④ 시방에 감응하는 위의의 멀고 가까움을 밝히는 것. ⑤ 시방의 명호가 같은 보살이 모두 와서 증명을 지음. ⑥ 시방 불과의 명칭이 妙法= 묘한 슬기로부터 이 법을 설함을 밝힌 것. ⑦ 법혜가 위의를 이어 받아 게송을 설함을 밝힌 것.]]
爾時(이시)에 佛神力故(불신력고)로, 그때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十方各一萬佛刹微塵數世界(시방각일만불찰미진수세계)가, 시방으로 각각 일만 불찰미진수의 세계가
六種震動(육종진동)하니여섯 가지로 진동하니
所謂動(소위동)과, 이른바 흔들흔들, 움직이거나 遍動(변동)과, 두루 흔들흔들, 두루 움직이거나
等遍動(등변동)과, 전체가 두루 흔들흔들, 같이 두루 움직이고,
起(기)와, 들먹들먹, 일어나거나 遍起와, 두루 들먹들먹하고, 두루 일어나거나
等遍起와, 전체가 두루 들먹들먹, 같이 두루 일어나며,
踊(용)과, 울쑥불쑥, 솟아 오르거나 遍踊과, 두루 울쑥불쑥, 두루 솟아 오르거나
等遍踊과, 전체가 두루 울쑥불쑥, 같이 두루 솟아 오르고,
[솟을 踊용.온천지대에 가면 온천물이 울쑥불쑥하게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震(진)과, 우르르, 흔들리거나 遍震과, 두루 우르르, 두루 흔들리거나
等遍震과, 전체가 두루 우르르하고, 같이 두루 흔들리며,
吼(후)와, 와르르, 부르짓거나 遍吼와, 두루 와르르, 두루 부르짓거나
等遍吼와, 전체가 두루 와르르, 같이 두루 부르짓고,
擊(격)과, 와지끈, 부딪치거나 遍擊과, 두루 와지끈, 두루 부딪치거나
等遍擊이라. 전체가 두루 와지끈, 같이 두루 부딪쳤다.
[우리 6근ㆍ6진ㆍ6식= 18계. 사람의 삶의 모든 영역이 十住법문에 감동해서 전율하는, 정신적인 변화와 충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밑줄 친 번역은 50년 전 쯤 운허스님이 역경원이 처음 생겼을 때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학자들을 모아서 해인사에서 수련대회 겸 불교용어를 한글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하는 세미나에서 정한 표현들입니다.]
雨天妙華(우천묘화)와, 하늘의 아름다운 꽃, 天 末香(말향)과, 하늘의 가루향,
天 華鬘(화만)과, 하늘의 화만=꽃 타래, 天 雜香(잡향)과 하늘의 여러 향, 天 寶衣(보의)와 하늘 보배옷,
天 寶雲(보운)과 하늘 보배구름, 天 莊嚴具(장엄구) 하늘의 장엄구들이 雨= 비내리듯 쏟아지고
天 諸音樂(제음악)이, 하늘의 온갖 음악이 不鼓自鳴(불고자명)하며, 저절로 흘러 나오며
放天光明(방천광명)과, 대광명과 及妙音聲(급묘음성)하니, 미묘한 음성이 펼쳐졌으니
如此四天下(여차사천하), 이 사천하 須彌山頂帝釋殿上(수미산정제석전상)에서 수미산 정상의 제석궁전 위에서
說十住法(설십주법)에, 십주법을 설하자 現諸神變(현제신변)하야, 온갖 신통변화가 나타나듯이
十方所有一切世界도, 시방의 모든 세계에서도 悉亦如是하니라. 다 그러하였다.
[경전에 나타난 수미산과 카일라스산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 혼동하고 있습니다. 티벳 사람들은 그것을 수미산이라고 그래요. 그산이 6713미터인가?, 에베레스트보다 훨씬 낮은데 산 생긴 것이 묘하게는 생겨서 아무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 둘레만 돌아요. 이 중에서도 아마 갔다 온 스님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수미산이라고 티벳에서 소문을 내서 스님들이 많이 가고, 티벳에서는 수미산으로 믿고 있습니다.
카일라스 산은 불교에서도 聖山(성산)으로, 힌두교에서도 聖山으로, 또 자이나교에서도 聖山으로, 티벳 토착종교인 본교에서도 聖山으로 여기는 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수미산은 아닙니다.
그것이 수미산이라면 제석천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수미산은 경전에서 말하는 전설의 산 또는 상징적인 산으로 해야 되는데 현실에 있는 것과 맞춰버리면 교리 일체가 다 무너지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카일라스 산; 카일라스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수정(水晶)’을 의미한다. 이 명칭이 영어 등에 전해지면서 ‘카일라시’(Kailash) 또는 ‘카일라스’(Kailas)로 전해졌다.
해발 6,656m의 미개척 봉우리로 현지에서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등정을 보장할 수 없고, 현재는 정상 등정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행 승려이자 음유시인이기도 했던 밀라레파(1040년 - 1123년 / 1052년 - 1135년)가 정상에 도달했다는 전설이 있다.
카일라스 산은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미산’으로, 본 교에서는 ‘아슈타바다’(Ashtapada)로 간주된다. 따라서 불교(특히 티베트 불교), 본 교, 힌두교, 자이나교에서 성지로 여긴다. 성지로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서는 카이라스 산을 링구아(남근)로 숭배하고, 폰교에서는 개파 조사인 시랍 미요가 강림한 땅으로 여기고 있다. 카일라스 산 주위의 순례로를 티베트 불교도는 오른쪽으로, 본도는 왼쪽 방향으로 ‘쿠얼러’라는 순례 행위를 한다. 일주 거리는 약 52km이며, 순례로는 게르와 그트파가 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지순례자들은 오카 인보치산을 걷는 것을 행운을 가져오는 신성한 의식으로 여겼다.일반적으로 인도교도와 불교도들은 시계방향으로 산을 돌지만 자이나교도와 본교신자들은 반시계방향으로 산을 돈다.
이 순례로를 따라 탄보체, 몇 개의 곰파, 조장지(鳥葬地)나 불교의 흔적이 있다. 순례로 최고점인 ‘드르마라’는 해발 5,630m에 이른다. 일반 순례로 내부에 난코르라는 순례로가 있다. 산기슭 남쪽에 타르첸 마을이 있다.
많은 순례자는 쿠얼러를 13회 실시 한다. 티베트력의 오년(午年)에는 한 번의 쿠얼러로 12회분의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체 투지(캐쟈)로 쿠얼러를 하는 사람도 종종 있으며, 순례로 하는 행위 자체가 공덕이라고 생각하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카일라스 산을 목표로 신앙심을 높이는 두꺼운 티베트 불교도도 있다.
현재 카일라스 산을 통과하는 자동차 전용 도로의 건설이 중국 정부에 의해 계획되고 있으며, 중단을 요구하는 운동이 국제적으로 전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