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63권 8

Skunky 2024. 9. 3. 08:00

大智度論 釋歎淨品 第四十二 卷六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소역. 

42. 탄정품(歎淨品) 풀이함① 4

 

▶論. 釋曰:佛初命須菩提說般若,有所說,不應求其因緣;若餘人所說者,當求因緣。舍利弗已問淸淨相,佛作證;今須菩提說淸淨相,佛亦爲證。

▷논. 해석한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수보리 존자에게 명하여 반야를 해설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해설한 것에서 그 인연을 구하지 않았어야 되거니와 만약 그 밖의 사람이 해설한 것이라면 당연히 인연을 구해야 된다.

사리불 존자가 이미 청정한 청정상(淸淨相)을 물었을 때에도 부처님께서 증명하여 주셨으며,

지금 수보리 존자가 청정상(淸淨相)을 해설할 때도 부처님께서는 역시 증명하여 주셨다.

 

“我淨故五衆淨”者,如我畢竟無所有、不可得,五衆亦如是。畢竟空卽是我淸淨、五衆淸淨。解我空易,解五衆空難,是故以易解喩難解。

‘나(我)가 청정하기 때문에 오중(五衆)도 청정하다.’ 함이란, 나(我)라는 것이 필경에 있지 않은 무소유(無所有)이요, 얻어질 수도 없는 불가득인 것과 같이 오중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필경공(畢竟空)이란 곧 나(我)가 청정하고 오중도 청정한 것이니, 아공(我空)은 이해하기 쉽고 오중공(五衆空)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비유한 것이다.


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須陁洹果乃至佛道亦如是,我淨故,是法亦淨。

육바라밀 내지 18불공법과 수다원의 과위 내지 부처님의 불도 역시 그와 같나니, 나(我)가 청정하기 때문에 이 법도 청정한 것이다.


問曰:上言“我無所有故,色乃至十八不共法亦無所有”,今何以說“須陁洹果乃至佛道自相空”?

묻나니, 앞에서는 “나(我)라는 것은 있지 않은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물질(色)으로부터 18불공법까지도 무소유(無所有)이다.”고 말씀하셨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수다원에서 부처님의 불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스로가 공한 자상공(自相空)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我從和合因緣假名生,於無我中有我顚倒,是故說“我虛妄無所有”,以五衆著處因緣故無所有。

답하나니, 나(我)라는 것은 인연이 화합한 것으로서 임시로 가명에 불과한 것이요, 무아(無我) 가운데에서 나(我)라는 뒤바뀜의 전도가 있으므로 “나는 허망한 것으로 무소유(無所有)이고, 오중은 집착한 곳의 착처(著處)의 인연 때문에 무소유(無所有)이다.”고 설명하였으며, .


檀波羅蜜等諸法雖善,是有爲作法、菩薩所著故,言“無所有”。須陁洹果等是無爲法,無爲法自相空,所謂無生無滅、無住異故,是故不說“無所有”,但言“自相空”。

단바라밀 등의 제법은 비록 선(善)할지라도 이것은 유위(有爲)로 짓는 작법(作法)이라 보살이 집착하게 되므로 “무소유(無所有)이다.”고 하며, 

수다원의 과위 등은 바로 무위법(無爲法)이요 무위법은 자상이 공하나니, 이른바 생기는 것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멸하는 것도 없는 무멸(無滅)이며, 머무르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는 무주무이(無住無異)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닌 무소유(無所有)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자상공(自相空)이다.”고만 말할 뿐이며,


復次,有爲法中邪行多故,說“無所有”;無爲法中,無生無滅,無邪行故,說“自相空”。

또한 유위법에는 삿된 행이 많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닌 무소유(無所有)이다.”라고 말하나,

무위법은 무생무멸(無生無滅)이고 삿된 행도 없는, 무사행(無邪行)기 때문에 “자상공(自相空)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我淨,一切種智淨”者,以菩薩深著故無相、無念。無相者,是無相三昧。無念者,於無相三昧亦不念。

“나(我)가 청정하면 일체종지도 청정하다.”고 함이란, 보살이 깊이 집착하기 때문일 뿐, 무상(無相)이고, 무념(無念)이라는 것이며,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바로 무상삼매(無相三昧)요, 무념(無念)이라는 것은 이 무상삼매에 대해서도 역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今須菩提知般若波羅蜜眞淸淨,故白佛:“用二淨故無得無著。”

지금 수보리 존자는 반야바라밀이 진실로 청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두 가지가 다 청정하기 때문에 얻음도 없는 무득(無得)이고, 집착도 없는 무착(無著)입니다.”고 한 것이며, 


淸淨有二種:一者、用二法淸淨,二者、用不二法淸淨。二法淸淨,是名字淸淨;用不二法淸淨者,是眞淸淨。

청정(淸淨)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이법(二法)으로써 청정한 것이요,

둘째는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으로써 청정한 것이다.

이법(二法)으로써 청정하다는 것은 바로 명자(名字, 이름)으로써 청정한 것이요,

불이법(不二法)으로써 청정하다는 것은 바로 진실로 청정한 것이다.


佛言:“諸法畢竟空相。”“云何以二法淸淨有得有著?”此中說因緣,所謂一切法無垢無淨。二淸淨中,分別是垢、是淨。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제법은 필경에는 공한 공상(空相)이거늘 어떻게 이법(二法)으로써 얻음도 있고 집착도 있겠는가?”라 하시고 여기에 대하여, “이른바 일체법은 더러운 구(垢, 때)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나니, 이 구(垢, 때)와 정(淨)의 두 가지의 청정함 가운데에서 이것은 구(垢, 때)요, 이것은 정(淨)이라고 분별한다.”고, 그 인연을 말씀하셨다.


“我無邊故五衆淸淨”者,如我空,空故無邊;五衆亦如是。

“나(我)가 끝없이 무변한 아무변(我無邊)이기 때문에 오중(五衆)이 청정하다.”고 함이란, 마치 나가 공한 아공(我我)이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오중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問曰:常言“畢竟淸淨故”,今何以言“畢竟空、無始空”?

묻나니, 항상 “필경청정(畢竟淸淨)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거늘, 지금은 어찌하여 “필경공(畢竟空)이요 무시공(無始空)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畢竟空”卽是“畢竟淸淨”,以人畏空,故言淸淨。此中說“我無邊”,我卽衆生,衆生空。何以故?無始空故。

답하나니, 필경공(畢竟空)이 곧 필경청정(畢竟淸淨)이니, 사람들이 공(空)을 두렵게 여기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가운데에서 “나는 끝이 없다는 아무변(我無邊)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나(我)는 곧 중생이며, 중생은 공(空)한 것이니, 왜냐하면 무시공(無始空)이기 때문이다.


問曰:“能如是知,是名般若”者,能以衆生空、法空,以一切法畢竟空,是名般若波羅蜜。

“이와 같이 안다면 이를 바로 반야라 하는지요?”라고 물은 것은, 중생이 공한 중생공(衆生空)이고 법이 공한 법공(法空)이라면, 일체법은 필경공인 것이라,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는 것이다.


般若波羅蜜卽是畢竟淸淨。佛常答“畢竟空”,是故問:“若畢竟空,云何言‘菩薩能如是知,是名菩薩般若’?”難畢竟空也,以畢竟空無知故。

반야바라밀은 곧 필경청정(畢竟淸淨)이라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마침내 공한 필경공(畢竟空)이다.’고 대답하셨나니, 이 때문에 물은 것이며,

만약 필경공(畢竟空)이라면, 어찌하여 “보살이 이와 같이 알면 바로 보살의 반야라 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필경공에 대하여 따져 물은 것이니, 필경공에는 앎(知)이 없기 때문이다.


佛言:“知道種故。”菩薩雖知一切法畢竟空,欲令衆生得此畢竟空,遠離著心。畢竟空,但爲破著心故說,非是實空“畢竟空”,卽是答“道種智”。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도의 종자인 도종(道種, 도종지)을 알기 때문이다.”고 하셨으며,

보살은 비록 일체법이 필경공이라고 알지라도 중생들로 하여금 이 필경공을 얻어서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게 하기 위한 것이니, 필경공은 다만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만 말한 뿐, 실로 공한 것이 아니니,

필경공이 곧 도종지(道種智)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爾時,須菩提白佛言:“世尊!行般若者作是念:色不知色等。”佛意般若無定相,但以道種智故分別說,令菩薩行般若有方便故,法雖畢竟空,亦如是知。

그때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를 행하는 이는 ‘물질(色)은 물질(色) 등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요”라고 하였는데,

부처님의 뜻은 반야는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고 다만 도종지로써 분별하여 말씀하시어 보살들로 하여금 반야를 행하게 하는 것일 뿐이며, 방편이 있기 때문에 법이 비록 필경공이라 하여도 역시 그와 같이 아는 것이다.


“色不知色法”等。觀一切法畢竟空,唯有能觀智慧在,不應畢竟空,以引導衆生著心令入畢竟空。

‘물질(色)은 색법(色法)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등은 일체법이 필경공임을 관찰함이요,

오직 능히 관하는 지혜의 능관지혜(能觀智慧)가 있을 뿐인 것을 관찰하나니, 필경공으로써 응하지 않으므로, 중생의 집착하는 마음을 무상도(無上道)로 향하도록 인도하여 필경공에 들게 하시는 것이다.

 

佛答:“若菩薩行般若有方便,能觀外法畢竟空,色不知色等;內自觀內心,亦如是方便力故,若行檀時,不作是念:‘我施與彼,彼是受施。’”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반야를 행할 때에 방편이 있으면 외법(外法)이 필경공이라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고 하셨다

‘물질(色)은 물질(色) 등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내심(內心)을 관찰하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방편의 힘 때문이라는 것이며, 만약 단(檀, 보시)을 행할 때에는 “나는 그에게 베풀어 준다, 그는 보시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須菩提!色不知色等”者,一切法空故不相知,不相知故無所作,破二事,所謂受者、所施物此二事,皆是外也。今破與者乃至我修一切種智亦如是。此中說因緣。

수보리의 ‘물질(色)은 물질(色) 등을 알지 못한다.’ 함이란, 일체법은 공하기 때문에 서로 알지 못하며,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짓는 것도 없고, 두 가지를 부수는 것이니, 이른바 받는 수자(受者)와 보시하는 물건의 시물(所施)이다.

이 두 가지 모두는 바깥의 외경계(外境界)이며, 

지금은 주는 이를 부수는 것이니, 나아가 “나는 일체종지를 닦는다.”고 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 이 가운데에서 그 인연을 말씀하셨다.


“菩薩行般若,方便故無如是分別。”以內空故乃至自相空,是十三空破諸法盡,後五種空㧾相說,是名菩薩無所碍。無所碍者,以是諸空於一切法無所碍。

보살은 반야의 방편을 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분별이 없으며, 내공(內空)에서부터 자상공(自相空)에 이르기까지 13가지 ‘공(空)’으로 제법을 모조리 파한 것이다. 

그리고 뒤의 다섯 가지 공으로는 전체의 총상(總相)을 설명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보살에게는 장애가 없는 무소애(無所礙)라 하는 것이다.

‘무소애(無所礙)’ 라 함이란, 모두가 공하므로 일체법에 있어서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십팔공(十八空)에서 앞의 13가지 공(十三空)= 내공(內空)‧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상공(自相空)

뒤의 다섯 가지 공= 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大智度論卷第六十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