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63권 6

Skunky 2024. 9. 2. 08:02

大智度論 釋歎淨品 第四十二 卷六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역.

42. 탄정품(歎淨品) 풀이함① 2

 

▶論. 釋曰:“是淨甚深”者,淨有二種:一者、智慧淨,二者、所緣法淨。此二事相待,離智淨無緣淨,離緣淨無智淨。所以者何?一切心心數法從緣生,若無緣則智不生。

▷논. 해석한다; ‘이 청정함의 정(淨)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이다.’ 정(淨)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혜가 청정한 것이요, 둘째는 반연할 법이 청정한 것이다. 

  가지는 상대(相待)하여 있는 것이니, 지혜의 청정함을 여의고는 반연할 대상이 청정하지 못하고, 반연할 대상의 청정함을 여의고는 지혜도 청정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일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만약 인연이 없으면 지혜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譬如無薪,火無所然。以有智故知緣爲淨,無智則不知緣淨。

비유하자면, 마치 불이 없으면 섶이 타지 않는 것과 같이, 지혜가 있기 때문에 반연하는 대상이 청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지혜가 없으면 반연하는 대상이 청정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此中智淨、緣淨相待,世閒常法。是中說:離智、離緣。

 가운데에서 지혜의 청정함과 대상의 청정함은 상대되는 것으로, 세간의 일상적인법(常法)이거니와, 여기에서는 지혜를 여의는 것과 반연할 대상을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諸法實相,本自淸淨。爲心、心數法所緣,則污染不淸淨;譬如百種美食,與毒同器,則不可食。

제법의 실상은 본래의 자체가 청정하거니와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에 반연되면 곧 오염되어서 청정하지 않게 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온갖 맛있는 음식도 독이 묻은 그릇에 담으면 먹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諸法實相常淨,非佛所作,非菩薩、辟支佛、聲聞、一切凡夫所作;有佛、無佛,常住不壞相。在顚倒虛誑法及果報中,則污染不淨。

제법의 실상은 항상 청정한 것으로, 부처님께서 지은 것도 아니요, 보살이나 벽지불이나 성문이나 일체 범부 등이 지은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서 파괴되지 않는 불괴상(不壞相)이지만 전도되 거짓된 허광법(虛誑法)과 과보 안에 있으면 곧 오염되어 청정하지 못하게 되며, 

 

是“淸淨”有種種名字,或名“如”、“法性”、“實際”,或名“般若波羅蜜”,或名“道”,或名“無生無滅”、“空”、“無相”、“無作”、“無知無得”,或名“畢竟空”等,如是等無量無邊名字。

 청정(淸淨)함에는 갖가지의 이름이 있나니, 혹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라 하기도 하고 

혹은 반야바라밀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도(道)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무생(無生), 무멸(無滅) 공(空)하고, 무상(無相), 무작(無作), 무지(無知), 얻을 것이 없는 무득(無得)이기도 하며, 혹은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하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무량하고 무변한 이름이 있는 것이다.


舍利弗觀是般若波羅蜜相,雖不可見、不可聞、不可說、不可破壞,而誹謗得無量罪;信受正行,則得無上果報。

사리불 존자는   반야바라밀의 상(相) 비록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로  수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다 할지라 비방하면 무량한 죄를 얻으며, 믿고 받아서 의지하고 바르게 행한다면 가장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는 것을 관찰하며, 


舍利弗發希有歡喜心,而白佛言:“世尊!是淨甚深!”佛答:“汝所見者以爲希有,實相中復過汝所見。一切法中,畢竟淨、無所著,乃至淨體亦不著,是名畢竟淸淨。”

사리불 존자가 희유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청정함은 매우 깊습니다.”고 하였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보는 것도 희유하겠지만, 실상(實相) 가운데에서는 네가 보는 것보다  뛰어나나니, 일체법은 필경정(竟淨)이라 집착할 것도 없으며, 나아가 청정한 체(體, 체성)에도 집착하지 않나니, 이를 필경청정(畢竟淸淨)이라 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復次,淸淨主,所謂十方三世諸佛;諸佛亦不著是淸淨,是故言“畢竟淸淨故”。是淸淨般若波羅蜜能令一切賢聖無邊苦盡,有是大利益,而亦不著是般若波羅蜜。如是有無量因緣“畢竟淸淨”,是淨甚深!

또한 청정한 주인의 청정주(淸淨主)는 이른바 시방세의 모든 부처님이시니, 모든 부처님께서도  청정함에 집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필경청정(畢竟淸淨)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성현으로 하여금 끝없는 고통을 다하게 하나니, 이러한  이익이 있으면서도  반야바라밀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와 같은 무량한 인연이 있으므로 필경청정(畢竟淸淨)이며, 이 청정함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인 것이다.


舍利弗問:“何法畢竟淸淨故,是淨甚深?”佛答:“色等諸法淸淨故,是淨甚深。”所以者何?色等諸法本末因果淸淨故,是淨甚深,如上品中說。

사리불 존자가 묻기를 “어떠한 법이 필경청정이기에  청정함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인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되 “물질(色) 등의법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함은 매우 깊다.”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물질(色) 법은 처음과 끝의 본말(本末)의 인과(因果)가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함은 매우 깊은 것이니, 상품(上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菩薩於色等法中觀行斷故,得如是淸淨。”以是故名“色等淸淨”。是淨能破一切法中戲論無明,能與畢竟空智慧光明,是故言“淨明”。

보살은 물질(色) 등의 법에서 관행(觀行)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청정함을 얻게 되나니,  때문에 이름(名)과 물질(色) 등은 청정한 것이다.

 청정함은 일체 가운데서 쓸모없는론과 무명(無明)을 파괴하고, 필경에는 공한 지혜의 광명을 주게 되기 때문에 ‘청정한 광명의 정명(淨明)’이라 한다.


行檀波羅蜜等諸菩薩妙法故,得是“淨明”。是淨能與有餘涅槃故,言是“淨明”。今與無餘涅槃故,言“是淨不相續”。

단(보시)바라밀  모든 보살의 묘법()을 행하기 때문에  청정한 광명의 정명(淨明)을 얻으며, 이러한 청정함은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주기 때문에 ‘이 청정한 광명의 정명(淨明)’이라 하고, 

이제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주기 때문에 ‘이 청정함은 상속(相續)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先以空等三三昧捨諸善法,後壽命自然盡故,色等五衆不去亦不相續,故“淨不相續”。以百八諸煩惱不能遮覆污染淨故,言淨無垢。

먼저 공(空) 등의 삼삼매(三三昧)로써 모든 착한법을 버리고, 나중에는 수명이 저절로 다하기 때문에 물질(色) 등의중(五衆)은 떠나가지도 않고 또한 상속하지도 않는 것이므로 ‘청정함은 상속하지 않는다.’고 하며,

108의 모든 번뇌로써도 청정함을 덮어 가리거나 더럽힐  없기 때문에 ‘청정함은 구(垢, 때)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行如是諸法實相不二道,從苦法忍乃至十五心,是名“得”;第十六心,得沙門果,是名“著”。著者著不墮落,得之別名也。

이와 같이 제법실상의 둘이 아닌 불이도(不二道)를 행하면서 고법인(苦法忍)으로부터 십육심(十六心)에 이르기까지를 '득(得)'이라 하고, 

제십육심(第十六心)에서는 사문의 과위인 사문과(沙門果)를 얻으므로 이것을 착(着)이라 하며,

착(着)한다는 착은 타락(墮落)하지 않는 것으로, 득(得)의 별명(別名)인 것이다.

 

16심(十六心, ṣoḍaśa-citta, ṣoḍaśa-cittaka, sixteen mental states)= 16찰나의 마음, 열여섯 마음 또는 견도 16심(見道十六心) 은 견도 · 수도 · 무학도의 3도 가운데 견도(見道)의 총 기간에 해당하는 16찰나(十六刹那)를 말한다. 찰나(刹那)를 심(心: 마음)이라고 한 것은 마음은 유위법이므로 찰나마다 생멸 · 상속하는데,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유전연기와 환멸연기의 연기법에 따라 마음은 각 찰나에서 지혜[慧]라는 마음작용(심소법)과 상응하기도 하고 번뇌(煩惱)라는 마음작용(심소법)과 상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견도는 인내[忍]하는 예비적 수행 즉 범부위(3현위와 4선근위)의 수행 끝에 마침내 범부의 마음이 16찰나에 걸쳐 16가지 지혜[慧], 즉 8인(八忍) · 8지(八智)와 상응함으로써 모든 견혹(見惑) 즉 모든 이지적인 번뇌들, 달리 말하면,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앎에 의해 일어나는[分別起] 모든 견해성[見]의 번뇌[惑]들을 제거하여 범부의 상태를 벗어나 성인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16심이라고 한다.

견도(見道)의 16심(十六心) 즉 16찰나는 '언어 · 문자 · 관념 또는 개념의 개입 없이 무루지로써 4성제를 바로[直接] 면전에서 보는 상태'인 4제현관(四諦現觀)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 위키


復次,行六波羅蜜,乃至生柔順忍,是名“得”;能生無生法忍,入菩薩位,是名“著”。是淸淨法中,用無所得心,無此二事,故名“無得無著”。

또한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에서 유순인(柔順忍)이 생기는 것까지를 바로 득(得)이라 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일으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을 착(著)이라 하나니, 

 청정한 법에서 얻을 것이 없는 마음의 무소득심(無所得心)을 쓰면, 이  가지가 없기 때문에 득(得)도 없고 착(著)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行如是法,知一切法畢竟空;畢竟空故,不取相;不取相故,不起不作三種業;不作業故,一切世閒無生。

이와 같은 법을 행한다면 일체법이 필경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필경공이기 때문에 상(相)을 취하지도 않고,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의 삼종업(三種業)을 일으키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일체의 세간에 생함이 없는 무생(無生)인 것이다.


“世閒”,所謂三界。此中二因緣故不生:一者、三種生業不起故,二者、三界自性不可得故。

세간(世間)이란 이른바 삼계(三界)이며, 이 가운데서는  인연 때문에 생하지 않나니, 

첫째는  가지의 생하는 생업(生業)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삼계의 자성(自性)은 얻을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此中佛摠說因緣,所謂三界自性空,是故說“三界色等諸法自性不可得”。是淨無知,諸法鈍故,如上品中說。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통틀어 인연을 말씀하셨나니, 이른바 “삼계의 자성이 공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삼계에서 물질(色) 등의 제법의 자성을 얻을  없다.”고 하셨으니,  청정함은 앎이 없는 무지(無知)이니법이 둔(鈍)하기 때문이며, 상품(上品)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一切諸法性常不生,不生故不可得,不可得故畢竟淸淨。

제법의 성품은 항상 나지 않는 상불생(常不生)이며, 불생(不生)이 때문에 얻을  없는 불가득이고, 불가득이기 때문에 필경청정인 것이다.


舍利弗得聲聞波羅蜜,佛爲一切智人,是二人問答故,諸菩薩貪著是般若波羅蜜。

사리불 존자는 성문의 바라밀을 얻은 이요,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분이시니,   묻고 답하기 때문에 모든 보살들은  반야바라밀을 탐착하게 되는 것이라.


是故舍利弗欲斷其貪著,故說言:“世尊!般若波羅蜜雖有如是功德,畢竟淸淨故,於薩婆若亦無益無損。”如夢如幻中,雖有得失,亦無益無損;如虛空畢竟淸淨、無所有,亦因是虛空有所成濟,亦不得言空有所作,亦不得言空無所益。

 때문에 사리불 존자는 그들의 탐착을 끊게 하고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에 비록 이러한 공덕이 있다 할지라도 필경에 청정하기 때문에 살바야(薩婆若)에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습니다. 

마치 꿈이나 환(幻) 가운데에서는 얻거나 잃는 것이 있을지라도, 실로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것과 같으며, 

마치 허공이 필경에 청정하여 무소유(無所有)이므로  허공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허공이 짓는 유소작(有所作)이라고 말할  없으며, 또한 허공은 더함이 없는 무소익(無所益)이라고도 말할  없는 것과 같습니다.”고 한 것이다.


檀波羅蜜因般若波羅蜜有所作,是故言“般若波羅蜜無益無損”。

단바라밀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지음 있는 유소작(有所作)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般若波羅蜜觀一切法有失,不淨,無常、苦、空、無我,不生不滅、非不生非不滅等。種種因緣,讚歎滅諸觀戲論、斷語言道,是故說“般若波羅蜜淸淨,於諸法無所受”。滅諸觀戲論、斷語言道,卽是入法性相,是故此中說“法性不動故”。

반야바라밀로 “일체법은 상실함이 있고 청정하지 않으며 덧없고 괴로우며 공하고 무아이며, 불생불멸이며,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관찰하면서,

갖가지의 인연으로 찬탄하여 모든 관(觀)과 쓸모없는 희론을 없애고 말이 끊어진 것이므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은 청정하여 제법에 대하여 받아들일 것이 없는 무소수(無所受)이며, 모든 관(觀)과 희론이 멸하고 말의 길이 끊어 졌다.”고 하였다.

이는 곧 법성(法性)과 법상(法相)에 들어간 것이니, 이 때문에 이 가운데서 “법성은 부동(不動)이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