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60권 4
大智度論 釋挍量法施品 第三十八 卷六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8. 교량법시품(校量法施品)을 풀이함 4
▶論. 者言:佛更欲以異門,明般若波羅蜜勝故,問帝釋言:
“若有人敎一閻浮提人行十善道,其福多不?”如經中廣說。
▷논. 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다른 문(門)으로써 반야바라밀이 뛰어나다는 것을 밝히시고자, 짐짓 제석에게 물으신 것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의 염부제 사람들을 교화하여 10선도(善道)를 행하게 하면 그의 복이 많겠느냐”고 하신 것이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으며,
此中說所以勝因緣,所謂般若波羅蜜,廣說諸無漏法,成三乘道,入涅槃,不復還十善道但善有漏法,受世閒無常福樂,還復墮苦,是故不如。
이 가운데에서는 반야바라밀이 수승한 까닭을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모든 무루법(無漏法)을 널리 연설하여 삼승(三乘)의 도를 이루어서 열반에 들어가게 하며, 다시는 십선도에 돌아오지 않거니와
단지 착한 유루법(有漏法)은 세간의 덧없는 복락(福樂)을 받다가 다시 괴로운 곳으로 떨어질 뿐이니, 그 때문에 그보다 못하다.”고 하신 것이며,
復次,先是世閒法,後是出世閒法;先是能生生死法,後是能滅生死法;先是無常樂因緣,後是常樂因緣;先是凡夫、聖人共法,後但是爲聖人法。如是等差別。
또한 앞의 것은 세간법(世閒法)이고 뒤의 것은 출세간법(出世閒法)이며,
앞의 것은 나고 죽는 생사법(生死法)을 내는 것이며, 뒤의 것은 나고 죽는 생사법을 멸(滅)하는 것이며,
앞의 것은 덧없는 무상락(無常樂)의 인연이고 뒤의 것은 항상한 상락(常樂)의 인연이며,
앞의 것은 범부와 성인이 함께 하는 법이고, 뒤의 것은 성인만의 법일 뿐이니,
이와 같은 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無漏法者,三十七品、十八不共法,乃至無量諸佛法。欲令是事了了易解故,更說因緣,所謂“敎一人令得須陀洹果,得大福德,勝於敎閻浮提人行十善道——雖行十善,未免三惡道故。乃至得阿羅漢、辟支佛道亦如是。”
무루법(無漏法)이라 함이란, 37조도품과 18불공법에서 무량한 모든 부처님의 불법에 이르기까지이니,
이들을 명료하고 알기 쉽게 하시고자 짐짓 다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한 사람을 교화하여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하면 큰 복덕을 얻으며, 염부제의 모든 사람들을 교화하여 십선도를 행하게 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나니,
이는 비록 10선도를 행할지라도 삼악도(三惡道)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니, 나아가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道)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신 것이며,
佛更說譬喩:“若有人敎一閻浮提人令得聲聞、辟支佛道,不如有人敎一人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人得福多。何以故?須陀洹至辟支佛皆從菩薩生故。”
부처님께서 다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한 염부제 사람들을 교화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道)를 얻게 한다고 하여도, 다른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해서 많은 복덕을 얻는 것 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다원에서 벽지불까지의 모두는 보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으며,
是般若波羅蜜中,種種說佛道因緣,是故書般若波羅蜜經卷與人,勝以十善敎四天下乃至如恒河沙等世界。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갖가지로 부처님 불도의 인연을 설명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서 남에게 주는 것이 십선도로써 사천하(四天下)에서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교화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며,
復次,敎閻浮提人乃至恒河沙等世界人令行四禪等乃至五神通亦如是。但四禪等是離欲人,與十善差別。
또한 염부제에서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사람들을 교화하여 사선(四禪) 내지 오신통(五神通)을 행하게 하는 것 또한 그와 같으며,
단지 사선 등은 곧 탐욕을 여읜 사람의 경지로, 십선도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復次,若有人敎一閻浮提人乃至如恒河沙世界,令行十善道、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五神通,不如是人受持般若波羅蜜,讀、誦說、正憶念,得福多。
또한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염부제에서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사람들을 교화하여 십선도ㆍ사선ㆍ사무량심ㆍ사무색정ㆍ오신통을 행하게 한다 하여도,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하면서 읽고 외우는 독송(讀誦)하고 해설하며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여 많은 복을 얻는 이보다는 못하며,
得福多者,上以般若經卷與他人,今自行般若爲異。先十善道,乃至五神通別說,今合說。
복을 얻는 것이 많다고 함이란, 위에서는 반야의 경전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요,
여기에서는 스스로가 반야를 수행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며,
앞에서는 십선도에서 오신통에 이르기까지 따로따로 설명하였으나 여기에서는 합쳐서 설명한 것이다.
問曰:何以不解“受、持、讀、誦、說”,但解“正憶念”?
묻나니, 무엇 때문에 수지(受持)하고, 읽고 외우는 독송(讀誦)하고, 해설하는 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시고, 단지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것에 대해서만 해석하신 것입니까?
荅曰:受持、讀誦、說,福德多;以正憶念能具二事,所謂福德、智慧,是故別說。如人採藥草,乃至合和而未服之,於病無損,服乃除病;正憶念如服藥病愈,是故但解正憶念。
답하나니, 수지(受持)하고, 읽고 외우는 독송(讀誦)하고, 해설하면 복덕이 많으나,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면 두 가지를 갖추게 되나니, 이른바 복덕과 지혜이다.
이 때문에 따로 설명한 것이니, 마치 사람이 약초(藥草)를 캐어서 약을 지어 놓고도 아직 그것을 먹지 못하였다면 병에 효험이 없으나, 먹은 뒤에야 비로소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이,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것은 마치 약을 먹고 병이 나은 것과 같기 때문에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것만을 해석하신 것이며,
正憶念相,所謂非二非不二行般若波羅蜜。二不二義,如先說。
바르게 기억하는 정억념상(正憶念相)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둘이 아닌 것도 아닌 비불이(非不二)이니,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의 둘과 둘이 아닌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한 것과 같다.
初以書經卷,勝舍利;中以經卷與人,勝敎人行十善乃至五通;今受持、讀誦、說,於受持邊,正憶念最勝。
처음에서는 경전을 베껴 쓰면 사리(舍利)보다 뛰어나다는 것이요,
중간에서는 경전을 다른 이에게 주어서 사람들을 교화하여 십선도에서 오신통까지 행하게 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수지(受持)하고, 읽고 외우는 독송(讀誦)하고, 해설하되,
수지(受持)하는 편에서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다.
今如諸佛憐愍衆生故爲解其義令易解,勝自行正憶念。是時,佛欲廣分別福德故,說言:“若有人盡形壽供養十方佛,不如爲他解說般若義。”此中說勝因緣:“三世諸佛皆學是般若成無上道。”
여기에서는 또한 모든 부처님과 같이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을 위하여 그 이치를 해설하여 이해하기 쉽게 한다면, 자신이 스스로 행하면서 정억념(正憶念)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니,
이 때에 부처님께서는 복덕을 널리 분별하시고자 짐짓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몸과 수명이 다하도록 시방의 부처님께 공양하더라도, 다른 이를 위하여 반야의 이치를 해설하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하신 것이며,
여기에서 그 뛰어난 인연을 말씀하시되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이룬다.”고 하신 것이다.
復次,“若菩薩於無量劫行六波羅蜜,以有所得故,不如爲人解說般若波羅蜜”
有所得者,所謂以我心於諸法中取相故。
또한 보살이 무량한 겁 동안 육바라밀을 행한다 하여도, 그것은 얻을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이니,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며,
얻을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 함이란, 이른바 '나'라는 아심(我心)으로 제법 가운데에서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佛更欲說般若正義,故荅帝釋:“菩薩以無所得行六波羅蜜,則得具足。”具足卽是般若波羅蜜正義。
부처님께서는 다시 반야의 바른 정의(正義)를 말씀하시고자 하여 짐짓 제석에게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얻을 바 없는 무소득(無所得)으로써 육바라밀을 행하여 완전히 갖추게 되나니, 완전히 갖추게 되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바른 정의(正義)이다.”라고 하신 것이며,
有人未來世說相似般若者,會中人聞說正憶念,作是思惟:“何者是邪憶念?”是故說相似般若波羅蜜相。如人知是道非道故,能捨非道、行正道。
“어떤 사람이 미래의 세상에서 엇비슷한 상사(相似) 반야를 연설한다.”고 함이란,
모임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한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어느 것이 삿되게 기억하는, 사억념(邪憶念)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한 때문에 엇비슷한 상사(相似)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말씀하신 것이니,
마치 사람이 옳은 길의 정도(正道)와 길이 아닌 비도(非道)를 알기 때문에 잘못된 비도(非道)를 버리고 바른 길의 정도(正道)를 가는 것과 같으며,
復次,憐愍未來世衆生不見佛及諸大菩薩,但見經書;邪憶念故,隨著音聲,說相似般若波羅蜜。
또한 미래세의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면서 부처님과 모든 큰 보살들을 뵙지 못하고 단지 경서(經書)만을 볼 뿐이라서, 삿되게 사억념(邪憶念)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음성에만 집착하므로 엇비슷한 상사(相似) 반야바라밀을 연설하게 된다.
相似者,名字語言同,而心義異。如以著心、取相說五衆等無常乃至無生無滅,是相似般若。若以不著心、不取相說五衆無常,但爲破常顚倒故,不著無常,是眞實般若。
엇비슷한, 상사(相似)라고 함이란, 그 이름과 언어는 같으면서도 마음의 이치인 심의(心義)가 다른 것이니,
마치 집착하는 마음의 착심(著心)으로 상(相)을 취하면서 오중(五衆) 등이 무상(無常)함을 말하고, 나아가 생함도 멸함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라고 말하는 것을 상사(相似) 반야라 하며,
만약 집착하지 않는 불착심(不著心)으로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서 오중의 무상을 말한다면, 이것은 단지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뒤바뀜의 상전도(常顚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일 뿐이므로, 무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반야인 것이다.
如是說法人,敎捨相似般若波羅蜜,修習眞般若波羅蜜,是名說般若波羅蜜正義,勝前功德。
이와 같이 설법하는 사람은 엇비슷한 상사(相似) 반야바라밀을 버리고, 진실한 반야바라밀을 닦고 익히게 하나니, 이러함을 바로 반야바라밀의 바른 정의(正義)를 연설한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앞의 공덕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