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4권 6

Skunky 2024. 8. 1. 08:01

大智度論 釋天主品 第二十七 卷五十四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7. 천주품(天主品) 풀이함 6

 

當使我世界中無有色、受、想、行、識名字,不應住;當使我世界中無有檀波羅蜜名字乃至無有般若波羅蜜名字。

나의 세계 안에서는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이라는 이름조차도 없게 되어야 한다는에도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해야 하고, 

나의 세계 안에서는 단바라밀이라는 이름이 없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조차도 없게 되어야 한다는에도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해야 합니다.

 

當使我世界中無有四念處名字乃至無有十八不共法名字,亦無須陁洹名字乃至無有佛名字,不應住,以有所得故。何以故?諸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一切諸法無所得故。如是,憍尸迦!菩薩於般若波羅蜜中不應住,以無所得故。”

나의 세계 안에서는념처라는 이름도 없고 나아가 18불공법이라는 이름 또한 없으며, 

또한 수다원이라는 이름도 없고, 나아가 부처님이라는 이름조차도 없게 되어야 한다는에도 불응주(不應住)해야 하나니,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 때문이나니,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셨을 때에는법에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입니다.

교시가여, 보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불응주(不應住)해야 하나니,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입니다.”


爾時,舍利弗心念:‘菩薩今云何應住般若波羅蜜中?’須菩提知舍利弗心所念,語舍利弗言:“於汝意云何?諸佛何所住?”

그 때에 사리불 존자가 생각하기를 ‘그러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라고 하자, 

수보리 존자가 사리불 존자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사리불 존자에게 말하였으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머무시는지요?”


舍利弗語須菩提:“諸佛無有住處。諸佛不色中住,不受、想、行、識中住;

不有爲性中住,不無爲性中住;不四念處中住,乃至不十八不共法中住,不一切種智中住”

사리불 존자가 수보리 존자에게 말하였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머무시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색(色)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고, 수상행식(受想行識)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유위성(有爲性)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고, 무위성(無爲性)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18불공법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일체종지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舍利弗!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應如是住,如諸佛住於諸法中,非住非不住。

舍利弗!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應如是學:我當住不住法故”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마땅히 그와 같이 머물러야 합니다. 

마치 모든 부처님께서 가운데에 머무르시되, 머무른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그와 같이 머물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머무르지 않는 불주법(不住法)에 머물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論. 者言:般若波羅蜜中住者,所謂五衆、五衆相空。五衆相空者,以十八空觀故。

▷논. 해석한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른다.”고 함이란, 

이른바 5중(衆)은중상(五衆相)이 공(空)하다는 것이며, 

오중상(五衆相)이 공(空)하다 함이란, 18공(十八空)으로써 관하기 때문이다.


復次,『般若波羅蜜經』中說空義,五衆相空;但凡夫顚倒故,取五衆相,五衆和合中取菩薩相。

또한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密經)'에서 말하는 공의(空義, 공의 이치)는 오중상(五衆相)이 공(空) 것이나,

단지 범부가 전도(顚倒)된 까닭에 오중상(五衆相) 취하면서중이 화합한 가운데에서 보살상(菩薩相)을 취하는 것이다.


般若波羅蜜中,以衆生空除衆生,卽是無菩薩相;以法空除五衆,則無五衆相。

二空無有別異,故言:“五衆空、菩薩空,無二無別”如栴檀火滅、糞草木火滅、滅法無異。

取未滅時相於滅時說,故有別異;於滅中則無異。乃至一切種智亦如是。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중생공(衆生空)으로써 중생을 제거하면,  보살상(菩薩相) 없으며, 

법공(法空)으로써중을 제거하면  오중상(五衆相) 없나니, 

 가지의 공함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중공(五衆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무이(無二)이 다르지 않은 무별(無別)이다.”고 하나니, 

마치 전단(栴檀)의 불이 꺼지는 것과 초목의 불이 꺼지는 것과 같이,  꺼지는 멸법(滅法)이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고, 아직 꺼지지 않았을 때의 상(相) 취하여서 꺼질 때까지를 말하기 때문에 다름이 있지만, 

꺼진 가운데에서는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니, 나아가 일체종지까지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不應住”者,所謂五衆中不應住。

“머무르지 않아야 하는 불응주(不應住)”라 함이란, 이른바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問曰:應說如住義,何以故說“不住”?

묻나니, 머무르는 이치인 주의(住義)를 말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를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若能於五衆中心離不住,則是住義。是故說:“以有所得故不應住”乃至一切種智亦如是。

先說“五衆中不應住”,不知以何門不應住;今說“常、無常等門中不應住,乃至遠離不應住”。

답하나니, 만약 오중 가운데에서 마음을 여의어서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한다면, 그것이 머무른다는 이치의 주의(住義)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소득(有所得)으로써 하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는 불응주(不應住)이다.”고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일체종지까지 또한 그와 같다.

먼저 “오중 가운데에 불응주(不應住)해 한다.”고 말하였지만, 어떠한 문(門)으로써 불응주(不應住)해 하는가를 모르고 있으므로 지금은 “항상한 상(常), 항상하지 않다는 무상(無常)” 등의 문(門) 가운데에서 불응주(不應住)해야 하고,

나아가 “멀리 여의는 원리(遠離)”에도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問曰:須陁洹果等無爲相不應住,有何次第?

묻나니, 수다원과 등이 무위상(無爲相)에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고 한 것에는 어떠한 차례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菩薩先觀諸法空無所有,心退沒欲取涅槃,涅槃卽是無爲相,

是故今說“須陁洹果等無爲相不應住”。

답하나니, 우선 보살은법은공(法空)이라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라고 관찰하므로, 마음이 물러나면서 열반을 취하고자 하나니, 열반이  무위상(無爲相)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 “수다원과 등의 무위상(無爲相)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若是須陁洹果無爲相,則無法可著,何所愛?何所取?

若是有爲相,有爲相則虛誑無實,亦不應住。

是故說“須陁洹果無爲相不應住,乃至佛無爲相不應住亦如是。”

만약 이것이 수다원과의 무위상(無爲相)이라면 법으로써 집착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디에 애착할 곳이 있으며? 어디에 취할 바가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유위상(有爲相)이라면 유위상(有爲相) 거짓이요 진실이 없으므로 역시 불응주(不應住)해야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수다원과의 무위상(無爲相)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부처님의 무위상에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는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如菩薩欲行佛道,初行檀波羅蜜,應求福田。所以者何?福田因緣功德故,所願得滿。

如種良田,則所收益多。

만약 보살이 부처님의도를 행하고자 한다 처음에 단(檀, 보시)바라밀을 행하면서 복전(福田)을 구해야 하나니,

왜냐하면 복전인연과 공덕 때문에 소원을 만족하게 이루기 때문이니, 

마치 좋은 밭에 씨를 심으면  수확이 많은 것과 같은 것이다.


如佛說“餘田果報有量,賢聖田無量,果報亦無量。”菩薩聞是須陁洹等福田果報無量故,便欲作須陁洹,以是故說:“須陁洹福田不應住,乃至辟支佛亦如是。”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밖의 밭(田)의 과보는 한량이 있는 유량(有量)이지만, 

성현의 밭(田)은 무량(無量)하므로 과보 또한 무량하다.”고 하신 것이다. 

보살이,  수다원 등의 복전의 과보가 무량하다는 것을 듣고,  때문에  수다원이 되고자 하나니, 

 때문에 “수다원의 복전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해야 하고, 

나아가 벽지불 또한 그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二乘小故,應過不住,佛福田何故不住?

묻나니, 2승(二乘)은 작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뛰어넘어서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부처님의 복전은 무엇 때문에 불응주(不應住)해 하는 것입니까?


答曰:菩薩法,於諸法應平等;若以佛爲大、衆生爲小,則破等法相。

復次,空故,一切處不應住。復次,菩薩應等心布施;

若分別福田,則破大悲,亦破三分淸淨布施。

답하나니, 보살법은법에 대하여 평등하여야 하나니,

만약 부처님을  것으로 삼고 중생을 작은 것으로 삼는다면, 평등한 법의 등법상(等法相)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며,

또한 공(空)하기 때문에 일체의 것에 불응주(不應住)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해야나니, 

만약 복전을 분별한다면 대비(大悲)를 깨뜨리는 것이요 

시자 시주물 수자의 세 갈래가 청정한 삼분청정(三分淸淨)의 보시까지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初地中不應住”者,若不捨初地,則不得二地;求大益故,應捨小利。

復次,以著心取相故不應住。乃至第十地亦如是。

“초지(初地) 가운데에 불응주(不應住)해야 한다.”고 함이란,

만약 초지를 버리지 않으면 제2지(第二地)를 얻지 못하게 되리니,

큰 이익을 구하기 위하여 작은 이익은 버려야 하는 것이며, 

또한 집착하는 마음으로 상(相)을 취하는 까닭에 불응주(不應住)해야 하나니,

나아가 제10지(第十地)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THE IDIOT BRAIN(바보같은 우리의 뇌) - 작자 DEAN BURNETT

We seize on what we're looking for and ignore anything that doesn't match up to it.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시합니다.

Our brain can really make judgements based only on what we know, and what we know is based on our own conclusions and experiences, so we tend to judge people's actions based on what we do. - page 109

우리의 뇌는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해서만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경험에 근거한 결론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Our complex intellects allow us not only to identify threats but to eticipate and imagine them too.

It's a crucial irony that in looking for threats so diligently, the brain ends up actually creating them - page111

우리의 복잡한 지능은 위협을 식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협을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결정적인 아이러니는 우리의 뇌가 성실하게 위협을 찾는 과정에서 실제로 위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