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4권 3

Skunky 2024. 7. 31. 08:00

大智度論 釋天主品 第二十七 卷五十四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7. 천주품(天主品) 풀이함 3

 

問曰:何以常說無常、苦、空、無我,或時說八事如病、如癰疽等,餘七事少有說處?

묻나니, 무엇 때문에 항상 “무상(無常), 괴로운 고(苦), 공(空), 무아(無我)”라 하는 것이며,

혹은 여덟 가지의 팔사(八事)로써 “마치 질병과 같고 마치 종양과 같다.”고 말하면서

그 나머지의 일곱 가지의 칠사(七事)는 약간 밖에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人有上、中、下。爲利根故說四,卽入苦諦。

中根者,說四,則不能生厭心;說如病、如癰等八事,則生厭心。

鈍根人聞是八事,猶不生厭,更爲說痛、惱等七事,然後乃厭。

利根易度,故常多說四事;鈍根人時有可度者故,希說餘事。

답하나니, 사람에게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으니,

근기가 영리한 이근(利根)이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네 가지의 사사(四事)만을 말하여도 곧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에 들어가며,

중간의 근기인 중근(中根)의 이는 이 네 가지 모두를 말하여도 싫어하는 염심(厭心)을 내지 않다가 “마치 질병과 같고 마치 종양과 같다.”는 등의 여덟 가지의 팔사(八事)를 말하면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되며,

근기가 둔한 둔근(鈍根)은 이 여덟 가지 일을 들어도 오히려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다가 다시 “아프다, 괴롭힌다.”는 등의 일곱 가지의 칠사(七事)를 말한 뒤에야 비로소 싫어하는 염심(厭心)을 내나니, 

근기가 영리한 이근인(利根人)은 제도되기가 쉽기 때문에 항상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의 네 가지 사사(四事)를 많이 말하고

근기가 둔근인(鈍根人)는 때로 제도될 수 있는 이도 있기 때문에 그 밖의 일을 간간이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팔사(八事)= 팔부중도(八不中道), 팔부정관(八不正觀), 팔부중관(八不中觀), 서로 대립하는 여덟 가지 그릇된 개념을 연기법(緣起法)으로 타파하여 분별과 집착이 소멸된 공(空)에 지혜를 드러내는 것.

①불생(不生). ② 불멸(不滅).  ③ 불상(不常).  ④ 불단(不斷). ⑤ 불일(不一). ⑥ 불이(不異). ⑦ 불래(不來). ⑧ 불출(不出). - 청류 홍삿갓

 

上八事名爲“聖行”,餘七事凡夫、聖人共行。初四入十六聖行故,般若中常說;

又說般若,爲菩薩利根故,多說聖行。

위의 여덟 가지 팔사(八事)를 성행(聖行)이라 하지만

나머지의 일곱 가지의 칠사(七事)는 범부나 성인이 다 같이 행하는것이니,

처음의 네 가지는 16성행(十六聖行, 16행상十六行相, ṣodaṡa-ākāra)에 들기 때문에 반야 가운데에서 항상 말하는 것이며, 또한 반야를 설할 때에는 보살로서 근기가 영리한 이근(利根)을 위한 것이므로 성행(聖行)을 많이 말하는 것이다.

 

十六行(십육행, ṣodaṡa-ākāra) 또는 16행상(行相)이란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성제를 관찰하는 법을 말하며,

먼저 고를 관찰함의 네 가지는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요,

고의 원인을 관찰함의 네 가지는 '쌓임=集(집)ㆍ인(因)ㆍ연(緣)ㆍ生(생)'이요,

고가 멸함을 관찰함의 네 가지는 '盡(진)ㆍ滅(멸)ㆍ妙(묘)ㆍ出(출)'이라.→ (滅 靜 妙 離)

고(苦)가 滅(멸)에 이르는 도(道)를 관찰함의 네 가지는 '도(道) 정(正) 행(行) 적(跡)'이니라. → (道如行出)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1권 4

 

今問“云何是初行法”故,此中都說。十二入乃至六種等亦應如是呵。十八界等亦應具說,誦者忘失。所以者何?此十八界等諸法皆是五衆別名故,不應不說。

지금은 “무엇이 처음 행하는 초행법(初行法)인가”라고 물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모두가 12입(入)을 말하지만, 나아가 여섯 가지 요소인 육종(六種)까지도 또한 그와 같아야 하고, 18계(十八界) 등을 꾸짖는 것 또한 자세히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나, 외우는 이는 잊어버리게 되나니,

왜냐하면 이 18계 등의 제법 모두는 오중의 별명(別名)이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若行者觀五衆等寂滅、遠離、不生不滅、不垢不淨等,此但爲般若波羅蜜故,不合上十五說;十五事,三乘共故。

수행하는 행자(行者)가 오중 등이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하고, 멀리 여의는 원리(遠離)하여, 불생(不生) 불멸(不滅)이며, 더럽지 않은 불구(不垢)이고, 깨끗하지 않은 부정(不淨)함을 관하는 것은 단지 반야바라밀만을 위한 것이므로 위에서 말한  열다섯 가지의 십오사(十五事)와는 합하지 않나니,

십오사(十五事)를 말하는 것은 3승(三乘)이 공통되기 때문이다.


聲聞人智力薄故,初始不能觀五衆若遠離、若寂滅等,但能觀無常等;

入第三諦,乃能觀寂滅。菩薩利根故,初觀五衆,便得寂滅相。

성문인(聲聞人)은 지혜의 힘이 천박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중은 멀리 여읜다거나 고요히 사라진다는 것 등을 관할 수 없으며, 단지 무상하다는 것만을 관하면서 세 번째의 진리인 제삼제(第三諦)인 멸제(滅諦)에 들어가서, 비로소 고요히 사라진적멸(寂滅)을 관하게 되지만,

보살은 근기가 영리한 이근(利根)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중을 관하면서 이내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상(寂滅相)을 얻게 된다.


“用無所得”者,常用無所得空慧觀諸法相。復次,釋提桓因問般若波羅蜜相,不問五衆患厭事,但說般若相。

“얻을 바 없음을 쓴다는 용무소득(用無所得)”이란, 항상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공(空)한 지혜로써 제법의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것이며,

다시 석제환인이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물었으나, 오중의 싫어해야 할 근심스러운 환염사(患厭事)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으므로 단지 반야상(般若相)만을 설명할 뿐이며, 


“般若相”者,不離五衆有涅槃,不離涅槃有五衆;五衆實相卽是涅槃。

是故初發心鈍根者,先用無常等觀,然後觀五衆寂滅等。十二因緣亦如是。

“반야상(般若相)”이란, 오중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열반이 있고, 열반을 여의지 않고서도 열반이 있나니,

곧 오중의 실상(實相)이 열반인 것이다.

이 때문에 초발심이고 둔근(鈍根)의 이는 우선 “무상하다.”는 등을 관한 연후에 “오중은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寂滅)” 등을 관하는 것이니, 12인연(因緣) 또한 그와 같다.


復次,修四念處乃至八聖道分,是共法;應薩婆若心,

以無所得者 是名般若波羅蜜相。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獨是大乘法。

또한 사념처 내지 팔성도분(八聖道分)을 닦는 공법(空法)은 살바야에 상응한 응살바야심(應薩婆若心)이며,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는 것은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며,

육바라밀 내지 18불공법(不共法), 이것은 오로지 대승법(大乘法)일 뿐이다.


問曰:應說般若波羅蜜相行,何以故中閒說:“諸法諸法更相因緣潤益增長”?

묻나니, 반야바라밀의 상(相)과 행(行)을 설명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중간에 제법을 말하면서 “제법은 다시 서로의 인연(因緣)으로 윤택하여지고 더욱 자라게 된다.”고 한 것입니까?


答曰:須菩提上先說“諸法無常等過”,後說“諸法遠離、寂滅、無所得、空”,

然後說“諸法雖空,從因緣和合故有”,次說“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行佛道”。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앞에서 먼저 “제법무상(諸法無常)” 등의 허물을 설명하였고

그 뒤에는 제법은 멀리 여의는 원리(遠離)하여 적멸(寂滅)한 것으로 얻을 것이 없는 공의 무소득공(無所得空)이라고 설명한 후에야 “제법이 비록 공(空)할지라도 인연으로 화합한 까닭에 존재하는 유(有)이다.”고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사념처 내지 18불공법으로 부처님의 불도를 행한다.”고 설명하였다.

 

聽者作是念:‘上說遠離、寂滅、空故,知非常;說十二因緣故,知不滅。

而無知者、見者,誰修行是諸法得佛?’

그러자 듣는 청자(聽者)들이, ‘앞에서 원리(遠離)하여 적멸(寂滅)하며 공(空)하다는 것을 말한 까닭에 항상한 것이 아닌 비상(非常)이라는 것을 알았고,

12인연(因緣)을 설명한 까닭에 멸하지 않는 불멸(不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는 지자(知者)도 없고 보는 견자(見者)도 없거늘, 그 누가 이 제법을 수행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是故說菩薩作是念:‘諸法空,無我,無衆生;而從因緣故,有四大、六識,是十法各各有力,能生、能起、能有所作 如地能持,水能爛,火能消,風能迴轉,識能分別。是十法各有所作,衆生顚倒故,謂是人作、我作’ 爛 문드러질 란

그러나 보살이 생각하기를 ‘제법은 공(空)하여 무아(無我)이고 무중생(無衆生)이지만, 인연 때문에 있는 것이니,

지수화풍 4대(四大)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의 십법(十法)은 저마다의 힘(力) 있어서 나는 능생(能生)이고, 일으키는 능기(能起)로써 짓는 바가 있는 능유소작(能有所作)이니, 이는 마치 땅은 능히 유지하는 능지(能持)이고, 물은 무너뜨리는 능란(能爛)이며, 불은 소멸하게 하는 능소(能消)이고 바람은 회전(廻轉)시키며, 의식은 분별할 수 있는 능분별(能分別)인 것과 같으니,

이 열 가지의 십법(十法)은 저마다 짓는 바의 소작(所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전도되어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이 짓는 인작(人作)이고 내가 짓는 아작(我作)이다.’고 여기는 것이라 한 것이다.


如皮骨和合故有語聲,或者謂人語“如火燒乾竹林,出大音聲”。

此中無有作者;又如木人、幻人、化人,雖能動作,無有作者,此十法亦如是。

마치 피부와 뼈가 화합한 까닭에 목소리인 어성(語聲)이 있는 것과 같으니,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람의 말은 마치 불이 마른 대나무 숲을 태울 때 큰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고 하기도 하나니,

이 가운데에는 짓는 작자(作者)가 없으며, 또한 마치 나무로 만든 목인(木人)과 환술로 만든 환인(幻人)과 변화 된 화인(化人)이 비록 동작을 할 수는 있다 하여도 짓는 작자(作者)가 없는 것과 같나니, 이 열 가지의 십법(十法)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前生法 後生法 因緣 或共生因緣 或相應因緣 或報因緣等 常修常集因緣 令果報增長。

如春殖果樹,隨時漑灌,華果繁茂。以智慧分別,知一切諸法無有作者。”

전생(前生)의 법과 후생(後生)의 법의 인연(因緣)으로써, 혹 공생인연(共生因緣)이거나 혹은 상응인연(相應因緣)이거나 혹은 보인연(報因緣)이거나 간에 항상 닦고 항상 쌓은 상수상집(常修常集)이었기에 그 인(因)과 연(緣)의 과보로 하여금 더욱 자라게 하나니,

마치 봄에 과일나무를 심어서 때때로 물을 주면 꽃과 열매가 번성하는 것과 같이,

곧 지혜로써 분별하면 일체법들은 짓는 작자(作者)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공생인(共生因)이라 함이란, 일체의 유위법은 각각 저마다 함께하는 원인의 공생인(共生因)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같이 나는 공생(共生)이기 때문에 더욱 서로가 돕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형제는 부모에게서 같이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를 돕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인(報因)이라 함이란, 업을 지은 인연 때문에 선악의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이 심수법과 상응하는 것을 인(因)으로 삼고, 심수법은 마음과 상응하는 것을 인(因)으로 삼으니, 이것을 상응인(相應因)이라 하는 것이며, 상응인을 비유하자면, 마치 친한 벗이나 지인이 어울려서 일을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2권 1


菩薩初發意迴向與佛心作因緣,而初發意迴向時未有佛心,

佛心中無初迴向心;雖無,而能作因緣。

보살이 처음 뜻을 낸 초발의(初發意) 때의 회향(廻向)은 부처님의 불심(佛心)이 인연이 되나,

초발의(初發意)로 회향할 때에는 아직 불심이 없으며, 불심 가운데에도 처음에 회향하는 초회향심(初迴向心)이 없나니,

비록 없을지라도 능히 인연을 짓는 능작인연(能作因緣)이 되는 것이다.


問曰:若初發心迴向時無菩提心者,何所迴向?

묻나니, 만약 초발심(初發心)하여 회향할 때에 보리심(菩提心, 불심)이 없다면 어디로 회향하는 것입니까?


答曰:般若波羅蜜實相中,諸法非常相、非無常相,非有相、非無相,

故不應難言:“迴向心已滅無所有,云何與菩提作因?”若諸法不生不滅、非不生非不滅,

云何以不生不滅作難“無菩提心,何所迴向”?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의 실상(實相) 가운데에는 제법이 항상 있는 상상(常相)도 아니고, 항상 없는 것도 아닌 무상상(無常相)도 아니며, 존재하는 유상(有相)도 아니고, 없는 무상(無相)도 아니기 때문에

“회향하는 회향심(迴向心)은 이미 사라져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거늘 어떻게 보리를 위하여 인(因)이 되는 것인가?”라고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제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나, 만약 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비불생(非不生) 비불멸(非不滅)이라면,

어떻게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무보리심(無菩提心)이라면 어디로 회향하는 것인가? 라고 따질 수 있는 것인가?


復次,佛自說菩提相非過去、非未來、非現在,云何難言“未來無菩提故,何所迴向”?

또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보리의 상(相)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다.”라고 하셨거늘, 어떻게 “미래에는 무보리(無菩提)이거늘 어디로 회향하는 것인가?”라고 따질 수 있는 것인가!


復次,如'如品'中說:“過去世不離未來世 未來世不離過去世 過去世如 未來世如 一如無二”

云何說“菩提心不在迴向心中,迴向心不在菩提心中”?

또한 '여품(如品)'에서의 설명과 같이, “과거의 세상은 미래의 세상을 여의지 않고, 미래의 세상은 과거의 세상을 여의지도 않나니, 과거세의 여(如)와 미래세의 여는 하나인 일여(一如)이라서 둘이 없는 무이(無二)다.” 하였거늘

어떻게 “보리심(菩提心)은 회향심(迴向心)에 있지 않고, 회향심은 보리심에도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