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51권 7
大智度論 釋含受品第二十三 卷五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3. 함수품(含受品)을 풀이함 7
問曰:若常有虛空,因色故虛空相現,然後相在虛空。
묻나니, 만약 허공이 항상 있으면서 물질(色)로 인하여 허공상(虛空相)이 나타난다면, 그러한 뒤에도 허공에 상(相)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若虛空先無相,後相亦無所住。若虛空先有相,相無所相;若先無相,相亦無所住。若離相無相已,相無住處;若相無住處,所相處亦無;所相處無故,相亦無;離相及相處,更無有法。
답하나니, 만약 허공이 무상(無相)이라면, 그 뒤에도 상(相)이 머무를 수 없지만, 만약 허공이 유상(有相)이어서 상이 있었다면, 그 상(相)은 지어지는 바가 없는 무소상(無所相)이다.
만약 앞에서부터 무상(無相)이었다면 그 상(相) 또한 머무르는 바가 없으며,
만약 상(相)이나 무상(無相)을 떠나면 이미 그 상(相)은 머무르는 바가 없으니, 만약 상(相)이 머무르는 바가 없다면 상이 지어질 곳도 없고, 상이 지어질 곳이 없기 때문에 상(相) 또한 없는 것이니, 곧 상(相)과 상의 처소인 상처(相處)를 여의는 것이라, 달리 어떠한 법이 없는 것이다.
以是故,虛空不名爲相、不名爲所相,不名爲法、不名爲非法,不名爲有、不名爲無,斷諸語言,寂滅如無餘涅槃。餘一切法亦如是。
이 때문에 허공은 상(相)이라 하지도 않고 상을 짓는 소상(所相)이라고 하지도 않으며, 법이라 하지 않고, 비법(非法)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있다고 하지 않고 없다고도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언어가 끊어져서 적멸(寂滅)한 것이 마치 무여열반(無餘涅槃)과 같나니, 그 밖의 일체법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問曰:若一切法如是者,卽是虛空,何以復以虛空爲喩?
묻나니, 만약 일체법이 그와 같다면 곧 그것이 허공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허공으로써 비유를 삼는 것입니까?
答曰:諸法因果皆是虛誑,因無明故有,誑衆生心;衆生於是法中生著,而不於虛空生著;六塵法誑衆生心,虛空雖復誑,則不爾!以是故,以虛空爲喩,以麤現事破微細事。
답하나니, 제법의 인과(因果)는 모두가 거짓으로 속이는 허광(虛誑)이며,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중생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러한 법 가운데에서 집착하면서도 허공에 대하여는 집착하지 않으니,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의 육진(六塵)의 법은 중생의 마음을 속이지만, 허공은 비록 다시 속인다 하여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허공으로써 비유를 삼는 것이니,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써 미세한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如虛空因色故,但有假名,無有定法;衆生亦如是,因五衆和合故,但有假名,亦無定法。摩訶衍亦如是。
마치 허공은 물질(色)로 인하여 단지 임시의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므로 일정하게 정해진 법이 없듯이, 중생 또한 그와 같아서, 5중(五衆)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의 가명(假名)이 있을 뿐인 것으로, 역시 일정하게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이며, 마하연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以衆生空,無佛無菩薩;以有衆生故,有佛有菩薩;若無佛無菩薩,則無摩訶衍。以是故,摩訶衍能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若是有法,不能受無量諸佛及弟子。
중생공(衆生空)이기에 부처님도 없고 보살도 없는 것이지만,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도 있고 보살도 있는 것이니, 만약 부처님도 없고 보살도 없다면 마하연도 없는 것이라.
이 때문에 마하연은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게 되나니, 만약 이 마하연이 존재하는 유법(有法)이라면 무량한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問曰:若實無虛空,云何能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
묻나니, 만약 진실로 허공이 없는 무허공(無虛空)이라면 어떻게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以是故,佛說:“摩訶衍無故,阿僧祇無;阿僧祇無故,無量亦無;無量無故,無邊亦無;無邊無故,一切法亦無,以是故能受。”
답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하연은 없는 마하연무(摩訶衍無)이기 때문에 아승기도 없고, 아승기도 없기 때문에 무량함도 없으며, 무량함이 없기 때문에 일체법도 없나니, 이러한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능수(能受)이다.”고 하신 것이다.
“阿僧祇”者,“僧祇”,秦言數;“阿”,秦言無。衆生、諸法各各不可得邊故名“無數”,數虛空十方遠近不可得邊故名“無數”。分別數六波羅蜜,種種布施、種種持戒等無有數;數幾衆生已上乘、當上乘、今上乘不可數,是名“無數”。
'아승기(阿僧祇, asaṃkhyeya)'란, 승기(僧祇, saṃkhyeya)는 진(秦, 중국)나라 말로 수(數)라 하고, 부정접두어 아(阿, a-)를 음역한 것으로 진나라 말로 무(無)라 한다.
중생들의 제법은 저마다 그 변(邊, 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수(無數)라 하며, 허공에서 시방으로 멀고 가까운 곳을 계산할 때에도 그 변(邊, 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수(無數)라 하나니,
육바라밀을 분별하여 헤아릴 때에도 갖가지의 보시와 지니는 계율 등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얼마간의 중생을 분별할 때에도 이미 탈것에 오른 이상승(已上乘)한 이와 장차 오를 당상승(當上乘)할 이와 지금 탈것에 오르는 금상승(今上乘)의 이를 셀 수 없으니, 이를 무수(無數)하다고 하는 것이다.
復次,有人言:初數爲一,但有一;一一故言二,如是等皆一,更無餘數法。若皆是一,則無數。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첫번 째의 초수(初數)는 일(一)이고 단지 하나만이 있을 뿐이나, 그 하나에 하나를 더하는 까닭에 이(二)가 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하나요, 다시 그 밖의 헤아리는 수법(數法)이 없으니, 만약 이 모두를 하나인 일(一)이라 한다면 무수(無數)이다.”라고 하며,
有人言:一切法和合故有名字,如輪、輞、輻、轂和合故名爲車,無有定實法。一法無故,多亦無,先一後多故。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체법은 화합하는 까닭에 명자(名字, 이름)가 있게 된 것으로, 마치 거(車, 탈것)의 바퀴와 바퀴테와 바퀴살과 바퀴통이 화합한 까닭에 거(車, 탈것)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일정하게 정해진 실법(實法)은 없는 것이다.”라고 하며, 일법(一法)이 없기 때문에 여러 법 또한 없나니, 앞의 하나(一)가 뒤의 여럿인 다(多)가 되기 때문이다.
復次,以繫數事,數事無故,數亦無。
또한 일(事)을 헤아려 세는 수사(數事)를 할 때에 그 일(事)이 없는 수사무(數事無)이기 때문에 그 헤아려 수효도 또한 없는 수역무(數亦無)인 것이다.
“無量”者,如以斗稱量物,以智慧量諸法亦如是。諸法空故無數,無數故無量無邊,
無有實智 云何能得諸法定相?
'무량(無量)'이라 함이란, 마치 말(두斗)로써 물량을 재는, 칭량(稱量)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지혜로써 제법을 헤아리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며, 제법은 공(空)하기 때문에 수가 없는 무수(無數)이며, 무수(無數)이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은 무량(無量)하고 끝이 없는 무변(無邊)인 것이다.
진실한 실지(實智)가 없거늘 어떻게 제법의 정해진 정상(定相)을 얻을 수 있겠는가?
無量故無邊,“量”名摠相,“邊”名別相;“量”爲初始,“邊”名終竟。
'무량(無量) 무변(無邊)'에서 양(量)이란 전체의 총상(總相)이요, 변(邊, 끝)이란 각각의 별상(別相)이며,
“양(量)”은 처음의 초시(初始)라 하고, “변(邊, 끝)은 끝냄의 종경(終竟)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我乃至知者、見者無故,實際亦無;實際無故,無數亦無;無數無故,無量亦無;無量無故,無邊亦無;無邊無故,一切法亦無。以是故,一切法無,畢竟淸淨。
또한 나(我) 내지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가 없기 때문에 실제(實際)도 없고,
실제가 없기 때문에 무수(無數)함 또한 없으며, 무수함이 없기 때문에 무량(無量)함도 없고, 무량함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며, 무변이기 때문에 일체법 또한 없나니, 이 때문에 일체법은 없는 일체법무(一切法無)이며 필경청정(畢竟淸淨)인 것이다.
是摩訶衍能含受一切衆生及法;二事相因:若無衆生則無法,若無法則無衆生。先摠相說一切法空,後一一別說諸法空。
이 마하연이 일체 중생과 법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두 가지로 서로의 인(因)이 되나니,
만약 중생이 없는 무중생(無衆生)이면 곧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며, 만약 무법(無法)이면 곧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니,
앞에서 총상(摠相)으로써 일체법이 공함을 말하고, 그 뒤에 각각으로 구별하면서 제법이 공한 법공(法空)을 말하는 것이다.
實際是末後妙法,此若無者,何況餘法!從不可思議性乃至如涅槃性亦如是。
실제(實際)란 마지막의 묘한 묘법(妙法)이니, 이것이 만약 없는 무자(無者)라면 어떻게 그 밖의 다른 법이겠는가?
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에서 여(如)와 열반성(涅槃性)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經. “須菩提!汝所言:‘是摩訶衍不見來處,不見去處,不見住處。’如是!如是!須菩提!是摩訶衍不見來處,不見去處,不見住處。何以故?須菩提!一切諸法不動相故。
▷경. “수보리야, 그대는 말하기를 ‘이 마하연은 오는 곳도 보지 못하고, 가는 곳도 보지 못하며, 머무르는 곳도 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마하연은 오는 곳을 보지 못하는 불견내처(不見來處)이고, 가는 곳을 보지 못하는 불견거처(不見去處)이며, 머무르는 곳을 보지 못하는 불견주처(不見住處)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법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상(不動相)이기 때문이니라.
是法無來處,無去處,無住處。何以故?須菩提!色,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受、想、行、識,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
이 법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머무르는 곳도 없나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물질(色)은 오는 곳이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가는 곳이 없는 무소거(無所去)이고,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소주(無所住)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 또한 오는 곳이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가는 곳이 없는 무소거(無所去)이고,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소주(無所住)이니라.
須菩提!色法,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受、想、行、識法,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
수보리야, 물질의 색법(色法)은 오는 곳이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가는 곳이 없는 무소거(無所去)이고,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소주(無所住)이며,
느낌의 법(受法)ㆍ생각의 법(想法)ㆍ 지어감의 법(行法)ㆍ분별의 법(識法)의 또한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니라.
須菩提!色如,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受、想、行、識如,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
수보리야, 물질의 여여함인 색여(色如)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며,
느낌의 여여함(受如)ㆍ생각의 여여함(想如)ㆍ 지어감의 여여함(行如)ㆍ분별의 여여함(識如)도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니라.
須菩提!色性,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受、想、行、識性,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
수보리야, 물질의 성품인 색성(色性)은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며,
느낌의 성품(受性)ㆍ생각의 성품(想性)ㆍ 지어감의 성품(行性)ㆍ분별의 성품(識性) 또한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니라.
須菩提!色相,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受、想、行、識相,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
수보리야, 물질의 색상(色相)은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며,
느낌의 상(受相)ㆍ생각의 상(想相)ㆍ 지어감의 상(行相)ㆍ분별의 상(識相)도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니라.
須菩提!眼、眼法、眼如、眼性、眼相,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耳、鼻、舌、身;意、意法、意如、意性、意相,無所從來,亦無所去,亦無所住。色、聲、香、味、觸、法亦如是。
수보리야, 눈(眼)과 눈의 법인 안법(眼法)과 눈의 여인 안여(眼如)와 눈의 성품인 안성(眼性)과 눈의 상인 안상(眼相)은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며,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뜻(意) 내지 뜻의 법의(意法)와 뜻의 의여(意如)와 뜻의 성품인 의성(意性)과 뜻의 상인 의상(意相)도 무소종래(無所從來)이고, 무소거(無所去)이고, 무소주(無所住)이나니,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 또한 그러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