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4권 7

Skunky 2024. 6. 25. 08:02

大智度論釋 幻人無作品 第十一卷 第四十四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12. 구의품(句義品) 풀이함 2

 

▶論. 問曰:上來佛與須菩提種種因緣破菩薩字,今何以問“菩薩句義”?

▷논. 묻나니,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를 위하여 갖가지의 인연으로 보살이란 이름을 깨뜨리셨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보살이란 어구(語句)의 뜻을 물은 것입니까?

 

答曰:須菩提破菩薩字,佛不破,言:“菩薩字從本已來畢竟空,但五衆中數假名菩薩,而衆生以假名爲實"

佛言:“假名無實,但從諸法數和合爲名。”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보살의 이름을 깨뜨렸으나 부처님께서는 깨뜨리지 않으셨으며,

보살이란 이름은 본래부터 필경공(畢竟空)이요, 단지 오중(五衆)의 범주에서 임시로 보살이라는 가명(假名,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중생들이 가명(假名,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삼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명(假名, 이름)은 진실이 없으며, 단지 제법의 수(數)가 화합하여서 이름이 되었을 뿐이다.”고 하신 것이며, 

 

復次,諸佛法無量無邊不可思議,須菩提因菩薩字空說般若波羅蜜相;

今欲聞佛說菩薩字義,因是說般若波羅蜜。

또한 모든 부처님의 불법은 무량하고 무변하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으로, 

수보리 존자는 보살의 이름이 공(空)하기에, 이로 인하여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설명하였는데,

부처님께서 보살이라는 이름과 뜻의 자의(字義)를 말씀하신 것을 듣고,

이로 인하여 반야바라밀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며, 

 

復次,應問因緣無量無邊,所謂佛音聲有六十種莊嚴,能令諸天專聽,何況人!

但音聲令人樂聞,何況說大利益義!

또한 인연이 무량하고 그지없음을 물어야 하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음성에는 60종의 장엄(莊嚴)이 있어서 모든 하늘들도 듣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사람들이겠는가.

단지 음성만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듣기를 즐기게 하거늘, 하물며 큰 이익이 있는 이치를 말씀하심이랴!

 

須菩提從佛聞是事,未發意人,當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

發意者,未行六波羅蜜,當令行;行者,不淸淨,當令淸淨。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이러함을 듣고 아직 뜻을 일으키지 못한 미발의인(未發意人)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뜻을 일으키는 발의(發意)라 함이란, 아직 육바라밀을 행하지 못한 이에게는 행하게 하고, 행한 이가 청정하지 않으면 그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는 것이며, 

 

淸淨行者,當令住阿跋致地,成就衆生,具足佛法,乃至一生補處。

如是等種種無量因緣利益故,佛以須菩提爲問主,語一切十方世界在會衆生。

청정하게 행하는 자는 아비발치(阿毘跋致)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어서, 중생을 성취시키며 부처님의 불법을 두루 갖추어서 일생보처(一生補處)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무량한 인연과 이익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를 묻는 문주(問主)로 삼아서 일체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임에 있는 중생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니, 

 

佛告須菩提:“無句義是菩薩句義;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處所,亦無我無名'

於是中無依止處卽是法空,無我名者,無得道者。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되 “어구의 뜻이 없는 무구의(無句義)가 바로 보살이라는 말의 뜻인 구의(句義)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처소가 없는 무처소(無處所)이고 또한 무아(無我)이며, 이름도 없는 무명(無名)이니,

이 가운데에서 의지함이 없는 무의지처(無依止處)가 바로 법공(法空)이며 무아(無我)이니

이름도 없고, 도를 얻는 득도자(得道者)도 없다.”고 하신 것이며, 

 

佛謂須菩提:“若汝知無我、無我所得阿羅漢者,菩薩亦如是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無我、無我所。

譬如鳥飛虛空無有足迹;菩薩句義亦如是,行諸法虛空中無依止著處。以是故言無菩薩句義。”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설하시되 “만약 그대가 나도 없는 무아(無我)이고 내 것의 아소(我所)가 없음을 안다면 아라한을 얻은  것이니,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 무아(無我)이고 내 것의 아소(我所)가 없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새가 허공을 날되 발자취가 없는 것과 같이, 보살이라는 어구의 뜻 또한 그와 같다.”고 하셨으니,

허공에는 의지하거나 집착할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제법을 행하기 때문에 “보살이라는 어구의 뜻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何等是“菩薩句義”?

묻나니, 무엇이 보살이라는 뜻의 구의(句義)입니까?

 

答曰:天竺語法,衆字和合成語,衆語和合成句。如“菩”爲一字,

“提”爲一字,是二不合則無語;若和合,名爲“菩提”,秦言無上智慧。

답하나니, 천축(天竺, 인도)의 어법(語法, 인도의 범어인 Sanskṛt의 문법)에서는 여러 개의 글자가 합하여 어(語, 말)을 이루고, 여러 개의 어(語, 말)가 합하여 구(句, pāda)를 이루는 것으로,

마치 보(菩)는 하나의 글자요, 리(提)도 하나의 글자이나, 이 두 글자가 화합하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고,

만약 화합하면 보리(菩提)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같나니,

진(秦, 중국)나라 말로는 ‘위없는 지혜의 무상지혜(無上知慧)’라 하며, 

 

“薩”,或名衆生,或是大心。爲無上智慧故,出大心名爲“菩提薩”。願欲令衆生行無上道,是名“菩提薩”。

sattva의 음역인 살타(薩埵)는 혹 중생(衆生)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큰 마음의 대심(大心)이 되기도 하며,

무상지혜(無上知慧)를 위하여 큰 마음을 내는 이를 보리살타(菩提薩陀)라 하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행하게 하고자 원하는 이를 바로 보리살타(菩提薩埵)라 하는 것이며, 

 

復次,此品佛及佛弟子種種因緣說菩薩摩訶薩義。“菩提”一語,“薩”一語,二語和合故名爲“義”。

또한 이 품(品)에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보살마하살의 의(義, 뜻)을 설명하나니,

“보리”는 하나의 말이요 “살타”도 하나의 말인데 이 두 개의 말이 화합한 까닭에 의(義, 뜻)라 하는 것으로, 

 

若說名字,語、句皆同一事,無所在。今須菩提問:

“以何定相法爲菩薩句義?”天竺言“波”,秦言句。是波有種種義,如後譬喩中說。

만약 명자(名字, 이름)와 어(語, 말)과 구(句)를 설명한다면 모두가 동일한 것이요 있는 곳이 없는 무소재(無所在)이니,

지금 수보리존자는 “어떤 정해진 정상(定相)의 법으로써 보살이라는 어구의 뜻인 구의(句義)가 되는가?”라는 것을 묻는 것이며, 

천축(인도)에서는 Pada의 음역인 파타(波陀)라 하고 진나라(중국) 말로서는 구(句)라 하는 것으로,

파타(波陀)에는 갖가지의 뜻이 있나니, 뒤의 비유 가운데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問曰:但以“鳥飛虛空”足明“句義”,何以種種廣說?

묻나니, 단지 “새가 허공을 나는 것”만으로도 어구의 뜻인 구의(句義)를 설명하기에 충분하거늘,

무엇 때문에 갖가지로 널리 설명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衆生聽受種種不同,有好義者,有好譬喩者。譬喩可以解義,因譬喩心則樂著;

如人從生端政,加以嚴飾,益其光榮。此譬喩中多以譬喩明義,如後所說,

所謂如夢、如影、如響、如佛所化。

답하나니, 중생들이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갖가지로 같지 않은 부동(不同)이니,

의(義, 뜻)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비유를 좋아하는 이도 있으니,

비유로써 의(義, 뜻)을 이해할 수도 있고, 비유로 인하여 마음이 즐겁게도 되나니,

마치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단정하게 잘 생겼으며, 게다가 잘 꾸미게 되면 그 빛남이 더하는 것과 같이, 

대개 비유로서는 그 뜻을 밝히나니, 뒤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이른바 마치 여몽(如夢, 꿈)과 같고, 여영(如影, 그림자)와 같고, 여향(如響, 메아리)와 같으며,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시킨 여화(如化)와 같은 것이다.

 

是事虛誑,如先說;菩薩義亦如是,但可耳聞,虛誑無實,以是故,菩薩不應自高。

如、法性、法相、實際等句,無有定義。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러한 것은 허광(虛誑, 거짓)된 것이며, 보살이란 어구의 뜻 또한 그와 같은 것으로,

단지 귀로는 거짓이요 진실이 없는 것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보살은 스스로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마치 법성(法性)ㆍ법상(法相)ㆍ실제(實際) 등의 어구(語句)와 같이, 일정한 뜻이 없는 것이다.

 

如幻人無五衆乃至諸佛法。如佛無五衆乃至一切法。如有爲法中無無爲法,如無爲法中無有爲法。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환인(幻人)은 오중(五衆) 내지 모든 부처님의 불법이 없는 것과 같으며,

부처님에게도 오중 내지 일체법이 없는 것과 같으며,

마치 유위의 법 가운데에는 무위의 법이 없는 것과 같으며,

마치 무위의 법 가운데에는 유위의 법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無爲法不生不滅等,諸法中無不生不滅相,亦無異相。如三十七品無淸淨相。何以故?有人著是三十七品法,卽是結使。如我乃至知者、見者,淨相不可得。

무위법의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등과 같으며,

제법 가운데에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상(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양의 이상(異相)도 없나니, 마치 37품조도(助道品)에는 청정한 상(相)이 없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이 37조도품의 법에 집착한다면, 곧 그것이 번뇌의 결사(結使)이기 때문이니,

마치 나(我) 또는 오식으로 알아 차리는 지자(知者)와 눈으로 보는 견자(見者)의 청정한 상(相)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我乃至知者、見者等云何淨?

묻나니,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의 '나(我)', 내지 오식으로 알아 차리는 지자(知者)와 눈으로 보는 견자(見者) 등이 어떻게 청정한 것입니까?

 

答曰:種種求覓我相不可得,是名我淨;第一義中,無淨無不淨。

譬如洗臭死狗,乃至皮毛、血肉、骨髓都盡;是時,非狗非豬,不得言淨,不得言不淨。

我乃至知者、見者亦如是。以無我空智慧,求我相不可得,是時,非有我、非無我。

如日出無闇。劫盡時無一切物。

답하나니, 갖가지로 아상(我相)을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을 나(我)가 청정한 아정(我淨)이라 하나니, 

제일의(第一義, 제일의제) 가운데에서는 청정한 것도 없고 청정하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악취 나는 죽은 개를 가죽ㆍ터럭ㆍ피ㆍ살 및 골수에 이르기까지 다 씻어버린 때에는 개도 아니요 돼지도 아니어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도 말 수 없는 것과 같이,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의 '나(我)', 내지 오식으로 알아 차리는 지자(知者)와 눈으로 보는 견자(見者) 또한 그와 같아서 무아(無我)이고 공한 지혜로써 나의 상(想)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아상(我相)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을 때에는 나가 있는 것도 아닌 비유아(非有我)이고,

나가 없는 것도 아닌 비무아(非無我)이니,

마치 해가 나오면 어두움이 없어지고, 겁(劫)이 다할 때에는 일체의 물건들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며, 

 

如佛五衆戒中破戒不可得。如日月、星宿、眞珠等,諸天、鬼神、龍王光,於佛光中則不現,從大福德神通力生故。

마치 부처님의 오중(五衆)의 계율 가운데에서는 파계(破戒)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마치 해ㆍ달ㆍ별ㆍ진주 등과 모든 하늘ㆍ귀신ㆍ용왕 등의 광명은 부처님의 광명 가운데에서는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부처님의 광명은 큰 복덕과 신통력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菩薩句義亦如是,入是般若波羅蜜智慧光中則不現。因是譬喩,敎諸菩薩,當學一切法不取相,無所得故。

보살이라는 어구의 뜻인 구의(句義)도 그와 같아서, 이 반야바라밀 지혜의 광명 안에 들어가면 나타나지 못하나니,

이러한 비유로 인하여 모든 보살로 하여금 일체법을 배우면서도 상(相)을 취하지 않아야 하나니,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