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2권 1

Skunky 2024. 6. 17. 08:01

大智度論釋 集散品 第九 卷第四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9. 집산품(集散品) 풀이함

 

. 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世尊!我不覺、不得是菩薩行般若波羅蜜,當爲誰說般若波羅蜜?“世尊!我不得一切諸法集散,若我爲菩薩作字言菩薩,或當有悔!

▷경. 그 때에 혜명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였거늘, 누구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해야 하는지요?

세존이시여, 저는 일체법이 인연으로 모이는 집(集)과 인연의 흩어짐의 산(散)을 얻지 못하였으니, 만약 제가 보살을 위하여 이름을 지어서 보살이라 말한다면, 혹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世尊!是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字無所有故。以是故,是字不住,亦不不住。世尊!我不得色集散乃至識集散,若不可得,云何當作名字?世尊!以是因緣故,是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名字無所有故。

세존이시여,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이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色, 색온)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서부터 분별의 식(識, 식온)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 이르기까지의 오온(五蘊)을 얻지 못하니, 만약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명자(名字, 이름)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으로, 이 명자(名字,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는 불주(不住)이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불불주(不不住)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자(名字, 이름)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世尊!我亦不得眼集散乃至意集散,若不可得,云何當作名字,言是菩薩?世尊!是眼名字乃至意名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名字無所有故。以是故,是字不住,亦不不住。

세존이시여, 저는 또한 눈(眼)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서부터 뜻(意)의 쌓임과 흩어짐(散)에 이르기까지의 육경(六境)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면 어떻게 이름을 지어서 그것이 보살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눈(眼)의 명자(名字, 이름) 내지 뜻(意)의 명자(名字, 이름)는 머무르지도 않는 불주(不住)이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불불주(不不住)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자(名字, 이름)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世尊!我不得色集散乃至法集散,若不可得,云何當作名字,言是菩薩?世尊!是色字乃至法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字無所有故。以是故,是字不住,亦不不住。眼識乃至意識,眼觸乃至意觸,眼觸因緣生受乃至意觸因緣生受,亦如是。

세존이시여, 저는 빛깔(色)의 쌓임(集)과 흩어짐에서 법(法)의 쌓임과 흩어짐(散)에 이르기까지의 육진(六塵, 외육진)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명자(名字, 이름)을 지어서 그것이 보살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빛깔(色)의 이름 내지 법(法)의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의 육식(六識)과 눈이 보는 안촉(眼觸)에서부터 뜻으로 분별하는 의촉(意觸)에 이르기까지의 육촉(六觸)과

안촉(眼觸)의 인연으로 받아들여서 생기는 느낌의 수(受)에서부터 의촉(意觸)의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의 수(受)에 이르기까지의 수상행식(受想行識) 또한 그와 같습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이란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순서다. 즉 외부로부터 받은 자극에 우리의 정신이 반응하는 순서를 나타낸 것으로서 '수受'는 대상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다. 상想은 그 느낌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이다. 
‘생각’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는 참으로 많다. 대부분 '념念', '사思', '유惟', '상想'에서 파생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념念’은 이제 ‘금今’과 마음 ‘심心’이 합쳐져 있으니 지금 일어나는 마음, 이를테면 휘발성이 강한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잡념雜念, 유념留念(여기서 留는 머무르라는 것이니 '념'의 휘발성이 충분히 이해된다.) 상념常念 등이 있다. 
‘思’는 정수리(머리)를 뜻하는 ‘신囟’과 ‘심心’이 합쳐져 머리의 판단, 이를테면 머리에서 비롯되는 논리가 부가된 생각이 된다. ‘념’보다는 조금 오래 유지되는 생각이다.

‘惟’는 마음 심과 높을 ‘최崔’가 합쳐지니 높은 수준의 생각이다. ‘사유思惟’라는 말이 이 상황을 대변한다.  깊은 ‘사유’의 경지는 곧 ‘선禪’으로 이어진다. 
‘상想’은 상대를 뜻하는 ‘상相’이 있는 생각이다. 즉 생각을 서로 나누고 교환해서 두터워지고 정제된 생각이다. 당연히 위에 있는 ‘념念’과 ‘사思’보다는 상대적으로 길고 다양한 생각을 말한다. ‘사상思想’은 그렇게 해서 나온 단어다. 
'행行'은 이러한 생각(想)을 통해 일어나는 의지로써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그 의지로부터 유래되는 판단과 그 판단이 우리에게 머물러서 인연이 되는 단계를 '식識'이라 부른다. 
즉 '수상행식'은 외부의 사태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여 우리에게 내면화되는 과정을 순서대로 표시한 것이다. - 김준식

 

世尊!我不得無明集散,乃至不得老死集散。世尊!我不得無明盡集散,乃至不得老死盡集散。世尊!我不得怒癡集散、諸邪見集散,皆亦如是。

세존이시여, 저는 무명(無明)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서 늙어 죽음의 노사(老死)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 이르기까지를 얻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명이 다한 무명진(無明盡)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서 노사진(老死盡)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에 이르기까지를 얻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음노치(婬怒癡)의 쌓임(集)과 흩어짐(散)을 얻지 못하며,

모든 삿된 견해의 쌓임(集)과 흩어짐(散) 또한 그와 같습니다.

 

世尊!我不得六波羅蜜集散,四念處集散乃至八聖道分集散,空、無相、無作集散,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集散,念佛、念法、念僧、念戒、念捨、念天、念善、念入出息、念身、念死集散;我亦不得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集散。

세존이시여, 저는 육바라밀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과 사념처(四念處)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 나아가 팔성도분(八聖道分)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

사선(四禪)ㆍ사무량심(四無量心)ㆍ사무색정(四無色定)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

염불(念佛)ㆍ염법(念法)ㆍ염승(念僧)ㆍ염계(念戒)ㆍ염사(念捨)ㆍ염천(念天)ㆍ염선(念善)ㆍ염입출식(念入出息)ㆍ염신(念身)ㆍ염사(念死)의 집산(集散)을 얻지 못하며,

저는 또한 부처님의 십력(十力)에서 18불공법(不共法)에 이르기까지의 집산(集散)을 얻지 못합니다.

 

世尊!我若不得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集散,云何當作字,言是菩薩?世尊!是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字無所有故。以是故,是字不住,亦不不住。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육바라밀에서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름을 지어서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世尊!我不得如夢五陰集散,我不得如響、如影、如焰、如化五陰集散,亦如上說。世尊!我不得離集散,我不得寂滅、不生不滅、不示、不垢不淨集、散。

세존이시여, 저는 마치 꿈과 같은 오음(五陰)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을 얻지 못하며, 저는 마치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허깨비와 같은 오수중(五受衆)의 집산(集散)도 얻지 못하니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모두를 여의는 이(離)의 집산(集散)을 얻지 못하며, 저는 고요히 사라짐의 적멸(寂滅)과 불생(不生)과 불멸(不滅)과 보지 않음의 불시(不示)와 더럽지 않음의 불구(不垢)와 청정하지 않음의 부정(不淨)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도 얻지 못합니다.

 

世尊!我不得如、法性、實際、法相、法位集散,亦如上說。我不得諸善不善法集散,我不得有爲無爲法、有漏無漏法集散,過去、未來、現在法集散,不過去、不未來、不現在法集散。何等是不過去、不未來、不現在?所謂無爲法。世尊!我亦不得無爲法集散。

세존이시여, 저는 여여(如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법상(法相)ㆍ법위(法位)의 쌓임과 흩어짐의 집산(集散)을 얻지 못하니,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습니다.

저는 모든 착하고 착하지 않은 선불선법(善不善法)의 쌓임과 흩어짐을 얻지 못하며, 저는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법과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법의 쌓임과 흩어짐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법의 쌓임과 흩어짐과, 과거가 되지도 않고 미래가 되지도 않으며 현재가 되지도 않는 법의 쌓임과 흩어짐을 얻지 못합니다.

무엇이 과거가 되지도 않고, 미래가 되지도 않으며, 현재가 되지도 않는 것인가 하면, 이른바 무위법(無爲法)이니, 

세존이시여, 저는 또한 무위법(無爲法)의 쌓임과 흩어짐도 얻지 못합니다.

 

世尊!我亦不得佛集散。世尊!我亦不得十方如恒河沙等世界諸佛及菩薩、聲聞僧集散。世尊!我若不得諸佛集、散,云何當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世尊!是菩薩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字無所有故。以是故,是字不住,亦不不住。

세존이시여, 저는 또한 부처님의 쌓임과 흩어짐도 얻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또한 시방의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승(聲聞僧)의 쌓임과 흩어짐도 얻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모든 부처님의 쌓임과 흩어짐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보살이라는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이 이름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世尊!我亦不得是諸法實相集散,云何當與菩薩作字,言是菩薩?世尊!是諸法實相名字不住,亦不不住。何以故?是名字無所有故。以是故,是名字不住,亦不不住。”

세존이시여, 제가 또한 이 제법의 실상(實相)의 쌓임과 흩어짐을 얻지 못하거늘 어떻게 보살에게 보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 보살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제법의 실상의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이 이름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 問曰:先品中已說“不見菩薩、菩薩字、般若波羅蜜,一切諸法不內、不外、不中閒”等,今何以重說?

▷논. 묻나니, 앞의 품(品)에서 이미 “보살이나 보살의 이름과 반야바라밀과 일체법들은 안(內)에 있지도 않고 바깥(外)에 있지도 않으며 중간(中)에 있지도 않다.”고 하셨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거듭하여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有四種愛:欲愛、有愛、非有愛、法愛。

답하나니, 네 종류의 애(愛)가 있나니,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비유애(非有愛)와 법애(法愛)이다.

 

欲愛,易見,其過不淨等。有愛,無不淨等,小難遣。非有愛,破有,似智慧故,難遣。法愛者,愛諸善法利益道者。法愛中過患難見,故重說;譬如小草加功少易除,大樹功重難除。

욕애(欲愛)는 보기가 쉽고 그 허물은 청정하지 않는 것 등이고,.

유애(有愛)는 청정하지 않은 것 등은 없지만 작아서 제거하기가 어려우며,

비유애(非有愛)는 유애(有愛)를 깨뜨리고 마치 지혜와 비슷하기 때문에 제거하기 어려우며,

법애(法愛)는 모든 착한 선법을 사랑하게 되므로 도를 닦는 이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

법애(法愛) 안에 있는 허물은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듭 말하는 것이니, 마치 작은 풀은 공을 적게 들여도 제거하기 쉽지만, 큰 나무는 공이 많이 들여도 없애기 어려운 것과 같으며, 

 

욕애(欲愛)=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

유애(有愛)=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

비유애(非有愛)= 무유애의 무유는 비존재, 즉 허무를 말한다. 어떠한 존재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으로, 무유애 또한 자기 중심적인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 광명진언,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復次,上法與此法有同、有異:彼聞說“菩薩字不見”;此中說“菩薩字不覺、不得”,以不覺、不得故不見,非是智慧力少故不見。

또 위의 법과 이 법과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니, 앞에서는 “보살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는 보살자불견(菩薩字不見)”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여기에서는 “보살의 이름을 깨닫지도 못하는 보살자불각(菩薩字不覺)이고 얻지도 못하는 불득(不得).”이라고 말하였으니,

깨닫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는 불각불득(不覺不得)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일 뿐, 지혜의 힘이 작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