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41권 2
大智度論釋 大智度論釋 三假品 第七 卷第四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7. 삼가품(三假品)을 풀이함 2
▶論.問曰:佛旣不自說,諸菩薩摩訶薩福德、智慧、利根,勝諸聲聞,何以故命須菩提令說?
▷논. 묻나니, 부처님께서 이미 스스로 모든 보살마하살은 복덕과 지혜와 영리한 근기가 모든 성문들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수보리에게 명하여 설명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先“舌相”中,已有二因緣故,使須菩提說。
답하나니, 먼저의 광장설상(廣長舌相, prabhūtajihva, 대설상大舌相) 가운데에서 이미 두 가지의 이인연(二因綠)이 있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제자가 많은지라 한 사람이 말하여 마치면, 다음에는 다른 한 사람에게 명하시는 것으로, 마치 왕에게는 신하들이 많으므로 차례로 말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비록 갖가지 인연이 있을지라도 두 가지의 인연이 크기 때문이니,
첫째는 다툼이 없는 무쟁정(無諍定, araṇā-vihārinaṃ-agryaḥ, 무쟁삼매)을 잘 행하여 중생들을 항상 자비로써 대하며, 비록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는 없을지라도, 항상 보살을 돕고 보살의 일로써 부처님께 여쭙는 것이며,
둘째는 법공(法空)을 깊이 행하고 좋아하며, 반야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법공(法空)을 설하나니, 이 때문에 수보리 존자로 하여금 설상의 광명인 설광명(舌相光明)을 말하게 한 것이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0권 10
復次,佛威德尊重,畏敬心故,不敢問佛,畏不自盡。
또한 부처님의 위덕은 존귀하고 중하기에,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외경심(畏敬心) 때문에 감히 부처님께 묻지 못하나니, 외경(畏敬)하여서 스스로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復次,佛知衆中心所疑,衆人敬難佛故,不敢發問。所以者何?衆生見佛身過須彌山、舌覆三千大千世界、身出種種無量光明。
또한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어려워서 감히 질문하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계셨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들은 부처님의 몸이 수미산보다 더 높고 혀는 삼천대천세계를 덮으며 몸에서는 갖가지의 한량없는 광명이 나오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是時衆會,心皆驚怖,不敢發問,各各自念:“我當云何從佛聞法?”以是故,佛命須菩提,令爲衆人說法。
이 때에 그 모인 대중들은 마음으로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묻지 못하면서 저마다 생각하기를 “우리가 어찌하여야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명하여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게 하신 것이다.
言“汝所說者,皆是佛力”,如經中說。
“그대가 말하는 바 모두는 부처님의 위신력인 불력(佛力)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復次,般若波羅蜜有二種:一者、共聲聞、菩薩合說,二者、但與諸法身菩薩說。爲雜說故,命須菩提爲首,及彌勒、舍利弗、釋提桓因。
또한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성문과 보살을 같이 합하여 설하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법신보살(法身菩薩, dharmakāya-bodhisattva)만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성문과 보살을 합쳐서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보리를 우두머리로 하여 미륵(彌勒) 보살과 사리불 존자와 석제환인(釋提桓因)에게 명한 것이다.
爾時,衆會聞佛命須菩提令說,心皆驚疑。須菩提知衆人心,告舍利弗等言:
그 때에 모인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명하여 설하게 하시는 것을 듣고는 마음으로 모두 놀라고 의심하였는데, 수보리는 대중들의 그러한 마음을 알고서 사리불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一切聲聞所說、所知,皆是佛力。我等當承佛威神爲衆人說,譬如傳語人。所以者何?佛所說法,法相不相違背。
“일체 성문으로서 말한 바의 소설(所說)과 아는 바의 소지(所知)는 모두가 부처님의 불력(佛力)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받들어서 대중들에게 말하게 되는 것이나니, 마치 말을 전달하는 사람인 전어인(傳語人)과 같은 것이니,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법상(法相)과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是弟子等學是法,作證,敢有所說,皆是佛力;我等所說,卽是佛說。所以者何?現在佛前說。
제자들은 이 법을 배워서 증득하였으므로 감히 말하는 바의 소설(所說)이 있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 불력(佛力)이며, 우리들이 말한 바의 소설(所說)는 곧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이니, 왜냐하면 현재 부처님의 앞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부처님, 즉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我等雖有智慧眼,不値佛法,則無所見。譬如夜行險道,無人執燈,必不得過;佛亦如是,若不以智慧燈炤我等者,則無所見。”
우리들이 비록 지혜의 눈이 있다 하여도 불법(佛法)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보는 바가 없었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밤에 험한 길을 갈 때에 등불을 밝혀주는 사람이 없다면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 또한 그와 같으시니,
만약 지혜의 등불을 우리들에게 비추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소견(所見, 정견正見)이 없었을 것입니다.”
又告舍利弗:“一切聲聞、辟支佛實無力能爲諸菩薩說般若波羅蜜,況我一人!”所以者何?菩薩智慧甚深,問荅玄遠;諸餘淺近法,於菩薩邊說猶難,何況深法!如人能食一斛飯,從有一斗者索,欲以除飢,是不能除。以是故說“聲聞、辟支佛無力能爲菩薩說般若”。
또한 사리불 존자에게 말하기를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은 실로 무능력(無能力)하나, 모든 보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거늘 하물며 '나'이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보살의 지혜는 심히 깊어서 그 문답이 아득하고 멀기 때문이다.
모든 그 밖의 천박하고 얕은 법을 보살의 곁에서 말하기가 오히려 어렵거늘 하물며 깊은 심법(深法)이겠는가!
마치 열 말을 먹어야 되는 사람이 한 말을 가진 이에게 구하여서 그 배고픔을 없애고자 하여도 배고픔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성문이나 벽지불은 무능력(無能力)하지만, 보살을 위하여 반야를 설할 수는 있는 것이다.”고 한 것이다.
須菩提大明菩薩尊貴,佛亦然可。令須菩提欲於實相法中說,是故言:“一切法中求菩薩不可得,菩薩不可得故,字亦不可得;菩薩、菩薩字不可得故,般若波羅蜜亦不可得。是三事不可得故,我云何當敎菩薩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는 크게 총명한 사람으로 보살들도 존귀하게 여기며, 부처님도 그러하게 여기시므로 수보리 존자로 하여금 실상(實相)의 법 가운데에서 설하게 하신 것이니,
이 때문에 “일체법 가운데에서 보살은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보살은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이름 또한 불가득(不可得)이며, 보살이나 보살의 이름이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불가득(不可得)한 것이니,
이 보살, 보살의 이름, 반야바라밀의 세 가지가 불가득(不可得)이거늘, 제가 어찌 보살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問曰:佛命須菩提爲諸菩薩說般若,而須菩提言“無菩薩”,與佛相反,佛何以同之?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존자에게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반야를 설하도록 명하셨으나 수보리 존자는 “보살이 없다는 무보살(無菩薩)”이라고 말하였으므로, 부처님과는 서로 반대되거늘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동등이 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有二種說:一者、著心說,二者、不著心說。今須菩提以不著心說空,佛不訶之。
답하나니, 두 가지의 설명이 있나니,
첫째는 집착하는 마음의 착심(著心)에서의 설명이요,
둘째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불착심(不著心)에서의 설명이니,
지금 수보리존자는 집착하지 않는 불착심(不著心)에서 공(空)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부처님께서는 그를 꾸짖지 않으신 것이며,
復次,須菩提常行空三昧,知諸法空故。佛告須菩提:“爲諸菩薩說般若波羅蜜。”而菩薩畢竟空,是故須菩提驚言:“云何名菩薩?”
또한 수보리 존자는 항상 공삼매(空三昧)를 행하시어, 제법공(諸法空)을 아셨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놀라면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佛卽述成:“菩薩如是從發心已來乃至佛道,皆畢竟空故不可得;若如是敎者,是卽敎菩薩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이와 같이 발심해서부터 부처님의 불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필경공이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나니, 만약 이와 같이 가르친다면 이것이 곧 보살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치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復次,凡有二法:一者、名字,二者、名字義。如火,能炤、能燒是其義;炤是造色,燒是火大,是二法和合名爲火。若離是二法有火,更應有第三用!除燒、除炤更無第三業;以是故知二法和合假名爲火。
또한 무릇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명자(名字, 이름)요, 둘째는 명자(名字, 이름)의 뜻인 명자의(名字義)이다.
마치 불은 비출 수도 있고 태울 수도 있음이 그 의(義, 뜻)인 것과 같이,
밝게 비추는 것은 바로 색(色,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요, 태우는 것은 바로 불의 요소인 화대(火大)이니, 이 두 가지의 법이 화합한 것을 불이라 하나, 만약 이 두 가지 법을 여의고서 불이 있다고 한다면, 다시 제3의 작용(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우는 소(燒)를 제외하고 비추는 炤(소)를 제외한 제3의 업(業)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법이 화합한 것을 불이라 이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是火名不在二法內。何以故?是法二,火是一;一不爲二,二不爲一。義以名二法不相合。所以者何?若二法合,說火時應燒口;若離,索火應得水!如是等因緣,知不在內。
이 불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의 이법(二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이 법은 두 가지로되 불은 바로 하나이기 때문이라.
하나가 둘이 되지 못하고,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하므로, 뜻으로는 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법은 서로가 합하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두 가지의 이법(二法)이 합한 것이라면, 불을 말할 때에는 응당 입이 타야 하고, 만약 따로 떼어서 불을 구한다면 응당 물을 얻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안(內)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若火在二法外,聞火名,不應二法中生火想。若在兩中閒,則無依止處。一切有爲法,無有依止處;若在中閒,則不可知!以是故,火不在三處,但有假名。
만약 불의 이법(二法)이 바깥(外)에 있는 것이라면, 불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에, 이법(二法) 가운데에서 물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하고, 만약 두 중간(中)에 있는 것이라면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이라 만약 중간(中)에 있다면 알 수가 없는 것이므로, 불은 이러한 세 곳에 있지 않은 것으로,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인 가명(假名)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菩薩”亦如是,二法和合名菩薩,所謂名、色。色事異,名事異;若定有菩薩,應更有第三事!而無有事,則知假名是菩薩。“菩薩名”亦如是,不在內、不在外、不在兩中閒。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이법(二法)이 화합한 것을 보살이라 하나니, 이른바 이름과 물질의 명(名)과 색(色)이니, 색(色, 물질)과 사(事)는 다르고, 명(名)과 사(事)도 다르나니,
만약 반드시 보살이 있다고 한다면 다시 제3의 사(事)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만약 사(事)가 없다면, 곧 가명(假名)이 보살임을 알수 있으니,
보살의 이름 또한 그와 같아서 안(內)에 있지도 않고 바깥(外)에 있지도 않으며 두 중간(中)에 있는 것이 아니다.
是中佛說譬喩:“如五衆和合故名爲我,實我不可得;衆生乃至知者、見者,皆是五衆因緣和合生假名法;是諸法實不生不滅,世閒但用名字說。菩薩、菩薩字、般若波羅蜜亦如是,皆是因緣和合假名法。”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마치 오중(五衆)이 화합한 까닭에 이름이 나(我)가 된 것으로, 실제의 나인 실아(實我)는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오중(五衆)이 화합한 중생(衆生)과 알아차리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 모두가 오중의 인연 화합으로 생긴 임시의 가명법(假名法)이니, 이 제법은 진실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지만 세간에서는 단지 이름으로만 말하게 되는 것이니라.
보살이나 보살이라는 이름과 반야바라밀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 모두가 인연으로 화합된 가명법(假名法)이니라.”고 하셨으며,
是中佛更說譬喩。有人言:“但五衆和合有衆生,而衆生空,但有五衆法。”佛言:“衆生空,五衆亦和合故假名字有。”十二處、十八界亦如是。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비유로 설명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다만 오중(五衆)이 화합하여 중생이 있을 뿐이니, 중생은 공(空)한 것으로 다만 오중법(五衆法)만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공(空)한 것이고 오중 역시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의 가명(假名)으로 있는 것이며, 12처(處)와 18계(界)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