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38권 3
大智度論釋 往生品 第四之上 卷三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4. 왕생품(往生品)을 풀이함① 3
▶論. 問曰:舍利弗今問前世、後世,佛何以故前世中三種答,後世中廣分別?
▷논. 묻나니, 사리불은 지금 전세(前世)와 후세(後世)를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전세(前世)는 세 가지로 답하시고, 후세(後世)는 자세히 분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人以肉眼不見過去、未來故而生邪疑;雖疑二處,而未來世當受,故廣分別。譬如已滅之火,不復求救,但多方便防未來火;又如治病,已滅之病不復加治,但治將生之病。
답하나니, 사람의 육안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삿된 의심을 내게 되는 것이며, 비록 전세(前世)와 후세(後世), 두 곳을 의심할지라도, 미래세(未來世)는 당연히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분별하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이미 꺼진 불은 다시 끄고자 하지 않고, 단지 여러 방편으로 앞으로 일어날 불을 막고자 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병을 치료할 때 이미 나은 병은 더 치료하지 않지만, 단지 앞으로 생기려는 병만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佛無量辯才自恣,舍利弗所問雖少,佛廣爲其說。如問“與般若波羅蜜相應”一事,而佛種種分別。如貧者從大富好施者乞,所乞雖少,所與甚多。
또한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변재(變才)로 걸림이 없으시니, 사리불 존자의 물음이 비록 적을지라도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마치 그 물음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한 가지였지만, 부처님께서는 갖가지로 분별하여 설명하여 주신 것이라. 마치 가난한 이가 보시를 좋아하는 큰 부자에게 구걸할 때 비록 구걸한 바는 적을지라도 얻게 되는 것이 아주 많은 것과 같이,
佛亦如是,有無量無漏佛法具足之富,以大慈悲好行施惠;因舍利弗少問故,佛爲大衆廣分別說。
부처님께서도 그와 같아서, 무량한 무루(無漏)의 불법(佛法)을 두루 갖추신 큰 부자요, 큰 자비로써 베풀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라. 사리불 존자가 적게 물었을지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을 위하여 자세히 분별하며 말씀하신 것이며,
復次,是般若波羅蜜中,種種因緣譬喩,多說空法。有新發意者,取空相、著是空法,於生死業因緣中生疑:“若一切法畢竟空,無來無去,無出無入相,云何死而有生?現在眼見法尚不應有,何況死後餘處生不可見而有!”如是等種種邪疑顚倒心。爲斷是故,佛種種因緣廣說有死有生。
또한 이 반야바라밀의 갖가지 인연과 비유의 대개가 공법(空法)을 설하신 것이니,
어떤 초발의(發發意)의 이는 공상(空相)을 취하여 이 공법(空法)에 집착하여서, 생사(生死)의 업(業)과 인연(因緣)에 대하여, “만약 일체법이 필경공(畢竟空)이라면 옴도 없고 감도 없는 무래무거(無來無去)이며, 나고 들어감이 없는 무출무입(無出無入)의 상(相)도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죽어서 다시 태어남이 있겠는가?
현재 눈으로 보는 법조차도 오히려 있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다른 곳에서 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고 의심을 하나니,
이러한 갖가지의 삿된 의심과 전도(顚倒)된 마음을 끊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죽고 낢이 있는 유사유생(有死有生)이다.” 함을 갖가지의 인연을 예로 들어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無有死生因緣。何以故?人死歸滅,滅有三種:一者、火燒爲灰,二者、虫食爲糞,三者、終歸於土。今但見其滅,不見更有出者受於後身!以不見故,則知爲無!
묻나니, 죽고 나는 생사인연(死生因緣)은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멸하여 돌아가는 귀멸(歸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멸(滅)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불에 태우면 재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벌레에 먹혀서 똥이 되어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은 단지 없어지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다시 태어나는 몸이나, 후생에 받을 몸을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없기 때문에 곧 없는 것이라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答曰:若汝謂“身滅便無”者,云何有衆生先世所習憂喜怖畏等?如小兒生時,或啼或笑,先習憂喜故,今無人敎而憂喜續生。
답하나니, 만약 몸은 멸하여 곧 없어지는 것이라고 그대가 생각한다면, 어떻게 중생들이 전생에 익힌 바의 근심과 기쁨과 두려워함 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울기도 하고 혹은 웃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익혔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근심과 기쁨을 계속 내며,
又如犢子生知趣乳;猪羊之屬,其生未幾,便知有牝牡之合。子同父母,好醜貧富,聰明闇鈍,各各不同;若無先世因緣者,不應有異!如是等種種因緣,知有後世。
또한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젖을 찾아 먹는 것과 같으며, 돼지와 양의 족속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도 곧 암수의 교합(交合)을 아는 것과 같으며,
같은 부모의 아들일지라도 잘생기기도 하고 못 생기기도 하며, 가난하게 살기도 하고 부자로 살기도 하며, 총명하기도 하고 암둔하기도 하는 등으로 저마다 같지 않은 것과 같으니,
만약 선세(先世)의 인연이 없다면 이러한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인연으로 보아도 후세(後世)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又汝先言“不見別有去者",人身中非獨眼根能見,身中六情各有所知:有法可聞、可嗅、可味、可觸、可知者;可聞法尚不可見,何況可知者!
또한 그대가 앞에서 말하기를, “특별히 가는 유거(有去) 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사람의 몸은 비단 눈(眼)만으로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 안의 육정(六情, 안이비설신의)은 저마다 아는 것이 있나니, 법을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으며, 맛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알 수도 있으니, 들을 수 있는 가문법(可聞法)조차도 오히려 볼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렇게 알 수 있는 것이 겠는가?
有生有死法,亦可見、亦可知;汝肉眼故不見,天眼者了了能見。如見人從一房出,入一房;捨此身至後身,亦如是。
낢이 있고 죽움이 있는 유생유사(有生有死)의 법 또한 볼 수 없는 것이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니, 그대는 육안(肉眼)이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고 하지만, 천안(天眼)을 지닌 능히 이는 명료하게 보나니,
마치 사람이 방에서 나오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 몸인 차신(此身)을 버리고 뒷몸의 후신(後身)을 받는 것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若肉眼能見者,何用求天眼?若爾者,天眼、肉眼,愚聖無異;汝以畜生同見,何能見後世可知者。
만약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다면 천안(天眼)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천안(天眼)과 육안(肉眼)과 어리석은 우인(愚人)과 성인(聖人)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니, 이는 곧 그대가 축생과 같다고 보는 것이 되나니, 어찌 후세(後世)를 보고 알 수 있다고 할수 있겠는가?
如人死生雖無來去者,而煩惱不盡故,於身情意相續,更生身情意;身情意造業,亦不至後世,而從是因緣更生,受後世果報。
마치 사람이 죽고 태어남에 있어서 비록 오고 감이 없다 할지라도 번뇌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과 오근과 뜻의 신정의(身情意)는 계속 상속하여, 몸과 오근과 뜻의 신정의(身情意)의 업(業)을 지어내며,
이렇게 신정의(身情意)로 지은 업(業) 역시 후세에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이 인연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어서 후세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과 같으니,
譬如乳中著毒,乳變爲酪,酪變爲酥;乳非酪、酥,酪、酥非乳,乳、酪雖變而皆有毒。此身亦如是,今世五衆因緣故,更生後世五衆,行業相續不異故,而受果報。
비유하자면, 마치 우유에 독을 넣으면 우유가 변하여 락(酪, 요거트)이 되고 타락이 변하여 소(酥, 치즈)가 되지만, 우유는 요거트나 치즈가 아니고, 요거트와 치즈는 우유가 아니며, 우유가 요거트로 변했다 하여도 모두가 독이 있는 것과 같이,
이 몸 또한 그와 같아서 금세(今世)의 오중(五衆, 오온)의 인연 때문에 다시 후세를 낳게 되고, 오중(五衆, 오온)의 행업(行業)이 상속하면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又如冬木,雖未有花葉果實,得時節會,則次第而出。如是因緣,故知有死生。
이러함은 마치 겨울 나무는 비록 아직 꽃과 잎과 열매가 없을지라도, 시절을 만나게 되면 차례로 나오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죽어서 다시 태어남이 있음을 아는 것이며,
復次,現世有知宿命者,如人行,疲極睡臥,覺已,憶所經由。又一切聖人內外經書,皆說後世。
또한 현재의 세상에서 전생의 숙명(宿命)을 아는 이가 있나니,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이리저리 피곤하게 다니다가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그가 거쳐 지나간 길을 아는 것과 같으며,
또한 일체 성인과 안팎의 경서(經書)에서 모두 후세를 말하고 있으며,
復次,現世不善法動發過重,生瞋恚、嫉妒、疑悔內惱故,身則枯悴,顏色不悅。惡不善法,受害如是,何況起身業、口業!
또한 현재의 세상에서 착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을 일으킨 허물이 무거우며, 성을 내고 질투를 하고 의심을 내어 안으로 시달렸기 때문에 몸이 바짝 마르고 얼굴빛이 즐겁지 않게 되나니,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피해를 받음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일으킴이겠는가?
若生善法,淨信業因緣,心淸淨,得如實智慧,心則歡悅,身得輕軟,顏色和適。以有苦樂因緣故,有善不善。
만약 착한 선법(善法)과 청정하게 믿는 업의 인연을 낸다면, 마음이 청정하여지면서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게 되고, 마음이 기뻐지므로 몸이 가뿐하여지고 안색이 온화하게 되나니,
이렇게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이 있으므로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今定有善不善故,當知必有後世。但衆生肉眼不見,智慧薄故而生邪疑,雖修福事,所作淺薄。
이제 틀림없이 착함과 착하지 않음의 선불선(善不善)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後世)가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단지 중생은 육안(肉眼)이라 보지 못하는 것이고, 지혜가 얇기 때문에 삿된 의심을 낼 뿐이니, 비록 복사(福事)를 닦는다 하여도 짓는 일이 천박하니,
譬如藥師爲王療病,王密爲起宅,而藥師不知;旣歸見之,乃悔不加意盡力治王。
비유하자면, 약사(藥師)가 왕을 위하여 병을 치료할 때 왕은 은밀히 그를 위하여 집을 지어 놓았는데 약사는 모르고 있다가 돌아와서 그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 동안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왕을 치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과 같으며,
復次,聖人說今現在事實可信故,說後世事亦皆可信;如人夜行嶮道,導師授手,知可信故,則便隨逐。比智及聖人語,可知定有後世。
또한 성인이 말씀하는 현재의 일은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후세의 일에 대한 말씀도 전부 믿을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험한 밤길을 갈 때에 길잡이가 손을 내어주면 믿는 까닭에 곧 그 손을 잡고 따라가는 것과 같나니, 견주는 지혜인 비지(比智) 및 성인의 말씀으로써 반드시 후세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汝以肉眼重罪、比智薄故,又無天眼,旣自無智,又不信聖人語,云何得知後世?
그대는 육안(肉眼)의 죄가 중하고 비지(比智)가 얇기 때문이며, 또한 천안(天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혜가 없어서 성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후세를 알 수 있겠는가!
復次, 佛法中諸法畢竟空,而亦不斷滅;生死雖相續,亦不是常;無量阿僧祇劫業因緣雖過去,亦能生果報而不滅;是爲微妙難知。
또한 부처님 불법(佛法)에서는 제법이 필경공(畢竟空)이나, 또한 단멸(斷滅)하는 것도 아니니, 생사(生死)가 비록 상속(相續)할지라도 그 역시 항상하지 않은 것이며,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의 업인연(業因緣)이 비록 지나갔다 할지라도 역시 과보를 낳으면서 소멸하지 않나니,
이러함은 미묘(微妙)한 것이라 알기 어려운 난지(難知)이며,
若諸法都空者,此品中不應說往生,何有智者前後相違?若死生相實有,云何言“諸法畢竟空”?但爲除諸法中愛著邪見顚倒故,說畢竟空,不爲破後世故說。
만약 제법이 도무지 공(空)한 것이라면, 이 품(品)에서 왕생(往生)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거늘, 어찌 지혜 있는 지자(智者)의 앞뒤가 맞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생사(死生)의 상(相)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일체법은 필경공(畢竟空)이다.”라고 하겠는가?
단지 제법에 대한 애착과 삿된 소견과 뒤바뀜을 제거하기 위하여 필경공이라고 말씀하셨을 뿐, 후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汝無天眼明故疑後世,欲自陷罪惡!遮是罪業因緣故,說種種往生。
그대는 천안(天眼)의 밝은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를 의심하여 스스로 죄악에 빠지려 하나니, 이 죄업의 인연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로 왕생(往生)을 설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