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7권 7

Skunky 2024. 5. 28. 08:01

大智度論釋 習相應品 第三之餘 卷三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 습상응품을 풀이함 7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作是念:‘是法能得法性,若不得。’何以故?是菩薩不見用是法能得法性,若不得。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이 법(法)은 법성(法性)을 얻는다.”거나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이 법(法)으로써 법성(法性)을 얻거나 얻지 못함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論. 釋曰:云何“得法性”?行八聖道分,得諸法實相,所謂涅槃,是名“得法性”。復次,“性”名諸法實相,“法”名般若波羅蜜。菩薩不作是念:“行般若波羅蜜得是諸法性。”何以故?般若波羅蜜及諸法性,是二法無有異,皆畢竟空故,云何以般若波羅蜜得達法性?

논. 해석한다; 어떻게 법성(法性)을 얻고 팔성도분(八聖道分, 팔정도)을 행하여 제법의 실상을 얻는가? 이른바 열반을 일컬어 바로 법성을 얻은 것이라 하며, 

또한 성품의 성(性)을 제법의 실상이라 하고, 법(法)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나니,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 모든 법성을 얻겠다.”고 생각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모든 법성이라는 이 두 가지의 법이 다름없이 모두가 필경공(畢竟空)인 까닭이니, 어떻게 반야바라밀로써 법성을 통달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팔성도분(八聖道分,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法性不與空合,空不與法性合。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성(法性)이 공(空)과 합하지 않고, 공(空)이 법성(法性)과 합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論. 釋曰:菩薩不觀法性是空,不觀空是法性。行空得法性,緣法性得空,以是故無異。所以者何?是二畢竟空故。

논. 해석한다. 보살은 법성(法性)이 바로 공(空)이라고 관하지 않고, 공(空)이 바로 법성(法性)이라 관하지 않으며,

공(空)을 행하여 법성(法性)을 얻고, 법성(法性)을 반연하여 공을 얻기 때문에 다르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는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다.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眼界不與空合,空不與眼界合;色界不與空合,空不與色界合;眼識界不與空合,空不與眼識界合。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눈의 경계인 안계(眼界)가 공(空)과 합하지 않고, 공(空)이 안계(眼界)와 합하지 않으며,

빛깔의 경계인 색계(色界)가 공(空)과 합하지 않고, 공(空)이 색계(色界)와 합하지 않으며,

안식의 경계인 안식계(眼識界)가 공(空)과 합하지 않고, 공(空)이 안식계(眼識界)와 합하지 않느니라.

 

계(界, 산 dhātu, 팔 dhātu, 영어 realm)= 법(法)의 종류(種類, gotra 또는 종족(種族)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18계는 하나의 산(山) 중에 금(金) · 은(銀) · 동(銅) · 철(鐵) 등의 다양한 광물이 있는 것처럼, 각 사람의 몸(所依身)에 18종의 법(法: 실체, 요소)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각 사람의 인생의 흐름, 즉 5온의 상속(相續)에서도 이들 18종 법(法: 실체, 요소)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위키

 

乃至意界不與空合,空不與意界合;法界不與空合,空不與法界合;意識界不與空合,空不與意識界合。是故,舍利弗!是空相應,名爲第一相應。”

나아가 뜻의 경계인 의계(意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의계(意界)와 합하지 않으며,

법의 경계인 법계(法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법계(法界) 합하지 않으며,

의식의 경계인 의식계(意識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의식계(意識界)와 합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사리불아, 이 공(空)과 상응함을 일컬어 제일상응(第一相應)이라 하느니라.

 

論. 釋曰:“眼界不與空合、空不與眼界合”者,眼是有,空是無,空、有云何合?

논. 해석한다; 안계(眼界)가 공(空) 과 합하지 않고 공(空) 이 안계(眼界)와 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눈은 있다는 유(有)요 공은 없다는 무(無)이니, 공(空)과 유(有)가 어떻게 합할 수 있겠는가!

 

復次,菩薩種種因緣分別:散滅是眼,眼則空;空無眼名,因本故有眼空。空亦無分別:是眼空,是非眼空。是則眼不與空合。

또한 보살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분별하나니, 이 눈(眼)이 흩어지고 소멸하는 것이 곧 눈이 공(空)한 것이라 한다면, 눈이라는 이름조차 없는 공이니, 원인의 인본(因本)으로 인하여 눈이 공한 안공(眼空)이며, 그 공(空) 또한 무분별(無分別)이니, 이 안공(眼空)이 안공(眼空)이 아닌 것이기에 눈이 공(空)과 합하지 않는 것이다.

 

又空不從眼因緣生。何以故?是二法本自空故。乃至意識界亦如是。

또 공(空)은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공(空)과 눈(眼), 두 가지의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니, 나아가 의식계(意識界)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問曰:此中何以不說五衆等諸法,但說十八界?

묻나니,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오중(五衆, 오온) 등의 제법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단지 십팔계(十八界)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應說!或時誦寫者忘失。復有人言:若說十八界,則攝一切法。有衆生於心色中錯,心法中不錯,應聞十八界得度,是故但說十八界。

답하나니, 당연히 말씀하셨어야 하리라!  혹은 외워서 베껴 쓴 송사자(誦寫者)가 망실하였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십팔계를 말한다면 일체법이 다 포함되는 것이니, 어떤 중생은 심색(心色, 마음과 색온) 에서는 잘못이 있지만 심법(心法, 심수법)에서는 잘못되지 않나니, 마땅히 십팔계를 들으면 제도될 수 있으리라.”고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단지 십팔계만을 말씀하신 것이리라.

 

問曰:何以名爲第一相應?

묻나니, 무엇 때문에 제일상응(第一相應)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空是十方諸佛深奧之藏,唯一涅槃門,更無餘門能破諸邪見戲論;是相應不可壞、不可破,是故名爲第一。復次,佛自說第一因緣,所謂,

답하나니, 공(空)은 모든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창고인 광(藏)이요, 유일하게  열반을 향한 열반문(涅槃門)이니, 다시 다른 문이 없는 것이요. 모든 삿된 사견(邪見)과 쓸모없는 희론(戲論)을 깨뜨리나니, 이것과 상응하면 무너뜨릴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第一)이라 하며, 

또한 부처님께서 스스로의 제일인연(第一因緣)을 말씀하신 것이니, 소위,-

 

經. “舍利弗!空行菩薩摩訶薩不墮聲聞、辟支佛地,能淨佛土,成就衆生,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경. 사리불아, 공(空)을 행하는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으며, 부처님의 불토(佛土)를 능히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능히 성취시키며,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舍利弗!諸相應中,般若波羅蜜相應爲最第一,最尊、最勝、最妙,爲無有上!何以故?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相應,所謂空、無相、無作,當知是菩薩如受記無異,若近受記。

사리불아, 모든 상응(相應)한 가운데서 반야바라밀과의 상응(相應)이 제일이며, 가장 높은 최존(最尊)이며, 가장 수승한 최승(最勝)이며, 가장 묘한 최묘(最妙)한 것이라 보다 위의 것이 없는 것이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반야바라밀과의 상응(相應)은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수기(授記)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혹은 머지않아 수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相應者,能爲無量阿僧祇衆生作益厚。是菩薩摩訶薩亦不作是念:‘我與般若波羅蜜相應,諸佛當授我記,我當近受記,我當淨佛土,我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當轉法輪。’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상응(相應)한다면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을 위하여 짓는 이익이 두터울 것이며, 이 보살마하살은 역시 마음으로 ‘나는 반야바라밀과 상응(相應)하니, 모든 부처님께서 응당 나에게 수기를 주실 것이다.’거나

‘나는 머지 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거나

‘나는 불토(佛土)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거나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법륜(法輪)을 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何以故?是菩薩摩訶薩不見有法出法性,亦不見有法行般若波羅蜜,亦不見有法諸佛授記,亦不見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법성(法性)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법(法)도 보지 않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어떠한 법(法)도 보지 않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는 어떠한 법(法)도 보지 않고,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어떠한 법(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

 

何以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生我相、衆生相,乃至知者、見者相。何以故?衆生畢竟不生不滅故,衆生無有生無有滅;若法無有生相滅相,云何是法當行般若波羅蜜?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라는 아상(我相)과 중생이라는 중생상(衆生相) 내지는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라는 상(相)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중생은 필경에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에 중생은 낢도 없는 무유생(無有生)이고, 멸함도 없는 무유멸(無有滅)이라.

만약 법에 낢의 생상(生相)이나 멸하는 멸상(滅相)이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법(法)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겠는가?

 

如是,舍利弗!菩薩摩訶薩不見衆生故,爲行般若波羅蜜;衆生不受故、衆生空故、衆生不可得故、衆生離故,爲行般若波羅蜜。

그와 같으니,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되나니, 중생은 받아 들이지 않는 불수(不受)이기 때문에, 중생은 공하기 때문에, 중생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중생은 여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이 되느니라.

 

舍利弗!菩薩摩訶薩於諸相應中爲最第一相應,所謂空相應,是空相應勝餘相應。菩薩摩訶薩如是習空,能生大慈大悲。菩薩摩訶薩習是相應,不生慳心,不生犯戒心,不生瞋心,不生懈怠心,不生亂心,不生無智心。”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의 모든 상응(相應)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상응(相應)함이란, 이른바 공과의 상응하는 공상응(空相應)이니, 이 공상응(空相應)은 그 밖의 상응보다 수승한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공(空)을 익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내며,

보살마하살은 이 상응을 익혀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계율을 범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으며, 산란한 마음을 내지 않고, 지혜 없는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論. 釋曰:“不墮聲聞、辟支佛地”者,空相應有二種:一者、但空,二者、不可得空。但行空,墮聲聞、辟支佛地;行不可得空,空亦不可得,則無處可墮。

논. 해석한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란,

공(空)과의 상응(相應)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단공(但空)이고, 둘째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다.

단공(但空)만을 행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만, 불가득공(不可得空)을 행하면 공도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떨어질 곳조차 없는 것이다.

 

復有二種空:一者、無方便空,墮二地;二者、有方便空,則無所墮,直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다시 두 가지의 공(空)이 있으니, 첫째는 방편이 없는 무방편공(無方便空)이니, 성문과 벽지불의 두 지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방편이 있는 유방편공(有方便空)이니, 떨어질 데가 없이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된다.

 

復次,本有深悲心,入空則不墮;無大悲心則墮。如是等因緣,不墮二地。

또한 본래의 깊은 비심(悲心)으로 공(空)으로 들어가게 되면 떨어지지 않지만, 대비심(大悲心)이 없으면 곧 떨어지게 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성문과 벽지불의 두 지위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能淨佛世界、成就衆生”者,菩薩住是空相應中,無所復碍;敎化衆生,令行十善道及諸善法。以衆生行善法因緣故,佛土淸淨;以不殺生故,壽命長;以不劫不盜故,佛土豐樂,應念卽至。如是等衆生行善法,則佛土莊嚴。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킨다는 것이란, 

보살이 이 공(空)과 상응(相應)함에 머물러 다시는 장애가 없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십선도(十善道)와 모든 선법(善法)을 행하게 하나니,

중생들이 선법(善法)을 행하는 인연으로 부처님의 불토(佛土)는 청정하여지고, 살생(殺生)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명이 길게 되며, 빼앗지도 않고 훔치지도 않기 때문에 불토(佛土)는 풍요하고 쾌락하면서 생각하는 대로 이르게 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중생들이 선법(善法)을 행하게 되면 부처님의 불토(佛土)를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