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37권 3
大智度論釋 習相應品 第三之餘 卷三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③ 3
▶ 論. 釋曰:若菩薩 觀五衆非有非無,於是亦不著;爾時,與般若波羅蜜相應。所以者何?一切世閒著二見:若有,若無。順生死流者多著有,逆生死流者多著無;我見多者著有,邪見多者著無。
▷논. 해석한다; 만약 보살이 오중(五衆)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관찰하면서 이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 때에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상응하게 되나니, 왜냐하면, 일체 세간에는 있다는 유(有, 상견常見)와 없다는 무(無, 단멸견斷滅見)의 두 가지의 소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생사(生死)의 흐름을 따르는 이는 다분히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하고
생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는 대개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하고,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이 많은 이는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하며,
삿된 소견의 사견(邪見)이 많은 이는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한다.
復次,四見多者著有,邪見多者著無。二毒多者著有,無明多者著無。不知五衆因緣集生著有,不知集者著無。近惡知識及邪見外書故,墮斷滅、無罪福中,無見者著無;餘者著有。
또한 세간상(世間常), 세간무상(世間無常), 세간역상역무상(世間亦常亦無常), 세간역비상역비무상(世間亦非常亦非無常)의 네 가지 소견의 사견(四見)이 많은 이는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하고
삿된 소견의 사견(邪見)이 많은 이는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하고,
탐진치 삼독(三毒)이 많은 이는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하며,
무명(無名)이 많은 이는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하며,
오중(오온)은 인연이 쌓여서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하고,
오중(오온)의 쌓임인 집(集)을 모르는 이는 없다는 무(無, 단멸)에 집착하며,
삿된 벗과 삿된 소견과 외도의 가르침인 외서(外書)를 가까이 하는 까닭에 단멸(斷滅)에 떨어져서 죄와 복도 없다는 소견을 지닌 이는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하나, 그 밖의 나머지는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한다.
或有衆生謂一切皆空,心著是空;著是空故,名爲“無見”。或有衆生謂一切六根所知法皆有,是爲“有見”。
혹 어떤 중생은 모두가 공(空)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으로 공함에 집착한지라, 이 공에 집착한 때문에 없다는 소견의 무견(無見)이라 하며,
혹 어떤 중생은 일체의 육근(根)으로 알게 된 법 모두는 있는 것이라고 여기나니, 이를 있다는 소견의 유견(有見)이라 하며,
愛多者著有見,見多者著無見。如是等衆生著有見、無見。是二種見,虛妄非實,破中道。譬如人行狹道,一邊深水,一邊大火,二邊俱死。
애욕이 많은 이는 있다는 유견(有見)에 집착하고, 견해가 많은 이는 없다는 무견(無見)에 집착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중생들은 있다는 유견(有見)과 없다는 무견(無見)에 집착하나,
이 두 소견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써 중도(中道)를 무너뜨리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좁은 길을 가느데, 한쪽에는 깊은 물이 있고 한쪽에는 큰 불이 타고 있어서 양쪽 모두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著有、著無,二事俱失。所以者何?若諸法定實有,則無因緣;若從因緣和合生,是法無自性,若無自性卽是空!若無法是實,則無罪福、無縛無解,亦無諸法種種之異。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하거나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하는 두 가지 모두는 다 과실이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제법이 실제로 있는 실유(實有)라면 곧 인연(因緣)이 없는 것이고,
만약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이 법은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무자성(無自性)이라면 그것은 곧 공(空)한 것이며,
만약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 진실한 것이라면 죄와 복이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또한 제법이 갖가지로 다르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復次,有見者與無見者相違,相違故有是非,是非故共諍,有諍故起諸結使,結使故生業,生業故開惡道門;實相中無有相違、是非、鬪諍!
또한 있다는 유견(有見)을 지닌 이와 없다는 무견(無見)을 지닌 이는 서로가 어긋나나니,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시비(是非)가 있게 되고, 시비가 있기 때문에 함께 다투게 되며,
다툼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업이 생기는 것이며, 업이 생기기 때문에 악도(惡道)의 문을 열게 되나,
실상(實相)에서는 서로 틀린 것이거나 옳고 그른 것이거나 다툼이 없을 뿐이다.
復次,著有者,事若無常,則生憂惱;若著無者,作諸罪業,死墮地獄受苦。不著有無者,無有如是等種種過失;應捨是,則得實。
또한 있다는 유(有, 상견)에 집착한 이에게 만약 일이 무상하게 되면 근심과 괴로움을 내게 되고,
만약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 집착한 이라며, 모든 죄업을 짓고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되나니,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등의 허물이 없게 되나니, 이러한 것을 버려야 진실을 얻게 되는 것이다.
復次,是五衆若常、若無常,是事不然!所以者何?若五衆常,則無生無滅,無生無滅故則無罪福,無罪福故則無善惡果報。
또한 이 오중(五衆)이 혹은 항상하다는 약상(若常)이거나 혹은 무상하다는 약무상(若無常)은 옳지 못한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오중(五衆)이 항상한 것이라면 낢도 없고 멸함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기 때문이다.
무생무멸(無生無滅)이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으며,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곧 선악의 과보도 없게 되는 것이다.
世閒如涅槃不壞相,如是妄語,誰當信者!現見死亡啼哭,是則衆生無常;如草木彫落、華果磨滅,是則外物無常;大劫盡時,一切都滅,是爲大無常。如是等種種因緣,如是五衆常不可得。
세간이 마치 열반과 같고 파괴되지 않는 불괴상(不壞相)이라 한다면 이러한 거짓말을 누가 믿겠는가!
현실에서 죽는 것을 보고 슬피 통곡하는 것이 중생의 무상(無常)이니, 마치 풀과 나무가 시들어서 떨어지며 꽃과 열매가 없어짐과 같은 것은 바로 바깥의 외물(外物)의 무상(無常)이며,
대겁(大劫)이 다할 때에 일체의 것이 모조리 멸하는 것은 대무상(大無常)이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오중(五衆)이 항상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復次,無常破常,不應以無常爲是。所以者何?若諸法無常相,念念皆滅,則六情不能取六塵。所以者何?內心、外塵俱無住故,不應得緣、不應得知,亦無修習因緣果報!因緣多故,果報亦多,此事不應得。又以有常見與無常見共諍。如是等種種因緣。
또한 무상(無常)은 항상함의 상(常)을 무너뜨리지만, 그렇다고 무상함이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제법이 무상상(無常相)이어서 생각생각마다 모두가 없어지는 것이라면 곧 육정(六情,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으로 육진(六塵,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대경(육진, 육경)은 함께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응하여 반연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며, 또한 인연과 과보를 닦아 익힘도 없기 때문이라.
인연이 많기 때문에 과보 역시 많은 것이나, 이러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항상하다는 유상견(有常見)과 무상하다는 무상견(無常見)이 있기에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인연이 있는 것이다.
五衆無常則不可得。苦樂、我非我、若空若實、有相無相、有作無作,此義如先處處說。
오중(五衆)이 무상한 것이라면 곧 “ 괴로운 고(苦) 즐거운 낙(樂)나 아(我) 내가 아닌 비아(非我)、공(空) 실實)、유상(有相), 무상(無相)、유작(有作) 무작(無作)"을 얻을 수 없으니, 이러한 뜻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五衆寂滅”者,因緣生故無性,無性故寂滅,寂滅故如涅槃。三毒熾然故不寂滅,無常火然故不寂滅,不著三毒實相故不寂滅,三毒各各分別相故不寂滅。此義先未說,故今是中說。
오중이 고요히 사라지는 오중적멸(五衆寂滅)이라 함이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는 것이라. 고요히 사라졌기 때문에 마치 열반(涅槃)과 같으며,
탐진치 삼독(三毒)이 활활 타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고, 무상(無常)이라는 불에 타고 있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삼독의 실상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고, 삼독으로 각각 저마다의 상(相)을 분별하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나니,
이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若菩薩摩訶薩能如是離二邊、行中道,“行般若波羅蜜”亦不著。所以者何?菩薩不可得,般若波羅蜜亦不可得故。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두 치우침의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나니, 왜냐하면, 보살도 얻을 수 없고 반야바라밀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不行般若波羅蜜”亦不著。所以者何?餘諸凡夫不能如菩薩觀諸法實相,云何當言“我不行般若波羅蜜”?“行不行”亦不著,二俱過故。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相。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나니,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범부는 보살과 같이 제법의 실상을 관찰할 수 없으니 어떻게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행하고 행하지 않는 행불행(行不行)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두 가지 모두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함을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不爲般若波羅蜜故行般若波羅蜜,不爲檀波羅蜜、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故行般若波羅蜜。
▷경.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단(檀, 보시)바라밀ㆍ시라(尸羅, 지)바라밀ㆍ찬제(羼提, 인)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 정진)바라밀ㆍ선(禪)바라밀을 위하여서도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不爲阿鞞跋致地故行般若波羅蜜,不爲成就衆生故行般若波羅蜜,不爲淨佛世界故行般若波羅蜜。不爲佛十力、四無所畏、四無碍智、十八不共法故行般若波羅蜜。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불세계(佛世界)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부처님의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사무애지(四無礙智) 18불공법(不共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
不爲內空故行般若波羅蜜,不爲外空、內外空、空空、大空、第一義空、有爲空、無爲空、畢竟空、無始空、散空、性空、諸法空、自相空、不可得空、無法空、有法空、無法有法空故行般若波羅蜜。不爲如、法性、實際故行般若波羅蜜。
내공(內空)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제법공(諸法空)ㆍ자상공(自相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여여(如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위하여서도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
何以故?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壞諸法相故。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제법의 상(相)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익혀서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 論. 問曰:六波羅蜜乃至如、法性、實際,此是佛法。菩薩若不爲是佛法故行般若波羅蜜,更有何法可爲行般若波羅蜜?
▷논. 묻나니, 육바라밀과 여여(如如)함과 법성(法性)과 실제(實際)라는 것은 부처님의 법이니, 보살이 만약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떠한 법이 있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
여여(如如)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마음이 진여(眞如)인 까닭에 여여라고 한다, 과거 모든 부처님도 여여(如如)를 행하여 성도하셨고, 현재의 부처님도 여여(如如)를 행해서 성도 하시고, 미래의 부처님도 여여(如如)를 행하여서 또한 성도 할 것이니, 삼세에 닦아 증득한 바의 도(道)가 다름이 없으므로 여여(如如)라 함을 알지니라. 여여(如如)는 진리와 같고 마음의 진여(眞如)와 같다는 뜻이다.- 여여법당(如如法堂)
答曰:如佛此中自說:“諸法無有破壞者,不壞諸法相故;亦不分別是檀、是慳,乃至是三界、是實際。”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가운데서 스스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제법을 파괴하는 이가 없으니, 제법의 상(相)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며, 역시 ‘이것이 단(檀, 보시)이고, 이것이 간(慳, 간탐)이고, 이것이 삼계(三界)이고, 이것이 실제(實際)이다.’라고 분별하는 이도 없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으며,
復次,有菩薩於此善法,深心繫著,以繫著故能生罪;爲是人故,說:“是六波羅蜜乃至實際皆空,無有自性,如夢如幻,汝莫生著!眞菩薩不爲是故行。”
또한 어떤 보살은 이 선법(善法)에 마음을 깊이 매어두나니, 매어 두기 때문에 죄(罪)가 생기는 것이라.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육바라밀 내지 실제(實際)는 모두가 공(空)하고 자성이 없는 것이라,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환영과 같은 여환(如幻)이므로 그대는 집착하지 말라! 참된 보살은 이를 위하여 행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有菩薩心無所著,行六波羅蜜乃至實際;爲是人故,說爲是事故行般若波羅蜜。如後品中說:“爲具足六波羅蜜,乃至爲敎化衆生、淨佛世界故,行般若波羅蜜。”
또한 어떤 보살은 마음에 집착함이 없어서 육바라밀 내지는 실제를 행하기에,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러함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나니,
마치 후품(後品)에서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기 위하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고, 불세계(佛世界)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