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36권 4
大智度論 釋習相應品 第三之餘 卷三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② 4
問曰:眼識亦與三衆作因,何以但說“觸”?
묻나니, 안식(眼識) 역시 세 가지의 인(因)이 있거늘 어찌하여 촉(觸)만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眼識少時住,見色便滅;次生意識,能分別色好醜。是故不說眼識。因眼、色、識三事和合故生觸,觸生心數法。眼識因緣遠故不說。
답하나니, 안식(眼識)은 잠시 동안 머무르면서 색(色)을 보자 이내 사라지면서 그 뒤를 이어서 의식(意識)이 생겨서 색(色)의 좋음과 추함을 분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은 말하지 않는 것이며,
눈(眼)과 색(色)과 식(識) 세 가지의 화합으로 인하여 촉(觸)이 생기는 것이며,
촉(觸)은 마음을 따르는 심수법(心數法)을 내는 것으로 안식의 인연과는 멀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問曰:一切識皆有觸,何以但“觸因緣生心數法”
묻나니, 일체 식(識)의 전부에는 촉(觸)이 있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촉(觸)의 인연만으로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 생기는 것입니까?
答曰:心有二種:一者、念念生滅心,二者、次第相續心。觸亦如是,次第相續觸麤故,說因觸生心數法;念念觸微細,亦共生心數法,不了故不說。
답하나니, 마음(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는 념념생멸심(念念生滅心)이고,
둘째는 차례로 계속 이어지는 차제상속심(次第相續心)이라.
접촉 또한 그와 같아서 차례로 계속 이어지는 차제상속촉(次第相續觸)은 거칠기 때문에 촉으로 인하여 심수법(心數法)이 생긴다고 설명하며,
생각생각의 념념촉(念念觸)은 미세한 반면 역시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 생기는 것이지만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若情、塵、識三事和合能受苦樂,爾時觸法了了,以是故說因觸生心數法。如色法從因緣和合生;心數法亦如是,從觸法和合生。如色法從和合生,無和合則不生;心數法亦如是,有觸則生,無觸則不生。
만약 정(情, 오정)ㆍ진(塵, 오진)ㆍ식(識, 오식)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 때의 촉법(觸法)은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촉(觸)으로 인하여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 생기는 것이라고 하나니,
마치 색법(色法)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기는 것과 같이 심수법도 그와 같아서 촉법(觸法)의 화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
마치 색법(色法)이 화합에서 생기나, 화합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이 마음의 심수법 역시도 그와 같아서 촉(觸)이 있으면 생기나 촉(觸)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 것이다.
此受衆;一種,所謂受相。復有二種受:身受、心受、內受、外受,麤、細,遠、近,淨、不淨等。
이 느낌들의 수중(受衆, 수온)의 하나는 이른바 느끼는 수상(受相)이며,
다시 두 가지의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몸의 신수(身受)와 마음 심수(心受)이고, 안의 내수(內受)와 바깥의 외수(外受)이며, 거친 추수(麤受)와 미세한 세수(細受)이며, 먼 원수(遠受)와 가까운 근수(近受)이며, 깨끗한 정수(淨受)와 깨끗하지 않은 불정수(不淨受) 등이 그것이요.
復有三種受:苦、樂、不苦不樂;善、不善、無記;學、無學、非學非無學;見諦所斷、思惟所斷、不斷;因見諦所斷生受、因思惟所斷生受、因不斷生受。
다시 세 가지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괴로움의 고수(苦受)와 즐거움의 낙수(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며,
선수(善受)와 불선수(不善受)과 무기수(無記受)이며,
배우기 시작한 학수(學受)와 무학수(無學受)와 학도 무학도 아닌 비학비무학수(非學非無學受),
견제(見諦)에서 끊을 바의 수(受)와 사유(思惟)에서 끊을 바의 수(受)와 끊지 않을 바의 수(受)이며,
견제에서 끊는 바로 인하여 생기는 수(受)와 사유에서 끊는 바로 인하여 생기는 수(受)와 끊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수(受)이다.
或因身見生、不還與身見作因,或因身見生、還與身見作因,或不因身見生、不還與身見作因。
혹은 몸에 대한 소견의 신견(身見)으로 인하여 생기면서도 도리어 몸에 대한 소견의 인(因)이 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몸에 대한 소견으로 인하여 생기면서 도리어 몸에 대한 소견의 인(因)이 되기도 하며, 혹은 몸에 대한 소견으로 인(因)하여 생기지도 않고, 도리어 몸에 대한 소견의 인(因)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하며,
復有三種受:欲界繫、色界繫、無色界繫。如是等三種受。
또한 세 가지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욕계의 매임인 욕계계수(欲界繫受)와 색계의 매임인 색계계수(色界繫受)와 무색계의 매임인 무색계수(無色繫受)이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느낌의 수(受)가 있으며,
復有四種受:內身受、外身受、內心受、外心受;四正勤、四如意足等相應受,及四流、四縛等相應受。是名四種受。
다시 네 가지의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내신수(內身受)、외신수(外身受)、내심수(內心受)、외심수(外心受)이라,
사정근(四正勤)과 사여의족(四如意足) 등과 상응하는 느낌의 수(受)이며,
욕류(欲流) 유류(有流) 견류(見流) 무명류(無明流)의 사류(四流)와
탐욕박(貪欲縛) 진에박(瞋恚縛) 계취박(戒取縛) 아견박(我見縛)의 네 가지 번뇌의 사박(四縛, 사결) 등과 상응하는 느낌의 수(受)이니, 이러한 것을 네 가지의 느낌의 수(受)라 하며,
復有五種受:樂根、苦根、憂根、喜根、捨根;見苦所斷相應受,乃至思惟所斷相應受;五蓋、五結諸煩惱相應受亦如是。
다시 다섯 가지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우근(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며,
고제를 보아 끊게 되는 견고소단(見苦所斷)과 상응하는 느낌의 수(受) 내지는 사유에서 끊게 되는 사유소단(思惟所斷)에 이르기까지의 수(受)이요.
탐욕개(貪欲蓋) · 진에개(瞋恚蓋) · 혼면개(惛眠蓋) · 도회개(掉悔蓋) · 의개(疑蓋)의 5가지의 장애의 오개(五蓋)와
탐결(貪結) 에결(恚結) 만결(慢結) 질결(嫉結) 간결(慳結)의 오결(五結)의 모든 번뇌와 상응하는 수(受) 역시 그와 같으며,
復有六受衆:六識相應受。
다시 여섯 가지의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이 되는 경계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六識)과 상응한 느낌의 수(受)가 그것이요.
復有意識分別爲十八受,所謂眼見色思惟分別心生喜,眼見色思惟分別心生憂,眼見色思惟分別心生捨,乃至意識亦如是。
다시 의식(意識)으로 분별하는 18가지 느낌의 수(受)가 있으니,
이른바 눈으로 색(色)을 본 뒤에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으로 기쁨을 내고,
눈으로 색(色)을 본 뒤에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으로 근심을 내기도 하며,
눈으로 색(色)을 본 뒤에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에서 버리는 사(捨)를 내는 것이니,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
계(界)는 십팔계(十八界)요, 입(入)은 십이입(十二入)이다.
오음(五陰)은 색음(色陰), 수음(受陰), 상음(想陰), 행음(行陰), 식음(識陰).
십팔계(十八界)는 육진(六塵), 육문(六門), 육식(六識)이고,
십이입(十二入)은 빛깔(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촉감(觸), 의식(法)의 바깥의 육진(六塵)과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의 안의 육문(六門)이다.
법의 성품이 육식(六識)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과 육문(六門)과 육진(六塵)을 일으키고 자성(自性)은 만법(萬法)을 포함(包含)하니, 함장식(含藏識)이라 이름한다.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作用)을 하는 것이고, 이에 육식(六識)이 생겨서 육문(六門)으로 나와 육진(六塵)을 이루니 이것이 삼(三), 육(六), 십팔(十八)이라.
자성이 삿되기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邪)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난다.
악(惡)의 작용(作用을) 지니면 곧 중생(衆生)이요, 선(善)의 작용(作用)을 하면 부처니라, 작용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 이계묵의 육조단경.
是十八受中有淨、有垢,爲三十六。三世各有三十六,爲百八。如是等種種因緣分別受義無量,名爲受衆。
이러한 18가지의 수(受) 가운데 깨끗함의 정(淨)이 있고
더러움의 구(垢)가 있어 36이 되고
3세(世)에 각각 서른여섯 가지의 수(受)가 있으므로 합하여 108(36 X 3)가지가 되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분별하여 수(受)의 이치가 무량함을 일컬어 수중(受衆)이라 하는 것이다.
想衆、相應行衆、識衆亦如是分別。何以故?與受衆相應故。
상중(想衆)이나 상응하는 행중(行衆)ㆍ식중(識衆) 역시 이와 같이 분별하나니, 왜냐하면 수중(受衆)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復次,佛說有四種想:有小想、大想、無量想、無所有想。
또한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생각인 사종상(四種想)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작은 생각의 소상(小想)과 큰 생각의 대상(大想)과 무량한 생각의 무량상(無量想)과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상(無所有想)이라.
“小想”者,覺知小法。如說小法者,小欲、小信、小色、小緣相,名爲“小想”。
작은 생각의 소상(小想)이란, 작은 소법(小法)을 깨닫고 아는 것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소법(小法)이란 작은 욕망, 작은 믿음, 작은 물질이나 작은 연(緣)과 같은 상(相)이니, 이러한 것을 소상(小想)이라 하며,
復次,欲界繫想名爲“小”,色界繫想名爲“大”,三無色天繫想名爲“無量”,無所有處繫想是名“無所有想”。
또한 욕계에 매인 생각을 일컬어 작다(小) 하고, 색계에 매인 생각을 크다고(大) 하는 대상(大想)이라 하며,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의 삼무색천(三無色天)에 매인 생각은 무량상(無量想)이라 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매인 생각을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상(無所有想)이라 하며,
復次,煩惱相應想名爲“小想”,煩惱覆故;有漏無垢想名爲“大想”;諸法實相想名爲“無所有想”;無漏想名爲“無量想”,爲涅槃無量法故。
또한 번뇌와 상응하는 생각을 소상(小想)이라 함은 번뇌에 가려졌기 때문이며,
유루(有漏)로써 때가 없는 무구상(無垢想)을 대상(大想)이라 하며,
제법의 실상(實相)에 대한 생각을 무소유상(無所有想)이라 하며,
무루(無漏)의 생각을 무량상(無量想)이라 하나니, 열반을 위한 무량한 법이 되기 때문이요.
復次,佛說有六想:“眼觸相應生想,乃至意觸相應生想。”如是等名爲想衆。
또한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생각, 육상(六想)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눈의 접촉과 상응하여 생기는 생각 내지는 뜻의 촉과 상응하여 생기는 생각이니, 이와 같은 것들을 상중(想衆)이라 하며,
行衆者,佛或時說一切有爲法名爲行。或說三行:身行、口行、意行。
지어감의 행중(行衆)이라 함이란, 부처님께서는 간혹 “일체 유위의 유위법(有爲法)을 일컬어 지어가는 행(行)이라 한다.”고 하셨으며, 혹은 세 가지의 행(行)도 말씀하셨으니, 몸의 신행(身行)과 입의 구행(口行)과 뜻의 의행(意行)이다.
“身行”者,出入息。所以者何?息屬身故。“口行”者,覺觀。所以者何?先覺觀,然後語言。
몸의 지어감의 신행(身行)이라 함이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이니, 왜냐하면, 숨을 쉬는 식(息)은 몸에 속한 때문이요,
입의 지어감의 구행(口行)이라 함이란, 거친 생각의 각(覺)과 세밀한 생각의 관(觀)이니, 왜냐하면, 먼저 각(覺)과 관(觀)이 있은 후에 말을 하기 때문이다.
“意行”者,受、想。所以者何?受苦樂,取相心發,是名意行。
뜻을 지어감의 의행(意行)이라 함이란, 느낌의 수(受)와 생각의 상(想)이니, 왜냐하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모양을 취하면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뜻을 지어감의 의행(意行)이라 한다.
心數法有二種:一者、屬見,二者、屬愛。屬愛主名爲“受”,屬見主名爲“想”。以是故說是二法爲“意行”。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견에 속하는 속견(屬見)이고, 둘째는 애착에 속하는 속애(屬愛)이니,
속애(屬愛)의 주(主)된 것을 수(受, 느낌)이라 하고
속견(屬見)의 주된 것을 생각의 상(想)이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법을 지어감을 의행(意行)으로 삼으며,
佛或說十二因緣中三行:福行、罪行、無動行。“福行”者,欲界繫善業;“罪行”者,不善業;“無動行”者,色無色界繫業。
부처님께서는 12인연(因緣)에서 세 가지의 지어감을 말씀하시기도 하셨으니,
복의 복행(福行)과 죄의 죄행(罪行)과 움직임이 없는 무동행(無動行)이 그것이며,
복행(福行)이라 함이란, 욕계에 매인 착한 선업(善業)이고,
죄행(罪行)이라 함이란 착하지 않은 불선업(不善業)이며,
무동행(無動行)이라 함이란,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색무색계계업(色無色界繫業)이다.
阿毘曇除受、想,餘心數法及無想定、滅盡定等心不相應法,是名爲行衆。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는 느낌의 수(受)와 생각의 상(想)을 제외한 그 밖의 심수법(心數法) 내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을 바로 행중(行衆)이라 하였으며,
識衆者,內外六入和合故生六覺,名爲識;以內緣力大故,名爲眼識乃至名爲意識。
의식(識衆)이라 함이란, 안과 밖의 육입(六入)이 화합한 때문에 여섯 가지의 깨달음을 내므로 식(識)이라 하며, 안의 내연력(內緣力)이 크기 때문에 안식(眼識)이라 하고 나아가 의식(意識)이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