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5권 10

Skunky 2024. 5. 19. 08:00

大智度論 釋報應品 第二 卷三十五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 습상응품(習相應品) 풀이함 4

 

“置論”者,如十四難:世閒有常、世閒無常、世閒有邊、世閒無邊。如是等是名爲“置論”。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치론(置論, sthāpanīya)이라 함이란, 마치 14난문(難問)과 같이 “세간은 항상한가, 세간은 무상한가, 세간은 끝이 있는가, 세간은 끝이 없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을 치론이라 한다.

 

今佛以反問論答舍利弗。以舍利弗智於事未悟,佛反問事端,令其得解。

지금은 부처님께서는 반문론(反問論)으로써 사리불 존자에게 대답하시는 것이니, 사리불 존자의 지혜가 아직 깨치지 못한지라 부처님께서 일의 실마리= 사단(事端)를 되물으시면서 그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菩薩度衆生智慧名爲“道慧”。如後品中說:“薩婆若慧是聲聞辟支佛事,一切種智慧是諸佛事,道種慧是菩薩事。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를 일컬어 도혜(道慧)라 하나니, 후품(後品)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살바야(薩婆若)의 지혜는 바로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이고,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지혜는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지혜이며,

도종(道種)의 지혜는 바로 보살의 지혜이다.

 

도종지(道種智), 도종혜(道種慧)는 대지도론에서 설해지는 지혜로, 일체의 실천을 배워 중생을 구하는 보살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復次,八聖道分爲實道;令衆生種種因緣入道,是名“道慧”。令衆生住於道中,是爲“利益”聲聞種、辟支佛種、佛種。

또한 팔성도분(八聖道分)은 진실한 도(道)이니, 중생으로 하여금 갖가지의 인연으로 도에 머물게 하므로 이것을 도혜(道慧)라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도(道)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은 성문의 종성(種性)과 벽지불의 종성(種性)과 부처님의 종성(種性)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又復一切智慧無所不得,是名“一切種”。若有爲、若無爲,用一切種智知。得佛道已,應度一切衆生、利益一切衆生,或大乘、或聲聞乘、或辟支佛乘。

또한 일체 지혜로는 얻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이것을 일체종(一切種)이라 하나니, 유위(有爲)거나 무위(無爲)거나 간에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알게 되는 것이며,

부처님의 도를 얻은 뒤에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혹은 대승(大乘)으로써 혹은 성문승(聲聞乘)으로써 혹은 벽지불승(辟支佛乘)으로써 하기도 한다.

 

若不入三乘道,敎修福德,受天上人中富樂;若不能修福,以今世利益之事——衣、食、臥具等;若復不得,當以慈悲心利益。是名“度一切衆生”。

만약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三乘)의 도에 들지 못하면 복덕을 닦아 천상과 인간의 부귀와 쾌락을 받도록 가르치시고, 만약 복덕도 닦지 못한다면 지금 세상에서의 의복과 음식과 침구 등으로 이익되게 하시며, 만약 그것도 여의치 못한다면 자비심(慈悲心)으로 이익되게 해야 하나니, 이러함을 일컬어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問曰:若佛知一切聲、聞辟支佛不能爲衆生,何以故問?

묻나니, 만약 부처님께서 일체의 성문과 벽지불이 중생을 위할 수 없음을 아셨다면 무엇 때문에 물으신 입니까?

 

答曰:佛意如是,欲令舍利弗口自說“諸聲聞、辟支佛不如菩薩”,是故佛問。舍利弗言:“不也!世尊!”所以者何?聲聞、辟支佛雖有慈心,本不發心願度一切衆生,亦不迴善根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以是故,菩薩一日修智慧,過聲聞、辟支佛上。

답하나니, 부처님의 뜻은 이와 같으니, 곧 사리불 존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입으로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보다 못하다.”고 말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물으신 것이라.

사리불 존자가 답하기를 “없나이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인자한 자심(慈心)은 있다 하여도 본래 초발심이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자 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근(善根)을 돌이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지도 않기 때문에, 보살이 하루 동안 지혜를 닦아도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고 하신 것이다.

 

. “舍利弗!於汝意云何?諸聲聞、辟支佛頗有是念:‘我等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度一切衆生,令得無餘涅槃’不?”舍利弗言:“不也!世尊!”

▷경. “사리불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우리들은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인가?”

사리불 존자가 답하기를,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舍利弗:“以是因緣故,當知諸聲聞、辟支佛智慧欲比菩薩摩訶薩智慧,百分不及一,乃至算數譬喩所不能及。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는 보살마하살의 지혜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 問曰:上已反問舍利弗事已定,今何以復問?

▷논.  묻나니, 앞에서 이미 사리불에게 반문하면서 이미 알게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지금 다시 묻는 것입니까?

 

答曰:以舍利弗欲以須陁洹同得解脫故,與諸佛菩薩等,而佛不聽。譬如有人欲以毛孔之空與虛空等。以是故佛重質其事。

답하나니, 사리불 존자가 수다원(須陀洹)도 똑같이 해탈을 얻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과 평등하게 보려고 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모공(毛孔)과 허공을 평등하게 보려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거듭 그것을 물으신 것이며, 

 

復次,雖同一事,義門各異。先言“智慧,爲一切衆生故”,今言“頗有是念:‘我等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令一切衆生得無餘涅槃’?”“無餘涅槃”者,義如先說。

또한, 비록 동일하다 할지라도 이치의 문이 저마다 다르나니, 앞에서 지혜를 말씀하신 것은 일체 중생을 위한 것이요, 여기에서는 “우리들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을 얻게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니, 무여열반에 대한 뜻은 먼저의 설명에서와 같은 것이다.

 

復次,一聲聞、辟支佛尚不作是念,何況一切聲聞、辟支佛!

또한 한 사람의 성문이나 벽지불조차도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일체의 성문이나 벽지불이겠는가!

 

. “舍利弗!於汝意云何?諸聲聞、辟支佛頗有是念:‘我行六波羅蜜,成就衆生,莊嚴世界,具佛十力、四無所畏、四無碍智、十八不共法,度脫無量阿僧祇衆生令得涅槃’不?”舍利弗言:“不也!世尊!”

▷경. 사리불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우리는 육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성취시키고 세계를 장엄하며 부처님의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와 사무애지(四無礙智)와 18불공법(十八不共法)을 갖추어서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리라.’는 생각이 행여 있는 것인가?”

사리불이 말씀드리기를,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釋曰先略說“我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廣說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因緣,所謂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六波羅蜜”義,如先說。“敎化衆生、淨佛世界”,後當說。餘“十力”等,如先說。

▷논. 해석한다. 앞에서는 간략하게 말하여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겠다.”고 한 것이고, 이번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인연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니, 이른바 육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가 그것이다.

육바라밀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은 것이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뒤에 설명하겠으며, 그 밖의 10력(十力)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能作是念:‘我當行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度脫無量阿僧祇衆生令得涅槃。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으니, 

“보살마하살은 능히 생각하기를 ‘나는 육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구족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고 열반을 얻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譬如螢火虫不作是念:‘我力能照一閻浮提普令大明。’諸阿羅漢、辟支佛亦如是,不作是念:‘我等行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度脫無量阿僧祇衆生令得涅槃。’”

하지만, 마치 개똥벌레가 ‘나의 힘으로 능히 하나의 염부제를 두루 비추어서 크게 밝히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듯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도 또한 그와 같아서 ‘우리들은 육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구족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며 열반을 얻게 하리라’는 생각을 내지 못하느니라.”

 

. 釋曰:所以十方恒河沙舍利弗、目連不如一菩薩者,譬如螢火虫,雖衆多各有所照,不及於日。

▷논. 해석한다; 시방의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이 한 사람의 보살보다 못한 까닭은 비록 많은 개똥벌레가 저마다 반딧불을 비춘다 하여도 햇빛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螢火虫亦不作是念:“我光明能照一閻浮提。”諸聲聞、辟支佛不作是念:“我智慧能照無量無邊衆生。”如螢火虫,夜能有所照,日出則不能。諸聲聞、辟支佛亦如是,未有大菩薩時,能師子吼說法敎化;有菩薩出,不能有所作。

개똥벌레 역시 “나의 광명으로 능히 한 염부제를 비추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듯이, 모든 성문과 벽지불도 “나의 지혜로 능히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을 비추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또한 마치 반딧불이 밤에는 조금 비추다가도 해가 나오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모든 성문과 벽지불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큰 보살이 없을 때에는 사자처럼 외치면서 설법하고 교화하다가도 보살이 나오게 되면 하던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舍利弗!譬如日出時,光明遍照閻浮提,無不蒙明者;菩薩摩訶薩亦如是,行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度脫無量阿僧祇衆生令得涅槃。

▷경. 사리불아, 비유하자면, 해가 나왔을 때에는 해의 광명이 염부제를 두루 비추어서 그 광명을 받지 않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육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구족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느니라.

 

. 釋曰:如日天子憐愍衆生故,與七寶宮殿俱繞四天下,從初至終常不懈息,爲衆生除諸冷濕,照諸闇冥,令各得所。菩薩亦如是,從初發心,常行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爲度衆生無有懈息,除不善冷,乾竭五欲泥,破愚癡無明,敎導修善業,令各得所。

▷논. 해석한다; 마치 일천자(日天子)가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칠보(七寶)의 궁전과 함께 사천하(四天下)를 돌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항상 쉬지 않으면서 중생을 위하여 모든 냉기ㆍ습기를 제거하여 주고, 모든 어두운 곳을 밝혀 비추며, 저마다 처소를 얻게 하는 것과 같이,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초발심(初發心)에서부터 항상 육바라밀 또는 18불공법까지를 행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게으르거나 쉬는 일이 없으며, 불선(不善)의 냉기를 없애고 오욕(五欲)의 진창을 마르게 하며, 어리석음과 무명을 깨뜨리고 착한 선업(善業)을 닦도록 가르치고 인도하여서 저마다의 처소를 얻게 하며, 

 

又日明普照,無憎無愛,隨其高下深淺悉照。菩薩亦如是,出於世閒,住五神通,處於虛空,放智慧光,照明諸罪福業及諸果報。

또한 해의 광명이 두루 비추되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으며, 높고 낮은 곳과 깊고 얕은 곳을 따라 모두 비추나니,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세간에 출현하여 오신통에 머무르고, 허공에 처하면서 지혜의 광명을 놓아 모든 죄업과 복업의 과보를 환하게 비추어 주나니, 

 

菩薩以智慧光明 滅衆生邪見戲論,譬如朝露,見日則消。

보살이 지혜의 광명으로써 중생의 삿된 사견(邪見)과 쓸모없는 희론(戱論)을 없애는 것이 마치 아침 이슬이 해를 보면 이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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