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33권 4
大智度論釋初品中 到彼岸義 第五十 卷三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50. 초품 중 도피안(到彼岸)의 뜻을 풀이함 4
問曰:云何殺罪相?
묻나니, 어떤 것이 살죄(殺罪, 살생)의 상(相)입니까?
答曰:知是衆生,故奪命得殺罪,非不故;安隱快心得殺罪,非散亂狂心;奪命得殺罪,非作瘡;死已得殺罪,非未死;身業是殺罪,非口殺;身作是殺罪。
답하나니, 그가 중생인 줄 알면서 고의로 목숨을 빼앗으면 살죄(殺罪, 살생)의 죄가 되는 것이며,
이유없이 살생을 하고도 안온하고 유쾌한 마음이 되면 살죄(殺罪)가 되며,
산란하고 미치지 않았으나 남의 목숨을 빼앗으면 살죄(殺罪)가 되고,
상처를 낸 것은 아니나 죽이게 되는 것은 살죄(殺罪)가 되며,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신업(身業)을 가하는 것은 바로 살죄(殺罪)이고,
입으로 지시하였을 뿐 몸으로 지은 것이 아니어도 살죄(殺罪)가 되는 것이다.
非但心生,如是等罪,止不作,是初戒善相。或有人言:謂是不隱沒無記;或欲界繫,或不繫;是非心、非心數法,非心相應,非隨心行;或共心生,或不共心生;繁 많을 번,
비단 마음으로 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죄를 그치고 짓지 않는 것이 바로 첫 번째 계선(戒善)의 상(相)이니,
혹 어떤 사람은 이러함을 때가 없어진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라 말하기도 하며,
혹은 욕계에 매인 욕계번(欲界繁)이기도 하고 매이지 않은 불번(不繫)이기도 하며,
이것은 마음도 아니고 그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따라 행하는 것도 아니며,
혹은 마음과 함께 생기기도 하고 마음과 함께 생기지 않기도 한 것이며,
非業相應,非隨業行;或共業生,或不共業生;非先業果報;得修、行修;身證、慧證;或思惟斷,或不斷;離欲界欲時得斷知;凡夫、聖人共有。是名說不殺生戒相。餘戒亦如是隨義分別。諸戒讚歎論議,如“尸羅波羅蜜”中說。
업(業)과 상응한 것도 아니며, 업행(業行)을 따라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혹은 업과 함께 생기기도 하고 혹은 업과 함께 생기지 않기도 하며,
먼저 지은 업의 과보도 아니고, 얻는 수행의 득수(得修)ㆍ행하는 수행의 행수(行修)의 두 가지 수행과
몸으로 증득함의 신증(身證)과 지혜로 증득함으 혜증(慧證)의 두 가지 증득이며,
혹 사유(思惟)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사유에서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욕계의 욕망을 여읠 때에 끊어지게 되는 것으로 범부와 성인이 함께 가지고 있음을 아나니, 이것을 불살생(不殺生)의 계상(戒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밖의 계율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치를 따라 모든 계율을 분별하고 찬탄하며 논의하니, 마치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지계바라밀)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다.
“修定福處”者,雖經中說修慈是修定福,亦說有漏禪定能生果報者,摠名修定福。以欲界多瞋多亂故,先說慈心爲修定福。
수정의 복처인 수정복처(修定福處)라 함이란, 비록 경전 가운데서는 “인자함의 자(慈)을 닦는 것이 바로 수정복(修定福)이다”고 하였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유루선정(有漏禪定)은 능히 과보를 낸다”고 설명한 것도 통틀어 수정복(修定福)이라 하나니, 욕계에서는 성을 냄도 많고 산란함도 많기 때문에 먼저 인자한 자심(慈心)을 말하여서 수정복(修定福)을 얻게 하는 것이다.
得慈方便,願與衆生樂,後實見受樂,是心相應法,名爲慈法。是法或色界繫、或不繫,是爲眞慈;
인자한 방편을 얻는 득자방편(得慈方便)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중에는 실로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는 것이니, 그러한 마음과 그 마음에 상응하는 법을 일컬어 인자한 자법(慈法)이라 하는 것이니, 이 법은 혹 색계(色界)에 매이기도 하고 혹은 매이지 않기도 한것이니, 이것이 진실한 자(慈)인 것이다.
是方便慈,欲界繫。常隨心行,隨心生;無形無對;能緣法;非業,業相應,而隨業行,共業生,非先業果報;得修、行修;身證、慧證;或思惟斷,或不斷;離色界欲時得斷知;有覺有觀,亦無覺有觀,亦無覺無觀;
이러한 자방편(方便慈)은 욕계에 매인 것이며, 항상 마음의 행을 따르고, 마음을 따라 생기는 것이며, 형상이 없는 무형(無形)이며, 마주 할 수 없는 무대(無對)이며,
대상을 보고 아는 능연(能緣, 능견能見)의 법이며,
업(業)은 아니되 업과 상응하여서 업행을 따르며, 업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며,
먼저 지은 업의 과보도 아니고, 득수(得修)ㆍ행수(行修)ㆍ신증(身證)ㆍ혜증(慧證)이며,
혹은 사유(思惟)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색계(色界)의 욕망을 여읠 때에 끊어지게 되는 것이며,
유각유관(有覺有觀)과 또한 무각유관(無覺有觀)과 또한 무각무관(無覺無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진을 일컬어 ‘마음이 작용하는 법=心數法(심수법)이라 하며, 부지런히 행하여 머무르지 않는 모습’이라 하며, 心行(심행)을 따라 마음과 더불어 생기는=共心生(공심생)이라 하며,
혹은 거친 마음=有覺(유각)과 산란한 마음=有觀(유관)이 다 있기도 하고,
혹은 거친 마음=覺(각)은 없으되 산란한 마음=觀(관)만 있기도 하고,
혹은 거친 마음=覺(각)도 산란한 마음=觀(관)도 없기도 하나니,
이는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으니라.-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6권 1
或有喜,或無喜;或有息,或無息;亦凡夫人,亦聖人;或樂受相應,或不苦不樂受相應。先緣得解相,後緣實義。根本四禪中,亦過四禪;依止四禪得者,牢固有力。
혹은 기쁨의 희(喜)가 있기도 하고, 혹은 기쁨이 없기도 하며,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쉬지 않기도 하며,
또한 범부와 성인의 즐거운 느낌의 낙수(樂受)와 상응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와 상응하기도 하며,
먼저 득해(得解, 해탈)의 상(相)을 반연하고 뒤에는 제법의 실상의 실의(實義)를 반연하나니, 근본사선(根本四禪) 중에서 역시 사선(四禪)을 초과하는 것으로, 사선(四禪)에 의지하여 얻게 되는 이는 견고하면서 힘이 있으니,
慈應言“親愛”,無怨無諍故,名爲“親愛”;能緣無量衆生故,名爲“無量”;能利益衆生,能離欲故,名爲“梵行”。慈心餘論議,如“四無量”中說。
자(慈)는 마땅히 친밀한 애정의 친애(親愛)라고 말해야 하리니, 원한도 없고 다툼도 없기 때문에 친애(親愛)라고 하는 것이며, 무량한 중생을 반연하는 능연(能緣)이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량(無量)이라 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욕망을 여의기 때문에 범행(梵行)이라 하는 것이니,
자심(慈心)에 관한 그 밖의 논의는 사무량(四無量) 중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다.
問曰:修定福中,佛何以但說慈心,不說餘?
묻나니, 수정복(修定福)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자심(慈心)만을 말씀하시고 그 밖의 것은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答曰:四無量中,慈心能生大福德。悲心憂愁故,捨福德;喜心自念功德故,福德不深;捨心放捨,故福亦少。
답하나니, 사무량(四無量) 중에서 자심(慈心)은 능히 큰 복덕을 내거니와,
비심(悲心)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덕을 버리는 것이며,
희심(喜心)은 스스로의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덕이 깊지 않으며,
사심(捨心)은 놓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복덕이 적는 것이다.
復次,佛說慈心有五利,不說餘。何等五?一者、刀不傷,二者、毒不害,三者、火不燒,四者、水不沒,五者、於一切瞋怒惡害衆生中,見皆歡喜。悲心等三事不爾,以是故說“修定福爲慈”;餘者隨從,及諸能生果報有漏定。
또한 부처님께서는 자심(慈心)의 다섯 가지의 이익이 있음을 말씀하셨으나, 그 나머지의 비심(悲心), 희심(喜心), 사심(捨心)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어떠한 것이 다섯 가지의 이익인가? 곧
첫째는 칼로써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둘째는 독으로 해치지 못하며, 셋째는 불로 태우지 못하고, 넷째는 물에 빠뜨릴 수 없으며, 다섯째는 일체의 성을 내어서 악하게 해치는 중생들도 보면 모두가 환희하는 것이다.
비심(悲心) 등의 세 가지 마음은 그렇지 못하니, 이 때문에 수정복(修定福)은 자(慈)라고 말씀한 것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자심(慈心)에 붙따르면서 능히 모든 과보를 내는 유루의 선정인 유루정(有漏定)인 것이다.
“勸導福處”者,若比丘不能坐禪、不能誦經,教化勸導修立福德。或有比丘能坐禪、誦經,見諸比丘衣食乏少,力能引致,亦行勸導。
권도복처(勸導福處)라 함이란, 만약 어떤 비구가 좌선(坐禪)도 하지 못하고 경전을 독송하지 못한다면, 교화하고 권하여 이끌어서 이러함을 할 수 있게 하여 복덕을 닦아 세우게 하는 것이니, 혹 어떤 비구는 좌선도 하고 경전을 독송할 수는 있으나, 비구들의 옷과 음식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는 능력껏 구하여 끌어 들이는 등 역시도 권도를 행하는 것이며,
及諸菩薩憐愍衆生故,以福德因緣勸化。之又出家人,若自求財,於戒有失,是故勸導以爲因緣。“財福”者,衣服、飮食,臥具、醫藥,金銀、車馬、田宅等。
나아가 모든 보살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복덕의 인연으로 그들을 권화하며, 또한 출가한 사람이 만약 스스로의 재물을 구하게 되면 계율을 잃게 되는 때문에 권하고 이끌어 좋은 인연을 짓게 하나니,
재복(財福)이라 함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ㆍ금ㆍ은ㆍ수레ㆍ말ㆍ밭 및 집 등이 있는 것이다.
問曰:上言“布施福處”,此言“財福”,有何等異?
묻나니, 앞에서는 보시복처(布施福處)라고 하시고 여기에서는 재복이라 하셨는데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布施者,摠攝一切施:財施、法施,俗施、道施;今欲分別法施、財施。
답하나니, 보시(布施)라 함이란 일체의 보시, 즉 재물의 재시(財施) 법시(法施)와 세속의 보시인 속시(俗施)와 도의 보시의 도시(道施) 모두를 통틀어 포섭하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法施者,如佛以大慈故,初轉法輪,無量衆生得道;後舍利弗逐佛轉法輪;餘諸聖人雖非轉法輪,亦爲衆生說法得道,亦名法施。
법시(法施)라 함이란,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 최초로 법륜인 초전법륜(初轉法輪)을 굴리시어 무량한 중생이 도를 얻게 하신 것과 같은 것으로, 그 후에는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을 따라 법륜을 굴렸으며, 그 밖의 모든 성인들은 비록 법륜을 굴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중생을 위하여 설법으로 도를 얻게 하였으니, 역시 법시(法施)라 하는 것이다.
復有遍吉菩薩,觀世音、得大勢、文殊師利、彌勒菩薩等,以二種神通力:果報神通,修得神通,住是中,以福德、方便力、光明、神足等,種種因緣開度衆生,亦名法施。
또 변길(遍吉, 보현)보살과 관세음(觀世音) 보살ㆍ득대세(得大勢, 대세지) 보살ㆍ문수사리(文殊師利) 보살ㆍ미륵(彌勒) 보살 등은 두 가지의 신통력인 과보신통(果報神通)과 수득신통(修得神通)에 머물면서, 복덕과 방편의 힘과 광명과 신족(神足)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을 개화하고 제도하였으니, 이러함도 역시 법시(法施)라 하며,
諸辟支佛飛騰虛空而說一偈,引導衆生,令殖善根,亦名法施。又佛弟子未得聖道者,坐禪、誦經,不壞諸法相,教化弟子,皆名法施。
모든 벽지불이 허공을 날아오르면서 하나의 게송을 설해 중생을 인도하며 선근을 심게 하는 것 역시도 법시(法施)라 하며,
또한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한 이가 좌선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면서 제법의 상(相)을 무너뜨리지 않고 제자를 교화하는 것도 모두 법시(法施)라 하나니,
如是等種種,名爲法施相。以是故說:“菩薩欲立衆生於六種施福者,當學般若波羅蜜"
이와 같은 갖가지를 법시(法施)의 상(相)이라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중생을 여섯 가지 보시의 복처에 세우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