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8권 3
大智度論釋初品中 欲住六神通釋論 第四十三 卷二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3. 초품 중 육신통에 머무르고자 하면[欲住六神通]의 뜻 을 풀이함 3
問曰; “心所趣向” 心爲去?爲不去?
묻나니, 마음이 향하여 나아 가는 심소취향(心所趣向)이라 함에서
마음은 가는 거(去)입니까? 가지 않는 불거(不去)입니까?
若去 此則無心 猶若死人。
만일 가는 것이라면, 이는 곧 마음이 가고 없게 되는 것이므로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을 것이요,
若不去 云何能知?
만일 가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가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까?
如佛言, “依意緣法 意識生" 意若不去 則無和合!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뜻(意)은 법(현상과 작용)을 반연하는 것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을 낸다”고 하셨으니, 만일 가지 않는다면 곧 화합(和合)함도 없을 것입니다.
答曰; 心不去 不住而能知。如『般若波羅蜜』中說, “一切法無來無去相”
云何言“心有來去”?
답하나니, 마음은 가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는 것도 아님을 능히 알게 되나니,
마치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바와 같이, 일체법이 오는 상(相)도 없고 가는 상(相)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 오고 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又言“諸法生時無所從來 滅時無所去” 若有來去 卽墮常見。
또한 “제법이 생겨날 때에도 온 곳이 없고 멸하여 사라질 때에도 간 곳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오고 감이 있다고 한다면 곧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諸法無有定相 以是故 但以內六情 外六塵和合生六識, 及生六受 六想 六思。
以是故 心如幻化。
제법에는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나니, 이 때문에 다만 안의 육정(六情)과 밖의 육진(六塵)이 화합함으로써 6가지 알음알이의 육식(六識)이 생겨나고
6가지 느낌의 육수(六受, 수온受蘊)와 6가지 생각의 육상(六想, 상온想蘊) 6가지의 의도인 육사(六思, 행온行蘊)가 생겨나게 될 뿐이니, 이러한 까닭에 마음은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能知一切衆生心心數法;無有知者 無有見者。
如「歎摩訶衍品」中言, “若一切衆生心心數法 性實有不虛誑者 佛不能知一切衆生心心數法, 以一切衆生心心數法性實虛誑 無來無去故 佛知一切衆生心心數法"
능히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을 안다 하여도, 아는 지자(知者)도 없고 보는 견자(見者)도 없는 것이니,
마치 탄마하연품(歎摩訶衍品, Mahāyānastutiparivarta)에서 설하신 바와 같이, 만약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심수법(心數法)의 성품이 진실로 있는 것이고 거짓이 아니라면, 부처님도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능히 알지 못할 것이나,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심수법의 성품은 진실로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옮이 없는 무래(無來)이고 갊도 없는 무거(無去)인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아시는 것이다.
譬如比丘 貪求者不得供養 無所貪求則無所乏短。
비유하자면, 마치 비구가 탐하는 마음으로 공양을 구하면 얻지 못하지만,
탐심없이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 부족함이 없는 것과 같이,
心亦如是 若分別取相 則不得實法, 不得實法故 不能通達知一切衆生心心數法。
若不取相 無所分別 則得實法, 得實法故 能通達知一切衆生心心數法 無所罣㝵。
마음 역시도 그와 같아서 만약 상(相)을 취하여 분별하면 진실한 실상(實相)의 법을 얻지 못할 것이며, 진실한 실상(實相)의 법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통달하여 알지 못하겠지만
만약 상(相)을 취하지도 않고 분별함도 없다면 진실한 실상(實相)의 법을 얻게 될 것이고,
진실한 실상의 법을 얻었기 때문에 잘 통달하여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걸림이 없이 알게 되는 것이다.
問曰; 一切衆生諸心可得悉知不?若悉知 則衆生有邊,
若不知 何以故 說, “欲知一切衆生心所趣向”?云何佛有一切種智?
묻나니, 일체 중생들의 모든 마음을 모두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만약 모두 다 알 수 있다면 중생은 끝이 있는 유변(有邊)일 것이며,
만약 모두 다 알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일체 중생들의 마음이 향하여 나아 가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어떻게 부처님께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신 것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一切衆生心心數法可得悉知。
何以故?如經中說, “一切實語中 佛最第一" 若不能悉知 一切衆生心 得其邊際者 佛何以言, “悉知”?
亦不名一切智人! 而佛語皆實 必應實有一切智人。
邊際변제= 시간이나 공간, 정도 따위에서, 그 이상 더는 없는 한계
답하나니,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모두 다 알 수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경(經)의 말씀과 같아서, 일체의 진실한 말씀 가운데에서 부처님이 가장 으뜸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 중생들의 마음을 다 알아서 그 변제(邊際, 끝)를 얻을 수 없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모두 아는 실지(悉知)이다”고 말씀하셨겠는가?
또한 일체지인(一切智人)이라고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진실한 것이니, 반드시 일체지(一切智)를 실로 지니신 분이시다.
復次 衆生雖無邊 一切種智亦無邊, 譬如函大 蓋亦大。
若智慧有邊 衆生無邊者 應有是難, 今智慧 及衆生俱無邊故 汝難非也!
詰問힐문= 트집을 잡아 따져 물음
또한 비록 중생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 하여도 일체종지도 무변(無邊)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함(函, 상자)이 크면 그 뚜껑도 역시 큰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지혜는 끝이 있는 유변(有邊)이고 중생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따지고 묻는 힐문(詰問)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혜와 중생이 다 같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그대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復次 若言“有邊無邊” 此二於佛法中是置答, 是十四事 虛妄無實無益故 不應以爲難。
또한 만약 ‘유변(有邊)이나,’ ‘무변(無邊)이다’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는 부처님 불법(佛法) 안에서는 답변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그대로 두신 치답(置答)이며,
이러한 14 가지의 질문은 허망하고 진실이 없으며 이익이 없기 때문에 힐난할 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14무기(十四無記 · Fourteen unanswerable questions)는 부처님께서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한('무기 · 無記')의 질문이며, 이 질문은 흔히 무의미하다는 뜻, 즉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돕는 실천적인 물음이 아니라는 뜻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14불가기(十四不可記) 또는 14난(十四難)이라고도 한다.
시간에 대하여
세간유상(世間有常) · 세간상(世間常) · 세유상(世有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
세간무상(世間無常) · 세무상(世無常) · 세무유상(世無有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세간유상무상(世間有常無常) · 상무상(常無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세간비유상비무상(世間非有常非無常) · 비상비무상(非常非無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공간에 대하여
세간유변(世間有邊) · 유변(有邊) · 세유저(世有底):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세간무변(世間無邊) · 무변(無邊) · 세무저(世無底):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세간유변무변(世間有邊無邊) · 변무변(邊無邊):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세간비유변비무변(世間非有邊非無邊) · 비변비무변(非邊非無邊):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자아에 대하여
시명시신(是命是身) · 명즉시신(命即是身): 자아(命)와 육체(身)는 동일하다.
명이신이(命異身異) · 위명이신이(為命異身異): 자아(命)와 육체(身)는 별개이다.
사후세계에 대하여
여래사후유(如來死後有) · 여래유사후(如來有後死) · 여래종(如來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여래사후무(如來死後無) · 무후사(無後死) · 여래부종(如來不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사후유무(如來死後有無) · 유무후사(有無後死) · 여래종부종(如來終不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사후비유비무(如來死後非有非無) · 비유비무후사(非有非無後死) · 여래역비종역비부종(如來亦非終亦非不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위키
問曰; 若有邊 無邊二俱不實 而佛處處說“無邊”,
如“衆生有癡愛已來 無始無邊 十方亦無邊際”。
묻나니, 만약 유변(有邊)이나 무변(無邊), 둘 다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무변(無邊)”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마치 “중생이 어리석음과 애착을 가진 이래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시방도 역시 끝없이 넓은 무변제(無邊際)”라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 衆生無邊 佛智慧無邊 是爲實。若人著無邊 取相戲論故 佛說是邪見。
답하나니, 중생은 끝이 없고 부처님의 지혜도 끝이 없다는 이것은 진실이다.
만약 사람이 끝없는 무변(無邊)에 집착하게 되면 그 상(相)을 취하여서 쓸모없는 희론(戱論)을 내세우게 되기 때문에 부처님게서는 이러함은 삿된 소견의 사견(邪見)이라 하신 것이다.
譬如世閒 常無常 二俱顚倒, 入十四難中 而佛多以無常度衆生 少用有常。
若著無常 取相戲論 佛說是邪見虛妄。
비유하자면, 마치 '세간은 항상하고 무상하다는 상무상(常無常)이다'고 하는 두 가지는 다 같이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것으로, 14난(難)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대부분 무상(無常)하다는 것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시고, 항상하다는 것은 드물게 쓰셨으니, 만약 무상함에 집착한다면 그 상(相)을 취하여 쓸모없는 희론을 내게 되므로,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삿된 소견이요 허망한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若不著無常 知無常卽是苦 苦卽是無我 無我卽是空,
能如是依無常觀 入諸法空便是實 以是故 知無常入眞諦中。
만약 무상(無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고(苦)이며,
괴로움의 고(苦)는 무아(無我)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공(空)한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나니,
능히 이와 같이 무상함을 관찰하는 무상관(無常觀)에 의지하여, 제법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아 들게 되므로, 이것이 곧 진실인 것이니,
그러함으로 무상함을 알아 진실한 이치의 진제(眞諦)의 가운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是實十四難中 以著因緣故 說是邪見。
是故說“無常”以明“無邊”, 無邊故 衆生生厭生死長久。
譬如波梨國 四十比丘 俱行十二淨行 來至佛所 佛爲說厭行。
실로 이러한 14난(難)은 인연(因緣)에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삿된 소견의 사견(邪見)이라 하신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무상(無常)함을 설하시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을 밝히셨으며,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중생은 오랜 동안의 생사(生死)에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파리국(波梨國, Pathika)의 40명의 비구가 다 함께 열두 가지의 청정한 십이정행(十二淨行)을 수행하다가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오게 되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싫어하는 염행(壓行)을 말씀하여 주신 것과 같으니,
佛問比丘; “五恒河伽 藍牟那 薩羅由 阿脂羅婆提 摩醯, 從所來處流入大海 其中閒水爲多少?”
比丘言:“甚多!”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물으시되 “다섯 개의 강, 즉 항가(恒伽, Ganga, 항하)와 람모나(藍牟那, Yamunā)와 살라유(薩羅由, Sarayu)와 아지라바제(阿脂羅婆提, Aciravatī)와 마혜(摩醯, Mahī) 등의 큰 강의 근원에서부터 대해(大海)에 흘러 들어가기까지의 그 중간에 있는 물은 많다고 하겠느냐?”고 하시자,
비구들이 답하기를 “심히 많습니다”고 하였다.
佛言; “但一人一劫中 作畜生時屠割剝刺, 或時犯罪截其手足 斬其身首 如是等血多於此水。如是無邊大劫中 受身出血不可稱數 啼哭流淚 及飮母乳亦如是。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한 사람이 1겁 동안에 축생으로 살면서 잡혀서 죽고, 가죽이 벗겨지고 칼에 찔리며,
혹 때로는 죄를 범하여 그 손과 발이 잘리고, 그 몸과 머리를 베이는 등의 일들을 당할 때에 흘린 피가 이 강물들보다도 더 많느니라.
이와 같이 하면서 끝이 없는 대겁(大劫) 동안 몸을 받아서 흘린 피는 헤아릴 수조차 없으며, 울면서 흘린 눈물과 어머니의 젖을 먹은 것 또한 그와 같으니라.
計一劫中一人 積骨過於鞞浮羅大山 - 丹注云, 此山 天竺以人常見易信 故說也- 如是無量劫中受生死苦" 諸比丘聞是已 厭患世閒 卽時得道。
그리고 1겁 동안에 한 사람이 뼈를 쌓은 것만을 헤아려 보아도 저 비부라산(鞞浮羅, Vipula)대산과 - 단주(丹注)에서 이 산은 천축(天竺)에 있는 산이라 사람들이 항상 보고 믿기 쉽기 때문에 말씀한 것이라 하였다 - 같은 큰 산보다도 더 높게 쌓였으니, 이와 같이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에 나고 죽는 고통을 받았느니라.”
모든 40인의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세간을 싫어하면서 바로 도를 얻게 되었다.
비부라대산(鞞浮羅大山 Vipula) : 비부라(毘富羅ㆍ鞞浮羅)라고도 쓰며, 광(廣)이라 번역.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동쪽에 있는 산으로, 지금 비파루시의 남쪽 라쟈기루(Rajgir)부근에 있는 비푸라산.-마하보디
復次 聞十方衆生無邊故 心生歡喜受不殺戒 得無邊福德。
以是因緣故 初發意菩薩 一切世閒衆生皆應供養。
또한 시방의 중생이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 함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살생하지 않는 계율의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그지없는 복덕을 얻게 되었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처음에 뜻을 일으키는 초발의(初發意)보살들을 일체 중생들 모두는 공양하여야 하는 것이니,
何以故?爲度無邊世界衆生故 功德亦無邊。有如是等益 故說“無邊”。
以是故說, “悉知一切衆生心所趣向”, 如日照天下 一時俱至 無不遍明。
왜냐하면 끝없는 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요, 공덕도 또한 끝이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이익이 있는 까닭에 “무변(無邊)”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일체 중생들의 마음이 향아여 나아가는 곳을 모두 아는 것이 마치 해가 천하를 비추어서 두루 함께 밝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