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7권 9

Skunky 2024. 3. 17. 09:00

大智度論釋初品中  大慈大悲義 第四十二 卷二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2. 초품 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풀이함 9

 

問曰; 何以故 聲聞法中名爲“正位” 此菩薩法中位但名“位”?

묻나니, 무엇 때문에 성문의 법(가르침)에서는 정위(正位)라 하고, 이 보살의 법(가르침)에서는 다만 위(位)라고만 하는 것입니까?

 

答曰; 若言“正位”亦無咎。所以者何?若言“菩薩法位” 是則爲正。

聲聞法中 但言“位” 不言“聲聞位” 以是故言“正位”。

답하나니, 만약 정위(正位)하 하여도 역시 허물이 없으니, 왜냐하면 보살의 법에서 말하는 위(位), 그것이 곧 바른 정(正)이기 때문이다.

성문의 법에서는 다만 위(位)위를 말할 뿐, 성문의 지위= 성문위(聲聞位)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정위(正位)라고 말하는 것이다.

 

復次 學聲聞人 無大慈悲心 智慧不利故 未生厭心, 多求諸法 生種種邪見疑悔。

菩薩摩訶薩 大慈愍一切故 多求度脫衆生 老病死苦, 不求分別種種戲論,

또한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큰 자비의 마음이 없고 지혜가 날카롭지 못한 까닭에 (세간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고,

제법을 많이 구하나, 갖가지 삿된 소견으로 의심을 내지만,

보살마하살은 일체를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중생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모두 제도하고자 할 뿐, 갖가지 희론을 구하거나 분별하지 않으니, 

 

譬如 長者有一子 愛之甚重 其子得病 但求良藥能差病者, 不求分別諸藥名字 取之時節 合和分數。

비유하자면 마치 장자가 외아들을 몹시 애지중지하는데, 그 아들이 병이 들면 다만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좋은 약만을 구할 뿐, 그 약의 이름이나 그 약을 채취한 시절이나 지어진 분량이나 숫자를 따지고 분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以是故 諸菩薩 從果觀十二因緣 不從因觀見多者從因觀 愛多者從果觀。

諸聲聞人 因邪位故有正位, 菩薩邪位薄故 但名“菩薩位”。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결과의 과(果)를 좇아 12인연(因緣)을 관할 뿐, 원인의 인(因)을 좇아 관하지는 않으니,

소견이 많은 이는 원인의 인(因)을 좇아 관찰하고, 애착이 많은 이는 결과의 과(果)를 좇아 관찰하며,

모든 성문인들은 인(因)이 곧 지위이기 때문에 정위(正位)가 있는 것이지만

보살은 삿된 지위의 사위(邪位)에 대한 마음이 엷기 때문에 다만 보살위(菩薩位)라고만 하는 것이다.

 

問曰; 聲聞法中 從苦法忍 乃至道比忍 名爲正位。

如『經』中說, “三惡道中 不可得三事 所謂正位 聖果 漏盡。

破戒 邪見 五逆罪等 亦如是" 從得何法 名爲菩薩位?

묻나니, 성문법 중의 고법인(苦法忍)에서 도비인(道比忍)까지를 정위(正位)라 합니다.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3악도(惡道) 중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세 가지가 있으니, 즉 정위(正位)와 성인의 과위인 성과(聖果)와 번뇌가 다한 누진(漏盡)이며, 파계(破戒)와 삿된 소견과 5역죄(逆罪) 등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법을 얻게 되는 것이기에 보살위(菩薩位)라 하는 것입니까?

 

八種觀(팔종관)=고법인(苦法忍) 고비인(苦比忍), 집법인(集法忍), 집비인(集比忍), 멸법인(滅法忍), 멸비인(滅比忍), 도법인(道法忍), 도비인(道比忍). 八種觀(팔종관)은 사성제(四聖諦)의 '十六行(십육행, 십육행상)'을 (요약한) 넷으로,

"十六者, 觀苦四種, 無常 苦 空 無我, 觀苦因四種, 集 因 緣 生, 觀苦盡四種, 盡 滅 妙 出, 觀道四種, 道 正 行 迹"
열여섯 가지란, 먼저 고를 관찰함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요,
고의 원인을 관찰함에 네 가지가 있으니 '쌓임=集(집)ㆍ인(因)ㆍ연(緣)ㆍ낢=生(생)'이요,
고가 멸함을 관찰함에 네 가지가 있으니 '盡(진)ㆍ滅(멸)ㆍ妙(묘)ㆍ出(출)'이라.→ (滅 靜 妙 離)
고(苦)가 滅(멸)에 이르는 도(道)를 관찰함에 네 가지가 있으니 '도(道) 정(正) 행(行) 적(跡)'이니라. → (道如行出)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1권 4

 

答曰; 發意 修行 大悲 方便具足 行是四法 得入菩薩位。

如聲聞法中 先具四種 善根, 煖法 頂法 忍法 世閒第一法 然後 入苦法忍正位。

답하나니, 처음 발의(發意)하고 수행(修行)하여, 대비(大悲)와 방편구족(方便具足)이 두루 갖추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발의(發意) 수행(修行) 대비(大悲) 방편구족(方便具足)의 네 가지 법을 행하면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는 것이다.

마치 성문의 법 중에서 먼저 네 가지의 선근인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사가행(四加行, 사선근四善根)을 구족한 후에야 고법인(苦法忍)의 정위(正位)에 들게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난위(煖位, 난법), 선정에 의해 사물이 실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사성제(四聖諦)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로서 밝음을 얻었다 해서 명득정(明得定)이라고도 하며,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② 정위(頂位, 정법), 범부로는 최상 단계이므로 정수리라 해서 정위라 하며, 범부 지혜로써 사성제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최상 단계이다. 정위는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 밝음을 증장시켰다고 해서 명증정(明增定)이라 하며, 처음에는 밝은 기운이 온 전신을 엄습해 올 때의 기분은 그 어떤 세속적인 재미도 이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③ 인위(忍位, 인법), 선근이 확정돼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수용하는 경계 즉, 범부의 지혜로 사성제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서 이를 인정해 받아들이는 단계로서, 사성제의 이(理)를 인가(忍可)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단계로써 인순정(印順定)이라고 한다. 인위에서는 밝은 기운이 몸에 관성으로 배어서 후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쁜 짓을 못하게 되고, 욕심도 미운 생각도 사라지게 되며, 그에 이어서 다음에는 그것들이 다 허망한 줄을 알게 된다.
④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은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경계라는 뜻이다. 견성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성자의 위치는 못 돼도 세간적인 범부 중생의 세계에서는 제일가는 단계가 세제일법위이다. 
아직 번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며 유루법(有漏法)이 존재하는 세간에서 최상의 선근이 일어난 위치 즉, 가장 뛰어난 범부 지혜에 이른 단계로서 무간정(無間定)이라고도 하며, 다음 단계가 성자 경지인 견도(見道)이다. - 아미산

 

問曰; 修行皆攝四法 何以故差別爲四?

묻나니, 수행은 난(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종(四種)을 모두 포섭하는데, 무엇 때문에 발의(發意) 수행(修行) 대비(大悲) 방편구족(方便具足)으로 차별하여서 사법(四法)으로 삼는 것입니까?

 

答曰; 初發意 雖有修行 不久修故 不名修行, 如在家雖終日不住 不名爲行。

답하나니, 처음 뜻을 일으키는 초발의(初發意)를 하여 비록 수행한다 하여도 오래 닦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이라고 하지 않으니, 마치 집에 있는 이가 비록 종일토록 집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여도 집을 나갔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 發意時 但有意願, 行時造作 以財與人 受持禁戒 如是等行六波羅蜜 是名“修行”。

또한 초발의(初發意) 때에는 다만 뜻에 의한 서원이 있을 뿐이며, 행하여 나아가는 것을 조작(造作)이라 하며, 재물을 남에게 보시하고, 금계(禁戒)를 받아 지니는 등과 같이 육바라밀을 행하여 나아가는 것을 수행(修行)이라 하는 것이다.

 

修行已 以般若波羅蜜 知諸法實相 以大悲心 愍念衆生, 不知是諸法實相 染著世閒虛誑法 受種種 身苦心苦 是更受“大悲”名故 不名修行。

수행한 뒤에는 반야바라밀로써 제법의 실상(實相)을 알게 되어, 

중생은 제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여 세간의 거짓된 법에 물들어 집착하여 갖가지의 신고(身苦)와 심고(心苦)를 받는 것임을 대비(大悲)의 마음으로써 중생을 가엾이 여기게 되나

이러함은 대비(大悲)라고 부르는 것으로 수행이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方便”者 具足般若波羅蜜故 知諸法空, 大悲心故 憐愍衆生, 於是二法 以方便力不生染著。雖知諸法空 方便力故 亦不捨衆生, 雖不捨衆生 亦知諸法實空。

방편이라 함이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제법이 공(空)함을 알며,

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나,

이 두 가지의 법에 대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비록 제법이 공(空)한 것임을 안다 하여도 방편의 힘 때문에 역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비록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하여도 역시 제법이 진실로 공(空)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若於是二事等 卽得入菩薩位, 如聲聞人 於定慧二法等故 是時卽得入正位。

만약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되면 곧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마치 성문인이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법에 평등하기 때문에 곧 정위(正位)에 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是法雖有行 更有餘名字 不名修行。從初發意乃至坐道場 於其中閒所行皆名“修行” 小小差別 有異名字 爲易解故。

이 법에 비록 행함이 있다 하여도 다시 그 밖의 다른 이름이 있으면 수행이라고 하지 않지만,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의 그 중간에 행하는 것은 모두 수행이라 하나니, 소소한 차별(단계)에 따라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은 이해하기 쉽게 하고자 하는 때문이다.

 

譬如有人 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意 欲度脫一切衆生 老病死等身心諸苦 作大誓莊嚴, 功德 慧明二事因緣故 所願皆滿。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초발의 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일으켜 일체중생이 겪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하여 몸과 마음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주고자 큰 서원을 세워서 공덕(功德)과 혜명(慧明)의 두 가지 인연을 장엄하는 까닭에 원하는 바대로 모두 만족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是二事有六分修行 名爲六波羅蜜, 布施 持戒 忍辱 是功德分, 精進 禪定 智慧 是慧明分。

공덕(功德)과 혜명(慧明)의  가지에서 여섯 갈래의 수행이 있는 것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이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공덕의 부분이고,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바로 혜명의 부분이다.

 

修行六波羅蜜 知是諸法相 甚深微妙 難解難知 作是念, “衆生著三界諸法 以何因緣 令衆生得是諸法相?當以具足 諸功德 淸淨智慧. 成就佛身三十二相 八十隨形好 光明具足 神通無量 以十力 四無所畏 十八不共法 四無礙智 觀應可度者 說法開化"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이 제법의 상(相)은 심히 깊고 미묘하며,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하기를 “중생은 삼계(三界)의 제법에 집착하고 있으니, 어떠한 인연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이 제법의 상(相)을 알게 할 수 있을까! 

마땅히 모든 공덕과 청정한 지혜를 두루 갖추어서,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 80종호)를 성취하여, 광명을 두루 갖추고, 신통이 무량하며,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사무애지(四無礙智)의 불신(佛身)을 성취하여, 마땅히 제도될 중생을 관찰하여 불도(佛道)를 열어서 설하고 교화하리라."

 

譬如金翅鳥王 普觀諸龍 命應盡者 以翅海 令水兩闢 取而食之。

佛亦如是 以佛眼觀十方世界五道衆生 誰應得度 初現神足 次爲示其心趣;

비유하자면, 마치 금시조왕(金翅鳥王)이 온갖 용을 두루 살펴보고는 날개로 바다를 쳐서 물이 열리게 하고는, 목숨이 끝나는 용을 잡아먹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역시 그와 같이 불안(佛眼)으로써 시방세계의 오도(五道) 중생 중에서 누가 마땅히 제도 될 수 있는 이인가를 관찰하신 뒤에, 처음에는 신족(神足, 신족통)을 나타내 보이시고, 다음에는 그를 위하여 그 마음의 나아갈 바를 보여주시나니,

 

以此二事 除三障礙而爲說法 拔三界衆生。得佛力無量神通 假令虛妄猶可信, 何況實說!是名“方便”。

이러한 두 가지 일로써 세 가지 장애인 삼장애(三障礙)를 제거하시고, 위하여 설법하시어 삼계의 중생들을 구제하시니, 부처님의 힘과 한량없는 신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설사 허망하다 하여도 오히려 믿어야 하거늘, 하물며 진실한 말씀이겠는가! 이러함을 방편(方便)이라 하는 것이다.

 

삼장사마(三障四魔)

삼장애(三障礙, 삼장三障)= 번뇌장(煩惱障) · 업장(業障) · 보장(報障)

사마(四魔)= 음마(陰魔) · 번뇌마(煩惱魔) · 사마(死魔) · 천자마(天子魔)

 

復次 菩薩以般若波羅蜜 知諸法相 念其本願 欲度衆生 作是思惟, “諸法實相中 衆生不可得 當云何度?”

復作是念, “諸法實相中 衆生雖不可得 而衆生不知是諸法相故 欲令知是實相"

또한 보살은 반야바라밀로써 제법의 실상(實相)을 알고 그 본래의 서원을 생각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사유(思惟)하기를 “제법의 실상(實相)으로는 중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떻게 제도하여야 될까”라고 하다가,

다시 사유(思惟)하기를 “제법의 실상에서 비록 중생을 얻을 수 없다 하여도 중생들은 이 제법상(諸法相)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실상을 알 수 있게끔 하여 주리라”고 하며, 

 

復次 是實法相 亦不礙衆生。實法相者 名爲無所除壞 亦無所作。

是名“方便”。具足是四法 得入菩薩位。

또한 이 진실한 법상(法相)은 역시 중생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니, 진실한 법상(法相)이라 함은 없애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만들 수 없는 무소작(無所作)의 것임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를 방편(方便이라 하는 것이며, 

발의(發意) 수행(修行) 대비(大悲) 방편구족(方便具足)의 사법(四法)을 갖추게 되면 보살위(菩薩位)를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