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7권 8
大智度論釋初品中 大慈大悲義 第四十二 卷二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2. 초품 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풀이함 8
問曰; 從得無生法忍已來 常得法性生身變化不?
묻나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신 이후부터는 항상 법성생신(法性生身, 8지 이상의 보살)을 변화로 나타나게 하심을 얻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용수는 『대지도론』에서 부처의 몸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신은 진불, 색신은 세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법신은 ‘중도(中道)’, ‘공(空)’, ‘무소득(無所得)’ ‘부동상(不動像)’의 속성을 갖는다. 이 때의 법신은 도리의 부처로서 십력 등 정신적인 면과 함께 『반야경』의 ‘공’사상을 수용한 개념이다.
법신을 법성신으로도 표현하는데, 법성신은 허공에 가득하고, 무한한 광명과 음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세속의 무리들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는 법성생신불(法性生身佛)이라는 개념도 사용하는데 8지이상의 보살을 의미한다. 즉 법신과 색신의 중간적인 단계로써 불신관이 2신에서 3신으로 변화하는 연결고리의 성격을 지닌다.- 다움
答曰; 化法 要有化主然後能化, 若得無生法忍 斷一切結使 死時捨是肉身 無有實身 誰爲變化?以是故知, 得無生已來 不應盡結使。
답하나니, 변화로 된 법의 화법(化法)에는 반드시 변화하는 주인인 화생(化生)이 있어야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무생법인을 얻고 일체 번뇌를 끊어내었다면, 죽을 때에 이 육신(肉身)을 버리게 되면, 진실한 몸이 없을 터인데 그 누가 변화를 부린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에도 번뇌가 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復次 聲聞人言“菩薩不斷結使 乃至坐道場然後斷” 是爲大錯!
何以故?汝法中說, 菩薩已滿三阿僧祇劫 後更有百劫中常得宿命智 自憶迦葉佛時作比丘 名鬱多羅 修行佛法。
云何今六年苦行 修邪道法 日食一麻一米?後身菩薩一日尚不應謬 何況六年!
또한 성문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살이 아직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으나, 도량에 이르러 앉으신 연후에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큰 착오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성문법 가운데에서 “보살은 이미 3아승기의 겁을 다 채웠고, 뒤에 다시 백 겁 동안 항상 숙명지(宿命智)를 얻었으며, 스스로 기억하건대, 가섭불(迦葉佛) 때에는 울다라(鬱多羅, Uttarā)라는 비구로써 불법(佛法)을 수행하였다" 고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6년 동안 고행하시면서 삿된 도법(道法)을 수행하고자, 하루에 깨 한 알과 쌀 한 톨을 드셨단 말인가!
보살의 최후신(最後身, 불환과인 아나함)은 하루조차도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6년 동안이겠는가!
瞋亦如是 從久遠世時作毒蛇 獵者生剝其皮 猶尚不瞋, 云何最後身而瞋五人?以是故 知聲聞人 受佛義爲錯。
성냄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 오래전의 먼 세상에 독사로 있을 때 사냥꾼이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는데도 오히려 성을 내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최후신(最後身)으로써 다섯 사람에게 성을 내었겠는가!
그러므로 성문의 사람들이 부처님의 뜻을 잘못 받아들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佛以方便力 欲破外道故 現六年苦行。汝言瞋五人者 是爲方便 亦是瞋習 非煩惱也。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외도들을 깨뜨리고자 6년 동안의 고행을 나타낸 것이다. 그대가 말한 “다섯 사람에게 성을 내었다”는 것도 이것은 방편으로 역시 성을 낸 습기일 뿐, 번뇌는 아닌 것이다.
今當如實說, 菩薩得無生法忍 煩惱已盡, 習氣未除故 因習氣受及法性生身 能自在化生。有大慈悲爲衆生故 亦爲滿本願故 還來世閒, 具足成就 餘殘佛法故, 十地滿 坐道場 以無礙解脫力故 得一切智 一切種智 斷煩惱習。
이제 당연히 사실대로 말하나니,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어서 번뇌는 이미 다하였지만 습기가 아직 제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습기로 인하여 법성생신을 받아 자유자재로 화생(化生)할 수 있었고,
대 자비로 중생들을 위한 때문이며, 또한 본래의 서원= 본원(本願)을 완성하기 위하여 다시 세간에 오신 것이며,
그 밖의 나머지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성취하기 위한 때문이시니,
십지(十地)가 원만하면서 도량에 앉아 무애해탈(無礙解脫)의 힘을 얻으신 까닭에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시어 번뇌의 습기를 끊으신 것이다.
摩訶衍人言, “得無生法忍菩薩 一切煩惱及習都盡” 亦是錯!
若都盡 與佛無異 亦不應受法性生身!以是故 菩薩得無生法忍 捨生身 得法性生身。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사람이 말하기를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은 온갖 번뇌와 습기가 모두 다하였다”고 하나,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만약 번뇌와 습기가 모두 다하여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면 역시 법성생신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고서도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 생신(生身)을 버리고 법성생신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무생법인을 터득하셨으나, 업(業)으로 태어나게 되는 몸 버리고자(이러함으로 마지막 몸을 받음)법성신(法性身)을 통해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나게 되셨던 것입니다.-마하보디
법신(法身, Dharmakāya)= 문자 그대로의 뜻은 진리의 몸(truth body) 또는 실재의 몸(reality body)으로, 부처인 비로자나불로 형상화된다. 불신관(佛身觀)의 대표적인 견해인 삼신설(三身說)에 따르면 부처는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3가지 몸을 가지고 있는데, 법신은 진리(법) 그 자체에 해당한다.
초기불교 시대에는 부처라 하면 35세에 도를 깨닫고 80세에 입적(入寂)한 생신(生身)의 고타마 붓다 한 사람을 의미하고 고타마 붓다는 범인(凡人)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32상(相)에다 80종호(種好)의 특수한 모습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승의 여러 경전(經典)에는 이러한 부처를 초월한 부처가 기술되었다. 《법화경(法華經)》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닫고 부처가 된 고타마 붓다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것에 불과하며, 사실은 영원한 과거에 있어서 이미 성불을 완성하고 무한한 시간에 걸쳐 인간들을 교화해 온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久遠의 法身佛)이라 부른다.
이것은 불교가 본래 진리(법) 신앙이며, 진리(법)는 영원불멸이기 때문에 그 진리(법)를 깨달은 부처도 진리(법)와 일체(一體)이며, 진리(법)를 신체(身體)로 하고 있는 영원불멸의 존재, 즉 법신(法身)이라고 여긴 것이다.
오종법신
법성생신(法性生身). 법신은 만유의 본체인 진여 법성에서 난 몸
공덕법신(功德法身). 법신은 여러 공덕을 이루는 것이란 뜻
변화법신(變化法身). 법신은 시기에 응하여 변현한다는 뜻
실상법신(實相法身). 법신은 허망함을 여의어 진여(眞如) 자체이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란 뜻.
허공법신(虛空法身). 법신은 허공에 가득하여 만유를 포함하였다는 뜻
여기서, 법성법신과 공덕법신은 보신, 변화법신과 실상법신은 응신, 허공법신은 법신에 해당한다.- 위키
若言“至坐道場 一切煩惱及習俱斷” 是語亦非!
所以者何?若菩薩具有三毒者 云何能集無量佛法?
譬如毒甁 雖著甘露 皆不中食。菩薩集諸純淨功德 乃得作佛, 若雜三毒 云何能具足淸淨佛法?
만약 “도량에 앉기에 이르러 온갖 번뇌와 습기가 함께 다하였다”고 한다면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삼독(三毒)이 있었다면 어떻게 무량한 불법(佛法)을 쌓아 모을 수 있었겠는가!
비유하자면, 마치 독이 든 병에는 비록 감로(甘露)를 섞어 넣는다 하여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은 모든 순수하고 청정한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이 될 수 있는데, 만약 3독이 섞였다면 어떻게 청정한 불법(佛法)을 갖출 수 있겠는가!
問曰; 觀諸法實相 及修悲心故 能令三毒薄故 能集淸淨功德!
묻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삼독을 엷게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때문에 청정한 공덕을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答曰; 薄三毒 可得轉輪聖王 諸天王身, 欲得佛功德身 無有是事!
三毒斷 習未盡 可得集諸功德。
답하나니, 삼독이 얕아지면 전륜성왕이나, 다른 여러 천왕(天王)의 몸은 얻을 수 있지만, 부처님 공덕의 몸을 얻고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삼독을 끊어내었고 습기가 아직 다하지 않았으나, 모든 공덕들을 쌓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復次 “薄”名 如離欲人斷下地結 猶有上地煩惱。
又如須陁洹 見諦所斷結盡 思惟所斷未盡 是名爲“薄”。
또한 엷은 박(薄)이라 하면 마치 욕망을 여읜 이욕인(離欲人)이 아래의 경지인 하지(下地)의 번뇌를 끊었으나 아직 높은 경지의 상지(上地)의 번뇌가 남아있는 것과 같으며,
또한 수다원(須陀洹)이 진리를 보는 견제(見諦, 견제도, 불퇴위)에서 끊어야 할 번뇌를 다하였으나,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것과 같음을 바로 ‘엷다’고 하는 것이다.
사유(思惟, cintanā)는 대상을 구별하고 생각하고 살피고 추리하고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또는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에 계합하는 사유를 정사유(正思惟)라고 하며 이것은 8정도(八正道) 가운데 하나이다. 진리에 계합하지 않는 사유를 사사유(邪思惟)라고 하며 8사(八邪) 가운데 하나이다
사유(思惟)는 '대상을 구별하고 생각하고 살피고 추리하고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라는 정의에서 보면 대체로 제6의식에 의한 계탁분별을 말하는데, 아주 넓게는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바른 지혜 즉 일체의 사사유(邪思惟)를 끊는 무루혜까지도 포함한다. 이 견해 즉 '모든 사유 즉 모든 사유분별 즉 모든 계탁분별은 실제로는 사사유이며 정사유란 일체의 사유분별 즉 일체의 계탁분별을 끊는 것'이라는 견해는 '보살의 수행으로서의 8정도의 정사유'에 대한 《대지도론》의 견해로, 말하자면 사유에 대한 '높은 경지의' 견해인데, 이보다 좀 완화된 견해로, 8정도의 정사유란 무루의 지혜로 4성제의 이치를 깊이 사유하여 관(觀)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 즉 4제 16행상 등의 제관(諦觀: 진리를 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키
如佛說, “斷三結 薄婬怒癡 名爲斯陁含" 汝若言“薄” 應當是斷, 以是故 “得無生法忍時斷煩惱 得佛時斷煩惱習” 是則實說。
마치 부처님께서 “신사결(身邪結) · 계도결(戒盜結) · 의결(疑結)의 3결(結)을 끊고 음(婬)ㆍ진(瞋)ㆍ치(癡)가 엷어지게 된 것을 사다함(斯陀含)이라 한다”고 말씀한 것과 같으니,
만약 그대가 “엷은 것이라 한다면 이는 마땅히 끊어내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까닭에 무생법인을 얻은 때에는 번뇌가 끊어졌으며, 부처를 이루셨을 때에는 번뇌의 습기가 끊어진 것이다”고 한다면 이는 곧 진실한 설명이 될 것이다.
▶經. “復次 舍利弗!菩薩摩訶薩欲上菩薩位 當學般若波羅蜜!”
▷經.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보살위(菩薩位)에 오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菩薩位”者 無生法忍是。得此法忍 觀一切世閒空 心無所著 住諸法實相中 不復染世閒。
▷論. 보살의 지위라 함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이 바로 그것이라.
이 무생법인을 얻으면 일체 세간이 공(空)함을 관하게 되며,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제법의 실상(實相)에 머물러서 다시는 세간에 물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復次 般舟般三昧是菩薩位。得是般舟般三昧 悉見現在十方諸佛 從諸佛聞法 斷諸疑網 是時菩薩心不動搖 是名菩薩位。
또한 모든 의심이 끊어진 반주반삼매(般舟般三昧)가 바로 보살의 지위이니,
이 반주반삼매를 얻으면 현재 계신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두 뵙게 되고,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는 모든 의심의 그물이 끊어지게 되며, 이 때에는 보살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니, 이를 바로 보살위(菩薩位)라 하는 것이다.
復次 菩薩位者 具足六波羅蜜 生方便智 於諸法實相亦不住,
自知自證 不隨他語 若魔作佛形來 心亦不惑。
또한 보살위(菩薩位)라 함이란,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방편의 지혜= 방편지(方便智)가 생겨나게 되며, 제법의 실상이 있다는 것에도 역시 머무르지 않으며, 스스로 알고 스스로 증득하여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설령 악마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올지라도 역시 마음이 미혹되지 않는 것이다.
復次 入菩薩法位力故 得名阿鞞跋致菩薩。
또한 보살로서의 법과 지위의 힘에 들어간 때문에 아비발치보살(阿鞞跋致菩薩, Avaivart, 불퇴 보리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復次 菩薩摩訶薩入是法位中 不復墮凡夫數 名爲得道人, 一切世閒事欲壞其心 不能令動, 閉三惡趣門, 墮諸菩薩數中 初生菩薩家 智慧淸淨成熟。
또한 보살마하살이 이 법위(法位)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는 범부의 범주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불퇴이므로) 도를 얻은 사람= 득도인(得道人)이라고 하나니,
일체 세간의 일이 그의 마음을 파괴하고자 하여도 동요하게 할 수 조차 없으며,
삼악취(三惡趣)의 문이 닫히며, 모든 보살의 범주에 들어가게 됨에, 처음으로 보살의 집안에 태어나며, 지혜가 청정하게 성숙되는 것이다.
復次 住頂不墮 是名菩薩法位。如「學品中」說, “上位菩薩不墮惡趣 不生下賤家 不墮聲 聞辟支佛地 亦不從頂墮"
또한 정상(頂上)에 머물러 떨어지지 않으므로 (세제일법世第一法에 머물러 삼악취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를 보살의 법위= 보살법위(菩薩法位)라 하나니,
마치 학품(學品) 중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상위(上位)보살은 악취에 떨어지지도 않고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도 않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도 떨어지지 않고 또한 정상(頂上)에서도 떨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問曰; 云何爲“頂墮”?
묻나니, 어떠함을 꼭대기=정(頂)에서 떨어지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如須菩提語舍利弗, “若菩薩摩訶薩 無方便心 行六波羅蜜 入空 無相 無作中 不能上菩薩位 亦不墮聲聞 辟支佛地, 愛著諸功德法 於五衆 無常 苦 空 無我 取相心著 言是道 是非道 是應行 是不應行, 如是等取相分別 是菩薩頂墮"
답하나니, 마치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만약 보살마하살이 방편심(方便心)없이 육바라밀을 행하면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 가운데에 들어간다 하여도 보살의 지위에 오를 수 없으나,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도 떨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공덕의 법에 애착하고,
5중(衆, 오온)이 무상하고, 고(苦) 공(空) 무아(無我)의 상(相)을 취하고 마음으로 집착하면서 “이것은 도(道)요 이것은 도(道)가 아니며, 이것은 행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고 말하면서 상(相)을 취하고 분별한다면,
이러함이 곧 보살이 정(頂)에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何等是“住頂”?如上所說諸法愛斷 於愛斷法亦復不取 如「住頂義」中說:
그렇다면, 무엇이 꼭대기에 머무르는 주정(住頂) 인가?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법에 대한 애착을 끊고, 애착이 끊어진 법 또한 취하지 않는 것이니, 주정의(住頂義)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다.
“若菩薩摩訶薩 行般若波羅蜜時 內空中不見外空 外空中不見內空 外空中不見內外空 內外空中不見外空, 乃至 無法有法空亦如是。”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육입이 공한 내공(內空)에서는 육경이 공한 외공(外空)을 보지 않으며,
육경이 공한 외공에서는 육입이 공한 내공을 보지 않으며,
외공에서는 내외공(內外空, 18계)을 보지 않으며, 내외공에서는 외공을 보지 않으니,
나아가 무법(無法) 유법(有法)이 공(空)함에 대하여서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復次 上位菩薩得無等等心 亦不自高 知心相眞空 諸有無等戲論滅。
또 상위의 보살(7지 이상의 보살)은 등등함이 없는 무등등심(無等等心)을 얻었음에, 역시 스스로 높은 체(거만함)하지 않고 心相(심상)이 진실로 공한 것임을 알아, 모든 있고 없는 등의 쓸모없는 희론이 다 소멸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