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7권 2
大智度論釋初品中 大慈大悲義 第四十二 卷二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2. 초품 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풀이함 2
問曰; 禪定等諸餘功德 人不知故 不名爲大,
智慧說法等 能令人得道, 何以不稱言大?
묻나니, 선정(禪定)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공덕은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대(大)라 이름붙이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지혜와 설법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대(大)라고 칭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佛智慧所能 無有遍知者, 大慈大悲故 世世不惜身命 捨禪定樂 捄護衆生 人皆知之。於佛智慧 可比類知 不能了了知 慈悲心眼見 耳聞 處處變化大師子吼 是故可知。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지혜로 능히 하실 수 있는 것을 두루 알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마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고,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을 구호하셨으니,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알지만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서는 견주어서 유사하게 알 수 있으되 분명히는 알지 못하고,
자비로운 마음과 곳곳에서 변화하며 큰 사자후(師子吼)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으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復次 佛智慧細妙 諸菩薩 舍利弗等 尚不能知 何況餘人!
慈悲相 可眼見 耳聞故 人能信受, 智慧深妙 不可測知。
또한 부처님의 지혜는 미세하고 묘하여, 모든 보살이나 사리불 등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겠는가!
자비상(慈悲相)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지만, 지혜는 깊고 오묘하므로 헤아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復次 是大慈 大悲 一切衆生所愛樂, 譬如美藥 人所樂服。
智慧如服苦藥 人多不樂, 人多樂故 稱慈悲爲大。
또한 이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일체 중생들이 사랑하고 즐기는 바이라.
마치 달콤한 약은 사람들이 먹기 좋아하지만 지혜는 마치 쓴 약을 먹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대개의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자비(慈悲)를 일컬어서 대(大)라 하게 된 것이며,
復次 智慧者, 得道人乃能信受, 大慈悲相 一切雜類皆能生信。
如見像 若聞說 皆能信受 多所饒益故 名爲大慈大悲。
또한 지혜라 하면 도를 얻은 사람이라면 능히 비로소 믿고 받을 수 있지만,
대자비(大慈悲)의 상(相)은 일체의 온갖 부류의 중생 모두가 능히 믿음을 내게 하는 것이라.
마치 형상을 보고 그 설하는 것을 들으면 능히 믿고 받아 들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그 요익됨이 많기 때문에 대자대비(大慈大悲)라 하는 것이며,
復次 大智慧名捨相 遠離相 大慈大悲 爲憐愍利益相。
是憐愍利益法 一切衆生所愛樂 以是故名爲大。
또한 대지혜(大智慧)는 버림의 사상(捨相)과 멀리 여윔의 원리상(遠離相)이라 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는 가엾고 안쓰럽게 여기면서 이익되게 하는 연민이익상(憐愍利益相)이라 하나니,
이 가엾이 여기고 이익되게 하는 법은 일체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이니,
이러한 때문에 대(大)라 하는 것이며,
是大慈 大悲如『持心經』中說, 大慈大悲 有三十二種 於衆生中行。
是大慈大悲 攝 相 緣 如四無量心說。
이 대자대비에 대하여 마치 『지심경(持心經)』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에는 32종이 있으며, 중생들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이 대자대비의 거두어 들이는 섭(攝)과 상(相)과 대상 또는 조건의 (緣)에 대해서는 사무량심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復次 佛大慈大悲 等功德 不應一切 如迦旃延法中 分別求其相。
上諸論議師 雖用迦旃延法 分別顯示 不應盡信受。所以者何,
迦旃延說, “大慈大悲 一切智慧 是有漏法 繫法 世閒法" 是事不爾。
何以故, 大慈大悲 名爲一切佛法之根本 云何言, “是有漏法 繫法 世閒法”?
또한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 등의 공덕은 마치 가전연(迦栴延, 가전연니자迦旃延尼子, 나형외도裸形外道)의 법(협장匧藏)에서처럼 분별하여 그 상(相)모양을 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위의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이 비록 가전연의 법을 이용하며 분별하고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으나, 이를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가전연은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일체 지혜를 말하면서 “이것은 유루(有漏)의 법이고 매이게 하는 계법(繫法)이며 세간법(世閒法)”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왜냐하면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일체 부처님 법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유루법(有漏法)이고 계법(繫法)이고 세간법(世閒法)이라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1세기경에 가전연니자에 의해 불교를 힌두교의 한 지파로 흡수하려한 것에 대한 강한 부정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問曰; 大慈悲雖是佛法根本 故是有漏, 如淤泥中生蓮華 不得言泥亦應妙,
大慈大悲亦如是 雖是佛法根本 不應是無漏!
묻나니,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비록 부처님의 불법(佛法)의 근본이라 하여도 이는 유루(有漏)입니다.
마치 진흙의 진창 속에서 연꽃이 핀다하여 그 진창까지도 역시 묘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도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 비록 그것이 불법(佛法)의 근본이라 하나, 이는 무루(無漏)가 아닌 것입니다.
答曰; 菩薩未得佛時大慈悲 若言有漏 其失猶可,
今佛得無㝵解脫智故 一切諸法皆淸淨 一切煩惱及習盡。
답하나니, 만약 보살로서 아직 부처를 얻지 않았을 때의 대자비(大慈悲)를 유루라 한다면 당연히 그 허물을 인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부처님으로서 무애해탈(無礙解脫)의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와 습기가 다하시어 일체 제법에 대하여 모두 청정하신 것이다.
聲聞辟支佛 不得無㝵解脫智故 煩惱習不盡 處處中疑不斷故 心應有漏,
諸佛無是事 何以故 說佛大慈悲 應是有漏?
성문이나 벽지불은 무애해탈(無礙解脫)의 지혜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번뇌와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며, 곳곳에서 의심이 다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은 마땅히 유루(有漏)이지만
모든 부처님은 그러하지 않으니, 어떻게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를 유루(有漏)라 말할 수 있겠는가.
問曰; 我不敢不敬佛 以慈悲心 爲衆生故生 應是有漏。
묻나니, 제가 감히 부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만, 부처님께서는 자비심(慈悲心)으로 중생을 위하고자 하기 때문에 대자비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마땅히 유루(有漏)가 되는 것입니다.
答曰; 諸佛力勢 不可思議 諸聲聞 辟支佛 不能離衆生想 而生慈悲 諸佛能離衆生想 而生慈悲。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힘과 그 힘이 미치는 기세도 불가사의한 것이라.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이란 생각을 여의지 못한 채 자비심을 내지만,
모든 부처님은 중생이라는 중생상(衆生想)을 떠나서 자비심을 내시는 것이다.
자비(慈悲)는 삼매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所以者何?如諸阿羅漢 辟支佛 十方衆生相不可得 而取衆生相生慈悲,
今諸佛 十方求衆生不可得 亦不取衆生相 而能生慈悲。
如『無盡意經』中說 有三種慈悲, 衆生緣 法緣 無緣。
왜냐하면,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시방의 중생에 대하여 중생이라는 중생상(衆生想)이란 얻을 수 없는 것인데도 중생상(衆生想)을 취하면서 자비를 내지만,
지금 모든 부처님은 시방으로 중생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중생상(衆生想)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능히 자비를 내시기 때문이니,
마치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세 가지의 자비가 있으니,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법연자비(法緣慈悲) 무연자비(無緣慈悲)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①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중생의 개별적인 모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생각하여 베푸는 자비로서 범부나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이가 행하는 자비이다.
② 법연자비(法緣慈悲)= 일체제법(一切諸法)이 5온(五蘊)의 화합하여 생겨난 공(空)한 것임을 깨닫고 베푸는 자비로 번뇌가 끊어진 성자(聖者)가 일으키는 자비이다.
③ 무연자비(無緣慈悲)=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읜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제법의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깨달은 큰 보살과 부처가 행하는 자비이므로 대자대비라고 한다.- 다움
復次 一切衆生中 唯佛盡行不誑法, 若佛於衆生中 取相而行慈悲心 不名行不誑法。何以故, 衆生畢竟 不可得故。
또한 일체 중생 가운데서 오직 부처님만이 속이지 않는 불광법(不誑法)을 행하시나니, 만약 부처님께서 중생들에 대하여 중생상(衆生想)을 취하면서 자비심을 행하시는 것이라면 불광법(不誑法)을 행하신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필경에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聲聞 辟支佛 不名爲盡行不誑法, 故聲聞辟支佛 於衆生 於法, 若取相 若不取相, 不應難 不悉行不誑法故。
성문이나 벽지불은 속이지 않는 불광법(不誑法)을 모두 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나니, 성문이나 벽지불은 중생에 대해서나 법에 대해서 혹은 상(相)을 취하거나 혹은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며, 불광법(不誑法)을 다하여 마땅히 행함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一切智能斷一切諸漏 能從一切有漏法中出 能作無漏因緣 是法云何自是有漏?
일체지(一切智)로써 온갖 번뇌의 누(漏)를 능히 끊었고, 일체의 유루법(有漏法)에서 능히 벗어났으며, 무루의 인연을 능히 짓기도 하는, 이러한 법을 어찌 스스로 유루(有漏)이라 하겠는가!
問曰; 無漏智各各有所緣 無有能悉緣一切法者, 唯有世俗智能緣一切法。
以是故 說一切智是有漏相。
묻나니, 무루(無漏)의 지혜는 저마다 각각의 반연할 바의 소연(所緣)이 있어서 일체법 모두에 반연하는 소연(所緣)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나,
오직 세속지(世俗智)만이 일체법을 반연하나니, 이 때문에 “일체 지혜가 이렇게 유루상(有漏相)이다”고 한 것입니다.
答曰; 汝法中有是說 非佛法中所說。如人自持斗入市 不與官斗相應 無人用者, 汝亦如是 自用汝法 不與佛法相應 無人用者。斗두= 용량(容量)의 단위. 1斗는 10升. 1말[斗]을 되는 용기. 용량을 되는 용기의 총칭.
답하나니, 그대의 법(가르침)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불법(佛法)에서는 말하지 않으니, 마치 사람이 스스로가 만든 두(斗, 됫박, 되박)을 가지고 저자로 들어가서 관청에서 정한 두(斗, 됫박, 되박)에 맞지 않으면 이용하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것처럼, 그대 역시 그와 같이 스스로의 법을 스스로는 쓸 수 있지만 부처님의 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므로 사용할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無漏智慧 何以故, 不能緣一切法?有漏智是假名虛誑 勢力少故 不應眞實緣一切法。汝法中自說能緣一切法!
무루(無漏)의 지혜가 왜 일체법에 반연하지 않는 것인가?
유루(有漏)의 지혜는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과 같이 거짓된 것이며, 그 세력이 적기 때문에 진실로 일체법을 반연하지 못하는 것인데도, 그대의 법에서는 스스로 일체법을 반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復次 是聲聞法中十智 摩訶衍法中有十一智 名爲“如實相智”。
是十智入是如實智中 都爲一智 所謂無漏智, 如十方水入大海水中 都爲一味。
또한 이러한 성문의 법에는 십지(十智)가 있고, 마하연(대승)의 법에서는 십일지(十一智)가 있어, 여실지(如實智)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성문의 십지(十智)가 여실지로 통합되어서 하나의 지혜가 되나니, 이른바 새지 않는 지혜의 무루지(無漏智)이다. 이는 마치 시방의 강물이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되면 전부 하나의 맛으로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是大慈大悲 佛三昧王三昧 師子遊戲三昧所攝。如是略說大慈 大悲義。
이 대자대비는 부처님의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와 사자유희삼매(師子遊戱三昧)를 감싸들이는 것이라.
이와 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