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지식

번뇌[煩惱]란!!!???

Skunky 2021. 6. 5. 15:12

번뇌란???!!!

生死 涅槃 相共和라! 번뇌가 곧 보리고, 번뇌가 곧 지혜입니다. 

 

* 다음 국어 사전; 번뇌 [煩惱] 명사

  • 1.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움
  • 2.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하다

(1)[불교]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욕망이나 분노 따위의 모든 망념(妄念)을 이르는 말.

  • 해탈을 하려면 온갖 번뇌를 끊어야 해. 유의어; 계박1(繫縛)(2), 누4(漏)(3), 염오2(染汚)(2), 진구1(塵垢...

(2)(기본의미)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움. 또는 그런 괴로움.

  • 사랑이 큰 만큼 번뇌도 크다. 유의어 고뇌(苦惱),번민1(煩悶}

* 한국민족 대백과 사전

번뇌= 중생의 심신을 혼돈시키고 불교의 이상을 방해하는 장애를 의미하는 불교교리.

 

‘혹(惑)·진로(塵勞)·염(染)’ 등이라고도 한다. 중생은 사물을 대할 때에 그것을 욕심내어 소유하려 하고, 본능으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음을 애태우게 되며, 경쟁하고 싸움하고 심지어는 살생까지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복잡한 과정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지 못하여 생겨나는 정신적인 모순 모두를 번뇌라고 한다.

그러나 번뇌의 정체를 확실히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크고 작은 것을 물을 것 없이, 큰 문제는 큰 번뇌를 일으키고 작은 문제는 작은 번뇌를 일으켜서 인생 전체를 번뇌 속으로 빠뜨린다. 따라서, 삶이 곧 번뇌요 번뇌가 곧 삶이라는 논리까지 전개되었다. 따라서, 번뇌의 깊은 뿌리를 근원적으로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것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참다운 길이며, 그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법문은 이 번뇌를 다스리는 교훈이며, 번뇌가 다할 때 거기에는 해탈이 있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번뇌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말에 ‘수면(隨眠)’이 있다. 번뇌는 주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마음 속에 사악한 성격과 성벽(性癖)으로 잠재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표면화되기 때문에 마음을 뒤따르며 잠자고 있다는 뜻으로 ‘수면’이라 한다. 또한 잠재적인 경우와 구별하여 표면에 나타나는 번뇌를 전(纏)이라 하였다.

십이연기(十二緣起)의 12지(支)는 혹(惑)·업(業)·고(苦)의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혹이 곧 번뇌이며, 무명(無明)과 애(愛)와 취(取)의 3지가 있다. 이와 같은 번뇌가 바탕이 되어 노사(老死)의 고(苦)가 생긴다는 것이 십이연기의 해석이다. 이와 같이 마음 속에 있는 아집을 중심으로 하는 그릇된 생각이나 성격을 모두 번뇌라 한다.

이 번뇌의 분류법은 약 20여 가지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은 이혹설(二惑說)과 이번뇌설(二煩惱說)이다.

2혹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이다. 견혹은 이론적이고 지적인 미혹이며, 주로 후천적인 것으로서 바른 이론을 듣고 잘 이해하기만 하면 즉시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사(利使:날카로운 번뇌)라고 한다.

수혹은 사혹(思惑)이라고도 하는데, 습관적이고 정의적(情意的)인 미혹으로서 선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따라서 그릇되어 있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좀처럼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습관과 성벽에 의한 끈질긴 미혹으로서 오랫동안의 수행 노력에 의해 점차 조금씩 제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둔사(鈍使:그 성질이 둔한 번뇌)라고 한다.

또, 2번뇌는 근본번뇌(根本煩惱)와 수번뇌(隨煩惱)로 분류되는데 이를 다시 세분하면 [표]와 같다.

이들 각 번뇌가 갖는 뜻은 다음과 같다.

① 탐(貪=貪欲)은 애(愛)와 동의어이다. 욕계의 탐욕을 색탐(色貪), 무색계의 탐욕을 무색탐이라 하며 이 두 가지를 유애(有愛)라고 한다. 탐욕은 바람직스러운 대상에 대한 애착이다.

② 진(瞋=瞋恚, 성냄)은 바람직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반발·거부·배척이다. 소수번뇌(小隨煩惱)에서 설해지는 분(忿)·한(恨)·해(害) 등은 진에의 부류에 속한다. 분은 심한 분노이고, 한은 진에가 마음속에 생겨 계속되는 원한이며, 해는 진에가 행동화되어 타인을 가해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③ 만(慢)이란 스스로를 높이고 타인을 멸시하는 자기중심적인 심정이다. 이 만은 다시 3만·7만·9만 등으로 분류된다. 이 만과 비슷한 소수번뇌로는 교(憍)가 있다. 가문·재산·지위·권세·건강·지식·미모·능력·성장 등에 대한 교만이다. 그러나 근본번뇌의 만은 타인과 비교하여 생기는 교만인 데 비해 수번뇌의 교는 비교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단순히 교만하다는 점이 다르다.

④ 무명(無明)은 우치이며 가장 근본인 번뇌이다. 이는 자기 중심으로 인해 공평, 정확한 진실된 지견(知見)이 없는 것이다. 아집에 의한 삿된 분별성이 무명이며, 삿된 마음가짐이 무명의 몸이다. 일체의 사악과 번뇌의 근원이 무명에 있다.

⑤ 견(見)은 일체의 사악한 견해로서 넓게는 62견으로, 종합적으로는 5견으로 분류된다.

5견의 첫째인 신견(身見)은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이것을 자아 또는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실체적인 견해이다.

둘째의 변견(邊見)은 세상의 현상에 대해 극단적인 그릇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며, 또 고락(苦樂)을 변견이라고도 한다.

셋째의 사견(邪見)은 선악도 업보도 삼세인과(三世因果)도 인정하지 않는 그릇된 견해이다. 이것은 인과와 인연을 설하는 부처의 교법(敎法)과 수행에 의해 깨침을 얻은 부처와 승보(僧寶)를 인정하지 않는 삼보(三寶) 부정의 견해이기도 하고 인과를 부정하는 사견이기도 하다. 이는 결코 불교의 가르침에 들어갈 수 없는 가장 나쁜 번뇌로 지목된다.

넷째의 견취(見取)는 자기 중심의 악견으로서, 자기의 설은 절대 확실한 진리이고 다른 설은 모두 그릇된 것이라는 견해이다.

다섯째의 계금취(戒禁取)는 외도(外道)가 해탈과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서원을 일으켜서 지키는 그릇된 계율과 고행 등으로, 이것으로는 결코 해탈과 천상에 태어나는 일을 바랄 수 없는 그릇된 견해이다.

⑥ 의(疑)는 삼보, 선악업보, 삼세의 인과, 사제(四諦)와 연기(緣起) 등의 도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인색한 것을 간(慳), 마음 속에 부끄럽지 않은 것을 무참(無慚), 외부사회에 부끄럽지 않은 것을 무괴(無愧)라고 하며,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을 혼침(惛沈), 반대로 마음이 들떠서 침착하지 않은 것을 도거(掉擧)라고 한다.

또, 정진의 반대인 해태(懈怠)는 이상을 향해 노력하지 않는 것 또는 이상에 어긋나는 일에 힘쓰는 것이며, 방일(放逸)은 방자하여 규칙을 무시한 생각과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번뇌는 성스러운 도를 방해하는 것이며, 바른 지혜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에 의해 번뇌를 단제(斷除:끊어버림)하게 되는데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법에 맞는 이상적인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하며, 거기에서 이상적인 지혜의 활동이 잠재적으로나 표면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리(菩提)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백과

불교는 삶의 양태를 고로 파악하고 모든 번뇌를 끊음으로써 괴로움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며, 생사의 세계가 그 자체로서 열반이라고 본다.
번뇌에 대한 교리적 연구는 부파불교와 유식학파를 거치면서 체계화되었는데, 그 작용의 형태에 따라 수면·전·개·결·박·루·취·계·사·구·폭류·객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근본번뇌는 모든 번뇌의 체가 되는 근원적인 번뇌로서 본혹이나 근본혹이라고 한다. 근본번뇌에는 탐·진·치·만·의·견의 6번뇌가 있다. 이 중 탐·진·치 3가지는 모든 악업을 낳는 근본이므로 삼독·삼불선근·삼박 등으로 불린다. 수번뇌는 근본번뇌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수혹 또는 지말혹, 지말번뇌라고도 한다.

 

혹(惑)·염(染)·결박(結縛)·진로(塵勞)라고도 한다.

중생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기의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괴로움과 즐거움의 상태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됨으로써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업을 짓게 되고 그에 대한 과보로서 나고 죽는 괴로움의 세계를 윤회하게 되는 과정을 혹(惑)·업(業)·고(苦)의 삼도(三道)라고 한다. 불교는 이러한 삶의 양태를 고(苦)로 파악하고 모든 번뇌를 끊음으로써 괴로움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煩惱卽菩提]이며, 생사의 세계가 그 자체로서 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본다. 즉 미혹에만 얽매인 중생에게는 미망(迷妄)의 근원인 번뇌와, 열반에 이르는 깨달음이 상대적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번뇌와 깨달음이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번뇌에 대한 교리적 연구는 부파불교(部派佛敎)와 유식학파(唯識學派)를 거치면서 체계화되었다.

번뇌는 그 작용의 형태에 따라 수면(隨眠)·전(纏)·개(蓋)·결(結)·박(縛)·루(漏)·취(取)·계(繫)·사(使)·구(垢)·폭류(暴流)·객진(客塵)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번뇌를 곧 수면이라고 했다. 또한 번뇌의 잠재적인 상태를 수면이라 하고, 표면에서 활동하는 상태를 전(纏)이라고 한다.

수면의 종류에는 98가지가 있다고 보고 여기에 10가지의 전을 합한 것이 108번뇌이다. 이러한 번뇌의 분류방법은 수십 종에 달하지만, 일반적으로 근본번뇌(根本煩惱)와 수번뇌(隨煩惱),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으로 나뉜다.

근본번뇌는 모든 번뇌의 체(體)가 되는 근원적인 번뇌로서 본혹(本惑)이나 근본혹(根本惑)이라고 한다.

근본번뇌에는 탐(貪:욕심)·진(瞋:성냄)·치(癡:어리석음)·만(慢:거만)·의(疑:의심)·견(見:삿된 소견)의 6번뇌가 있다. 이 중 견을 유신견(有身見: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변집견(邊執見:편벽된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사견(邪見:인과의 이치를 부정하는 견해)·견취견(見取見:잘못된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견해)·계금취견(戒禁取見:잘못된 계율이나 禁制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집착하는 견해)의 5견으로 나누어 앞의 탐 등의 5번뇌와 합하여 10번뇌, 10수면(十隨眠) 또는 10사(十使)라고 한다.

이 중 탐·진·치 3가지는 모든 악업을 낳는 근본이므로 삼독(三毒)·삼불선근(三不善根)·삼박(三縛) 등으로 불린다.

탐은 자기가 애착하는 대상을 얻고자 하는 욕심,

진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에 대한 거부와 배척,

치는 곧 무명(無明)으로서 아집에 얽매인 삿된 분별을 말한다.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는 10번뇌 가운데 말나식(末那識:자아의식)에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게 되는 번뇌를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4혹(四惑)이라고 했다.

① 아치는 자아의 실상(實相)에 무지하여 무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

② 아견은 자기의 심신이 5온(五蘊)이 화합하여 연기(緣起)한 것임을 망각하고 실체라고 집착하는 것,

③ 아만은 자아에 집착하여 거만한 마음을 갖는 것,

④ 아애는 자아에 대한 애착을 말한다.

수번뇌는 근본번뇌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수혹(隨惑) 또는 지말혹(枝末惑),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도 한다.

수번뇌를 마음에 따르는 작용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보다 세분화된 근본번뇌를 가리키기도 한다. 수번뇌는 다시 대·중·소의 수번뇌로 구분되는데,

① 대수번뇌(大隨煩惱)에는 방일(放逸:방자하여 계율을 무시하는 것)·해태(懈怠:善에 대해 소극적인 것과 악에 대해 적극적인 것)·불신(不信:마음을 더럽혀 진리를 믿지 않는 것)·혼침(遞粒:마음이 우울해지는 것)·도거(掉擧:마음이 들떠서 침착하지 않은 것)·실념(失念:불확실한 기억력)·산란(散亂:대상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것)·부정지(不正知:대상에 대한 바른 知見을 방해하는 것),

② 중수번뇌(中隨煩惱)에는 무참(無徵:스스로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을 내지 않는 것)·무괴(無愧:타인에 대하여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

③ 소수번뇌(小隨煩惱)에는 분(忿:분노)·간(址:인색함)·복(覆:자기의 죄업을 숨기는 것)·질(嫉:질투)·뇌(惱:죄악에 집착하는 것)·해(害:생명체를 危害하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한(恨:분노의 대상에 집착하여 원한을 품는 것)·광(鍾:거짓된 마음)·첨(諂:왜곡되고 위선된 마음)·교(鼎:스스로에게 교만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번뇌의 단진(斷盡)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서 보는 관점에서는 수혹(修惑)과 견혹(見惑),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등의 구분이 있다.

수혹은 10번뇌 중의 탐·진·치·만·의와 같이 정의적(情意的)인 번뇌로서 오랜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만 끊을 수 있으며, 견혹은 삿된 소견이나 무지(無知)에서 생기는 이론적이고 지적인 번뇌로서 올바른 견해가 서면 곧 제거되는 것을 말한다. 또 아집(我執:자아에 대한 집착)에 의해 중생이 생사의 세계에 유전하게 되어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번뇌를 번뇌장이라 하고, 법집(法執:존재 또는 敎法에 대한 집착)에 의해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번뇌를 소지장이라 한다.

 

카페 명상상담-목우선원의 글입니다

비판불교의 비판, 대승경전에서의 해명 ​ 번뇌와 불성

번뇌와 불성

불성은 붓다의 깨달음이고 동시에 중생의 본성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불성은 어떤 모습인가? 또 번뇌와 어떤 관계인가? 이점을 『열반경』에서는 자기 내면에 깨닫는 지혜의 힘이 있지만, 번뇌에 휘말리고 불성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나(我)’란 곧 여래장(如來藏)이란 뜻이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셀 수 없는 번뇌에 뒤덮여 있는 까닭에 능히 보지 못한다. 『大般涅槃經』, 앞의 책, p.407b.

(......) 선남자여. 여래께서는 좋은 의사처럼 번뇌의 본질[體]과 증상[相]을 잘 알아서 제거하여 치료하여 준다. 그럼으로써 비밀스런 여래장의 청정한 불성이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위의 책, p.410c.

『열반경』에 의거하면 부처는 불성이고 여래장이다. 부처는 중생의 내면에 존재한다. 귀의처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자신의 몸속에 광맥 같은 불성을 보지 못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세월 번뇌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로 여래는 좋은 의사처럼 번뇌와 그 증상을 ‘치유’한다. 그러면 셋째로 청정한 불성이 항상 변하지 않고 (내면에) 머물러 있음을 ‘자각’한다.

이점은 외형적으로 보면, 무아와 무상을 중시하는 초기불교적 관점과 갈등적 요소가 된다. 자아의 없음과 있음, 법의 무상과 항상성, 번뇌의 고통과 청정함,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대조되는 이런 모순적 갈등은 붓다시대 이후 해결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a. 지혜로운 이는 결코 ‘일체는 무상(無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의 몸[我身]에는 곧 불성의 종자(種子)가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 p.410c.

b. 중생은 항상 번뇌로 뒤덮여 있기에 불성을 볼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부처)는 중생에게 무아(無我)를 설한다. 만약에 완전한 열반의 미묘한 경전[涅槃經]을 듣는다면, 일체의 한량없는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런 까닭에 대열반을 설하고 이름하여 여래의 비밀스런 장소[如來藏]이라고 한다. 같은 책, p.411.

c. 선남자여. 금일 여래께서 설하신 ‘참된 나[眞我]’란 ‘불성’을 이름한다. 같은 책, p..412.

d. 본래 있음[本有]이란 내가 옛날에 무상(無常), 무아(無我), 무락(無樂), 무정(無淨)이 있다고 함이고, 그런 까닭에 무상, 무아, 무락, 무정에는 최상의 진실한 깨달음이 현재에 없는 것이다. 본래 없다[本無]고 함은 본래 불성을 보지 못함이고, 불성을 보지 못함으로 인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책, p.465.

이것을 요약하면 첫째(a)로 중생에게는 불성/여래장이 있다. 그런데 둘째(b)는 중생은 번뇌로 뒤덮혀 있어서 자기 내면의 불성을 보지 못한다. 셋째(c)로 불성이 여래장이고 이것이 바로 ‘참된 나[眞我]’이다.

넷째(d)로 예전 처음(초기불교)에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를 설했는데, 여기에는 최상의 깨달음이 없다. 그것은 불성을 보지 못하기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아마도 무상/고/무아의 초기불교적 전통에 익숙한 독자는 불성의 ‘상락아정’이란 교설에 상당하게 혼란함을 느낄 수가 있다.

여기서 보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열반경』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무상/고/무아는 최상의 깨달음이 아니다. 그들은 대승의 불성을 모르고 상락아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무상/고/무아는 스트레스와 같은 번뇌를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맞다. 그러나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스트레스가 감소 되고 치유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체로 영적인 해탈이고 궁극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열반경』에 따르면, ‘예전’에 무상/무아를 설한 것은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나야 하니까 그곳에는 ‘나가 없고’, ‘모든 것은 변하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무상이고 무아의 번뇌에서 벗어나면 혼침이나 무기(無記)에 떨어지지 말고, 한 걸음 더 다음 단계로 궁극의 ‘불성’에로 진입하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지평이 눈앞에 열린다. ‘모든 것은 변한다[無常]’는 가르침은 ‘변화하지 않는 진실함[常]’이며, 지독한 ‘고통[苦]’은 사실 그 내면을 보면 지극한 고요의 ‘행복함[樂]’이 있으며, ‘내가 없음[無我]’의 허무주의는 거짓된 자아로서 ‘참된 나[眞我]’가 아니고, 세상은 물들고 더럽지만[染], 진흙탕의 연꽃처럼 사실은 물들지 않는 청정함[淨]이 있다.

이것은 철학적 교설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 심리학에 가깝다. 대지와 같은 굳건하고 든든한 안정감[]이고, 미소가 나오는 행복감[]이며, 참되고 진실한 자기[眞我]와의 만남이고, 인생의 갖은 고통을 온전히 수용하는 청정함[]은 명상수행에서 만나는 직접적인 깨달음의 체험들이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무상/고/무아와는 다른 관점의 대전환이다. 초기불교는 고통받는 중생을 향한 가르침이라면, 대승경전은 깨달음의 관점에서 설해진 가르침이다. 무상/무아는 번뇌에 대한 제거를 목표로 진행된다면, 상락아정은 내적 긍정성의 불성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중시한다. 심리학에 비유하자면 초기불교는 증상의 심리학이라면, 대승불교는 깨달음의 심리학인 것이다.

불성의 깨달음이면 그곳엔 번뇌가 없고, 반대로 고통의 번뇌라면 그곳엔 깨달음의 불성이 없다. 그러면 양자는 타협이 없는 평행선 이론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양립할 수 없을까? 마음의 그림자와 빛처럼, 하나인 동전의 양면처럼, 이들은 장단점이 있기에 통합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여기에 일단의 집단이 있다고 하자. 이 집단에 무상/고/무아의 증상을 말하고 점진적으로 실천하게 함이 효과적일까? 아니면 대승불교의 불성/여래장에 근거하여 직접적으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곧장 체험하게 하는 것이 도움을 줄까? 아마도 이런 두 종류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양자를 각각의 집단에 실험하는 현장연구가 진행된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우열비교가 아니라 인연에 따른 양자의 유용성을 확보하고 통합하는 작업이 된다.

『열반경』은 번뇌와 불성의 관계에서, 불성이 번뇌에 감추어져 있기에 중생은 불성의 상락아정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점에 대해서 동북아시아 선종은 논쟁해온 역사가 있다. 첫째는 현실의 번뇌를 인정하여 문득 번뇌의 구름이 걷히면 맑은 하늘에 달빛이 드러나듯이, 번뇌로부터 통찰적 명상수행과 함께 상락아정이란 불성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점수(漸修)의 길이다.

두 번째로 다른 하나는 번뇌의 주변을 서성이지 않고 곧장 본래의 성품인 상락아정으로 직입하여 들어간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번뇌란 인연의 결과로서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기에 번뇌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고, 긍정인 상락아정의 불성에 곧장 계합하는 직관의 길을 선택한다. 이것은 돈오(頓悟)의 길이다.

돈오와 점수 혹은 초기불교냐 대승불교냐? 어느 길을 택하든지, 관계없이 먼저 우리는 화두로서 ‘무엇이 진정한 나[眞我]인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장애 속에서 동력을 상실할 위험이 크기에, 강력한 참구의 전투력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때 어떤 사람에게는 즉각적으로 내면에서 상락아정의 본성을 만나게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점진적으로 상락아정의 기쁨을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수행의 관점에서 초기불교의 교설과 대승불교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통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또 다른 통합방식은 교학적 입장으로 『열반경』의 교설에서 암시하듯이, 붓다의 설법에는 시기와 수준의 단계가 있다는 가정이다.

예를 들면 가령 대학의 커리큘럼으로 비유하자면, 제1교시에는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고, 제2교시는 번뇌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공사상을 말하고, 제3교시는 일체가 한마음[眞如/一心]임을 말하고, 제4교시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성과 여래장을 설한다.

이것은 발달론적인 교육적 커리큘럼[敎相判釋]이다. 이것은 일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등장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판별하여 체계화[敎判]시킨, 후대의 해석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일단 이렇게 보면 종파적 성격이 짙지만, 커리큘럼 역시 하나의 통합이다. 모두가 다 찬성할지는 모르겠지만, 있음과 없음, 덧없음과 항상성, 번뇌와 청정성의 논리적인 모순이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시각적 갈등은 수행론이나 혹은 커리큘럼 구성에 의해서 통합되면서 일단 해소가 된다.

물론 역사적 교판/커리큘럼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수행자 개인이 경험하는 내면적 모순과 갈등은 어쩔 수가 없는 개인적 숙제로 남게 된다. 그러나 갈등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논쟁은 새로운 창조적 긴장을 만들고, 현실 속에서 역동성을 부여하는 유용한 측면도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나의 스쳐가는 한 생각, 일념이 항상 번뇌에 기반한, 번뇌 그자체 이었으며, 나를 살피는 오랜 사유와 조심스러운 내면관찰의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