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3권 4
大智度論釋初品中 十想釋論第三十七 卷二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7. 초품 중 십상(十想)의 뜻을 풀이함 4
問曰; 有出入氣 則是我相, 視眴 壽命 心苦樂 愛憎 精懃等是我相。
眴 깜작일 현
묻나니, 숨을 들이쉬고 내쉼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나의 모양인 아상(我相)이며,
눈을 깜박이고 수명을 누리고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성을 다하는 따위가 바로 나의 모양인 아상(我相)입니다.
若無我 誰有是出入息 視眴 壽命心 苦樂 愛憎 精懃等?
當知有我在內動發故。
만약 '나'가 없는 무아(無我)라면, 누가 있어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눈을 깜박이고 수명을 누리며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마땅히 '나'가 안에 있으면서 움직이고 일으키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壽命心亦是我法。若無我 如牛無御。
有我故能制心入法 不爲放逸, 若無我者 誰制御心?
그러므로 수명이나 마음 역시도 '나'의 법(현상과 작용)이라.
만약 '나'가 없는 무아(無我)라면, 마치 소는 있으나 부리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라.
나가 있는 유아(有我)이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제어하고 법에 들어가며 방일하지 않게 된다.
만약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이라면 누가 마음을 제어하는 것입니까?
受苦樂者是我。若無我者 爲如樹木 則不應別苦樂!愛憎 精懃亦如是。
我雖微細 不可以五情知 因是相故 可知爲有。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바로 '나'이며,
만약 무아(無我)라면 마치 수목과 같아서 곧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별하지 못해야 하리니,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 역시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나는 비록 미세하여서 오정(五情, 오근五根, pañca indriya)으로써는 알 수 없다 하여도 이러한 모양의 상(相)이 있기 때문에 유아(有我)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答曰; 是諸相皆是識相。有識 則有入出息 視眴 壽命等, 若識離身則無。
汝等我常遍故 死人亦應有視眴 入出息 壽命等!
답하나니, 이 모든 상(相)은 모두가 의식의 모습인 식상(識相)일 뿐이다.
식(識)”이 있음으로 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눈을 깜박이고 수명을 누리는 것 등이 있지만,
만약 식(識)이 몸을 떠나면 그 모두가 없게 된다.
그대가 말하는 '나(我)'는 항상하고 두루한 것이라면, 죽은 사람 역시도 눈짓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수명 등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復次 出入息等是色法 隨心風力故動發。此是識相 非我相。
또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바로 물질적 현상의 색법(色法, rūpidharma)이라.
마음을 따른 풍대(風大)의 힘인 심풍력(心風力)을 따르기 때문에 움직이고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의식의 모습인 식상(識相)일 뿐, '나'라는 아상(我相)은 아닌 것이다.
壽命是心不相應行 亦是識相。
수명(壽命)은 마음과 업을 지음이 상응하지 않는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cittaviprayuktasaṁskāra)이라, 이 역시도 식상(識相)일 뿐이다.
問曰; 若入無心定中或眠無夢時 息亦出入 有壽命, 何以故言“皆是識相”?
묻나니, 혹은 마음과 마음작용이 완전히 그친 상태의 무심정(無心定, acittakasamāpatti, 멸진정) 중에 들어가거나
혹은 꿈없는 잠에 들었을 때에도 숨은 역시 드나들며 수명도 있거늘,
무엇 때문에 이러한 모두가 의식의 모습인 식상(識相)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날에는 스스로 찾아서 헤아려 아는 “식(識)”을 자율신경계(自律神經系 autonomic nervous system)라고 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答曰; 無心定等 識雖暫無 不久必還生 識不捨身故, 有識時多 無識時少 是故名識相。如人出行 不得言其家無主。
답하나니, 마음작용이 완전히 그친 상태의 무심정(無心定, 멸진정) 등에서는 식(識)이 비록 잠시 동안 없다 하더라도 (비록 잠깐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을지라도),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되돌아와 생기는 것은 식(識)이 몸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스스로 헤아려 아는 식(識)이 있을 때가 많으나, 식(識)이 없을 때가 적은 까닭에 의식의 모습인 식상(識相)이라 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사람이 잠시 집 밖으로 나가 다닌다고 하여 그 집에 주인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苦樂 憎愛 精懃等 是心相應 共緣 隨心行, 心有故便有 心無故便無。
以是故 是識相 非我相。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고락(苦樂), 미워하고 사랑하는 증애(憎愛), 살뜰이 정성을 다하는 정근(精懃) 등은 마음과 상응하면서 인연을 함께하며, 마음의 작용을 따르는 것이니,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곧 있는 것이고 마음이 없으면 곧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이는 의식의 모습인 식상(識相)이요 나라는 아상(我相)이 아닌 것이다.
復次 若有我者 我有二種, 若常 若無常。如說;
또한 만약 나가 있다는 유아(有我)이라면 그 나에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할 것이니,
항상한 것의 상(常)과 항상하지 못한 것의 무상(無常)이다.
마치 게송에서 설함과 같으니;
若我是常 則無後身, 常不生故 亦無解脫。
만약 '나'라 하는 것이 항상한 상(常)이라면,
곧 다시 몸을 받는 후신(後身, punarbhana)은 없을 것이요,
항상한 상(常)이라면, 또한 다시 날 수 없기 때문에 해탈 역시 없으리라.
亦無妄無作 以是故當知, 無作罪福者 亦無有受者。
뿐만 아니라 허망함도 없어야 할 것이요 지음도 없는 무작(無作)이어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응당 알아야 하나니, 죄와 복을 짓는 이도 없을 것이고,
또한 그것을 받는 이도 없어야 할 것이다.
捨我及我所 然後得涅槃, 若實有我者 不應捨我心
나라는 아(我)와 내 것이라는 아소(我所)를 버리면,
그러한 뒤에는 열반을 얻게 될 것이니
만약 진실로 나가 있다는 유아(有我)라 한다면,
'나'라는 마음은 절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若我無常者 則應隨身滅, 如大岸墮水 亦無有罪福。
만약 '나'라는 것이 항상하지 않은 무상(無常)이라면,
곧 몸을 따라 응당 소멸해야 하는 것으로,
마치 큰 언덕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과 같으리니,
이 역시도 죄와 복이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리라.
如是 我及知者 不知者 作者 不作者 如檀波羅蜜中說。
不得是我相故 知一切法中無我, 若知一切法中無我 則不應生我心。
이러함과 같이 나, 아(我)와 아는 지자(知者)와 알지 못하는 불지자(不知者)와 짓는 작자(作者)와 짓지 않는 불작자(不作者)에 대하여 단바라밀(檀波羅密)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러한 아상(我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체법에는 나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알 수 있으며,
만약 일체법이 무아(無我)임을 알게 되면 곧 '아(我)'라는 마음을 당연히 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若無我 亦無我所心 我我所離故 則無有縛, 若無縛 則是涅槃。是故行者應行無我想。
만약 무아(無我)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내 것이라 아소(我所)의 마음을 여의게 되면
나와 내 것이라는 아(我)와 아소(我所)를 여의게 되기 때문에 곧 속박이 없게 되고,
만일 속박이 없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열반이 되는 것이라.(대승大乘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무아상(無我想)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問曰; 是無常苦無我 爲一事?爲三事?若是一事 不應說三。
若是三事 佛何以故說 “無常卽是苦 苦卽是無我”?
묻나니, 이 무상(無常)과 고(苦)와 무아(無我)는 한 가지 입니까?
혹은 별개의 세 가지 입니까?
만약 이 셋이 한 가지라면 세 가지로 설명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이 셋이 각각의 별개라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무상(無常)’하기에 바로 고(苦)이요, 고(苦)라면 바로 무아(無我)이다”라고 하셨습니까?
答曰; 是一事 所謂受有漏法。觀門分別故 有三種異, 無常行相應 是“無常想”,
苦行相應 是“苦想”, 無我行相應 是“無我想”。
無常 不令入三界, 苦令 知三界罪過, 無我 則捨世閒。
답하나니, 이 셋은 한 가지로써, 이른바 유루의 유루법(有漏法)을 받는 것이니,
해탈에 이르는 관문(觀門)으로 분별하는 까닭에 세 가지의 다름이 있다고 할 뿐이다.
무상함의 무상행상(無常行相, anityākārasaṁprayukta)은 바로 무상상(無常想)이며,
괴로움의 고행상(苦行相, duḥkhākārasaṁprayukta)은 바로 고상(苦想)이며,
무아의 무아행상(無我行相, anātmākārasaṁprayukta)은 바로 무아상(無我想)이라.
무상(無常)함은 삼계(三界)에 들지 않게 하고,
고(苦)는 삼계의 죄과(罪過)를 알게 하며,
무아(無我)는 곧 세간을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復次 無常 生厭心, 苦 生畏怖, 無我 出拔令解脫。
또한 무상(無常)은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
고(苦)는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며,
무아(無我)로는 벗어나서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無常者 佛說“五受衆是無常”, 苦者 佛說“無常則是苦”, 無我者 佛說“苦卽是無我”
무상(無常)하다 함을 부처님께서는 오수중(五受衆)이 바로 무상한 것이라 하셨고,
고(苦)를 부처님께서는 무상한 그것이 곧 괴로움의 고(苦)이라 하셨으며,
무아(無我)라 함을 부처님께서는 괴로운 그것이 곧 무아(無我)이라고 하셨으며,
無常者 佛示五受衆盡滅相, 苦者 佛示如箭入心, 無我者 佛示捨離相。
무상(無常)이라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오수중(五受衆)이 다하여 사라지는 모양임을 보이셨고,
고(苦)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마치 화살이 심장에 박힌 것과 같음을 보이셨으며,
무아(無我)라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버리고 여의는 모습임을 보이셨으며,
無常者 示斷愛, 苦者 示斷我習慢, 無我者 示斷邪見。
무상(無常)함으로 애욕을 끊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고,
고(苦)라 함으로 '나'를 내세우는 습기= 아습(我習)과 교만한 만(慢)을 끊는 것을 보여 주셨며,
무아(無我)라 함으로 삿된 소견의 사견(邪見)을 끊는 것을 보여 주셨으니,
無常者 遮常見, 苦者 遮今世涅槃樂見, 無我者 遮著處。
무상(無常)을 통해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견(常見)을 막고,
고(苦)를 통하여 금세를 열반은 즐어움으로 보는 소견을 막으며
무아(無我)를 통하여 집착함을 막으며,
無常者 世閒所可著常法是, 苦者 世閒計樂處是, 無我者 世閒所可計我牢固者是。
무상(無常)하다 함은 세간에서 집착할 만한 것이 항상 있다는 법에 대한 것이고,
고(苦)라 함은 세간에 즐거운 곳이 있음을 헤아리는 것에 대한 것이며,
무아(無我)라 함은 세간에서 나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견고하게 계착하는 것에 대한 것이니,
是爲三相分別想。
이것이 세 가지의 삼상(三相)으로 분별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無我想緣 攝種種 如苦想中說。
무아상(無我想)의 반연은 갖가지를 포섭하나니, 마치 고상(苦想)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