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1권 3

Skunky 2024. 1. 23. 01:00

大智度論釋初品中 八背捨義第三十四 卷二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4. 초품(初品) 중 팔배사(八背捨)의 뜻을 풀이함 3

 

問曰; 無想定 何以不名背捨?

묻나니, 무상정(無想定, asaṁjñisamāpatti) 무엇 때문에 배사라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邪見者 不審諸法過失 直入定中 謂是涅槃, 從定起時 還生悔心 墮在邪見 是故非背捨。

답하나니, 삿된 소견= 邪見(사견) 지닌 이는 제법의 허물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곧장 선정= 定(정) 가운데 들어가서 이것을 열반(涅槃)이라 여기며,

선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도리어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서 邪見(사견) 떨어져 머물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무상정(無想定)은 배사(背捨)가 아닌 것이라.

 

무상정은 무상멸정(無想滅定) 또는 무상등지(無想等至)는 색계의 4선천 중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인(因)이 되는 선정으로, 6식(六識)의 심(心) · 심소(心所)가 모두 없어져 6식(六識)의 활동, 즉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되게 하는 선정이다. 상(想)의 심소를 위주로 하여 멸하기 때문에 '상(想)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의 무상정(無想定)이라고 이름한다.- 위키

 

滅受想患厭散亂心故 入定休息 似涅槃法著身中得 故名身證

멸수상정(滅受想定, 멸진정)은 산란한 마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정(定)에 들어가 휴식하는 것이 마치 열반의 법을 닮았으며, 가운데 드러나고 몸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몸으로써 증득하는 신증(身證)이라 하며,


멸진정은 멸정(滅定) · 멸진등지(滅盡等至) · 멸진삼매(滅盡三昧) ·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은 무상정(無想定)과 마찬가지로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이다. 무상정은 이생범부(異生凡夫)가 닦고 득(得)하는 선정임에 비해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하기를 바래서 닦는 선정으로, 특히 선정의 장애[定障]를 멀리 떠난 부처와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 그 지닌 바 역량을 바탕으로 득(得)하는 선정이다.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되나 각 종파와 학자들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 위키  

 

八勝處者 內有色相外觀色少 若好若醜 是色勝知勝觀 是名初勝處。

승처(八勝處)란, 안의 육입(六入)에 색상(色相, 색온)이 있으나 밖의 육경(六境)에 색이 적음을 관하는 내유색상외관색소(內有色相外觀色少)는 혹은 좋은 호(好)이거나 혹은 추한 추(醜)이거나 간에  색(色)을 잘 아는= 勝知(승지)하여 뛰어나게 관하는 승관(勝觀)을 하니, 이를  번째 승처(勝處)라 하며, 

①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4선 중 초선(初禪)과 제2선(第二禪)에 의지하여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하여 현색탐(顯色貪)을 대치하는 것으로, 바깥 대상의 색깔에 대하여 퍼렇게 어혈든[靑瘀] 색깔 등을 관하는 부정관을 닦아 마음 속에 있는 빛깔에 대한 탐욕[顯色貪]을 버리는 것, 즉 몸 안에 있는 色想(색상)에 대한 탐(貪)을 제거(除去)하기 위하여 밖으로 부정하고 푸른 피멍 같은 색(色)을 관(觀)하여 탐(貪)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승처이며 이러한 초해탈(初解脫)은 초선정(初禪定)에 의해 일어나며 욕계(欲界)의 색(色)을 연(緣)한다.

內有色相 外觀色多 若好若醜 是色勝知勝觀 是名第二勝處。

안의 육입(六入)에 색상이 있고 또한 밖의 육경(六境)에 색이 많음을 관찰하는 내유색상외관색다(內有色相外觀色多)는 혹은 좋고 혹은 추함에 대한 색(色)을 잘 알아 뛰어나게 관(觀)하나니, 이을  번째 승처(勝處)라 하며,

②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4선 중 초선(初禪)과 제2선(第二禪)에 의지하여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하여 현색탐(顯色貪)을 대치하는 것으로, 마음 속에 있는 색깔에 대한 탐욕은 이미 없어졌지만 이 상태를 더욱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바깥 대상의 빛깔에 대하여 퍼렇게 어혈든[靑瘀] 빛 등을 관하는 부정관을 계속 닦는 것, 즉 몸 안에 색상(色想)의 탐(貪)이 없더라도 다시 굳건히 하고자 밖으로 부정하고 푸른 피멍 같은 색(色)을 관(觀)하여 탐(貪)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이선(二禪)에 의해 일어나고 초선(初禪)의 색(色)을 연(緣)하는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는 부정관(不淨觀)이다.

 

第三第四亦如是 但以內無色相 外觀色爲異。

內亦無色相 外觀諸色 靑黃赤白。是爲八勝處。

번째와 번째도 역시 그와 같으나, 다만 안의 육입(六入)에 색상이 없고 밖의 육경(六境)의 색만을 관하는 내유색상외관색(內有色相外觀色) 다를 뿐이며,

또한 안의 육입에 색상이 없으나 밖의 육경에 모든 색인 청ㆍ황ㆍ적ㆍ백을 관하나니, 이것이 여덟 가지의 승처이다.

 

청황적백(靑黃赤白)은 방위(方位)를 나타내기도 해서 동방(東方)과 중앙(中央) 남방(南方)과 서방(西方)을 뜻하기도 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③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 4선 중 제4선(第四禪)에 의지하여 정관(淨觀)을 수행하여 탐욕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체득하는 것으로, 부정관(不淨觀)을 버리고 바깥 대상의 색깔에 대하여 청정한 방면 즉 아름다운 색깔을 주시하여도 탐욕이 일어나지 않고 그 상태를 '몸으로 완전히 체득하여 안주하는 것'[身作證具足住]을 말하는 것으로 정색(淨色)을 관하므로 정해탈(淨解脫)이라고도 한다.
정중(定中)에 부정상(不淨相)을 제하고, 오로지 팔색(八色)의 광명청정한 정색(淨色)을 관하나 탐하지 않고, 관이 더욱 수승하여져서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며, 이 세 번째의 위(位)는 제사선(第四禪)에 의해 일어나되, 역시 욕계(欲界)의 색을 연(緣)하나, 다른 점은 ①② 둘은 가증(可憎)의 부정(不淨)한 색을 관하고, 이것은 가애(可愛)의 정색(淨色)을 관하는 정관(淨觀)이다.
④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은 4무색정 중 공무변처정에 의지하여 물질[色] 즉 색깔과 모양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말한다. 물질[色]의 속박, 즉, 물질에 대한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해탈이라 한다

⑤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 ⑥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 ⑦비상비비상처해탈(非想非非想處解脫)은 사무색정(四無色定)에 의해 일어나며, 각각 얻는 바 정(定)에서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관하여 염심(厭心)을 내고 버리므로 해탈解脫이라 한다.
⑧멸수상정신작증구주(滅受想定身作證具住)은 수(受)와 상(想)을 멸하는 정(定)을 몸으로 증득하여 구족히 머문다는 것은 수(受)와 상(想)을 멸하는 정(定)이란 멸진정(滅盡定)이며, 이 또한 제사선(第四禪)에 의해 앞의 비비상(非非想) 즉 일체의 소연(所緣)을 버리므로 解脫이라 한다. -佛學大辭典

 

內有色相 外觀色者 內身不壞 見外緣。者 緣少故名

觀道未增長故觀少因緣 觀多畏難攝故, 譬如鹿遊未調 不中遠放。

안의 육입(六入)에 색상이 있고 또한 밖의 색(色, 육경) 관한다는 것이란, 안의 육입(六入)의 몸을 무너뜨리지 않은 바깥 대상의 연(緣) 보는 것으로, 작다는 소(少)란 대상, 즉 연(緣)이 적은 까닭에 소(少)라 하나니,

관하는 도= 觀道(관도) 아직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인연을 관하는 것으로, 관하는 대상이 많게 되면 두려움을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유자면, 마치 사슴을 노닐 수 있게 아직 길들이지 못하였으나, 정원에 풀어 놓으면 멀리 달아나는 것과 같으니라.

 

若好 若醜者 初學繫心緣中 若眉閒 若額上 若鼻端 內身不淨相,

內身中不淨相觀外諸色 善業報故名不善業報故名

혹은 좋을 호(好)이거나 혹은 추할 추(醜)란,

처음 배우는 이가 마음을 대상 가운데, 혹은 미간, 혹은 이마, 혹은 코끝에 매어 두고서 몸 안= 내신(內身) 청정하지 않은 상(相) 내신(內身) 가운데 있는 청정하지 않은 상(相)으로 바깥(색경)의 모든 색의 착한 업보= 선업보(業報) 관하기 때문에 좋을 호(好)라 하고, 착하지 않은 업보= 불선업보(不善業報)를 관하기 때문에 추할 추(醜)라 하며, 

 

復次 行者如從師所受 觀外緣種種不淨 是名醜色

行者或時憶念忘故 生淨相 觀淨色 是名好色

또한 수행하는 이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바깥 대상=연(緣)의 갖가지 부정함을 관하는 것을 추한 색= 추색(醜色)이라 하며,

수행하는 이가 때로는 기억 속에 담겨있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까닭에 청정한 모양= 정상(淨相) 내어서 청정한 색= 정색(淨色) 관하는 것을 호색(好色)이라 하며, 

 

復次 行者自身中繫心一處 觀欲界中色二種, 一者 能生婬欲, 二者 能生瞋恚。

또한 수행하는 이가 자기  속의 한 곳에 마음을 매어 두고 욕계(欲界) 색을 관함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음욕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능히 성내고 노여워하는 진에(瞋恚)를 내는 것이라. 

 

能生婬欲者是淨色 名爲

능히 음욕을 낸다 하는 것이란 바로 정색(淨色)으로, 이를 일컬어 좋을 호(好)라 하며,

能生瞋恚者是不淨色 名爲。於緣中自在勝知 勝見

능히 진에(瞋恚)를 내는 것이란 바로 청정하지 않은 색= 부정색(不淨色)으로, 이를 일컬어 추할 추(醜)라 하나니, 

대상=연(緣)에 대하여 자재로우며, 수승하게 아는 승지(勝知)이, 수승하게 보는 승견(勝見)이다.

 

行者於能生婬欲端正色中 不生婬欲, 於能生瞋恚惡色中 不生瞋恚。

但觀色四大因緣和合生 如水沫不堅固是名若好 若醜

수행하는 이가 음욕을 있게 하는 단정한 () 대하여 음욕을 내지 않고,

진에(瞋恚)를  있게 하는 나쁜 색에 대하여 진에(瞋恚)를 내지 않으며,

다만 색을 관찰하기를, 4(四) 인연화합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며, 마치 물거품과 같이 견고하지 않은 것리라고 보는 것을 일컬어 혹은 좋을 호(好)이기도 하고 혹은 추할 추(醜)이기도 하다 하며,

 

勝處者 行者住是不淨門中 婬欲瞋恚等 諸結使來能不隨 是名勝處

勝是不淨中 淨顚倒等 諸煩惱賊故。

승처(勝處) 함은 수행하는 이가 청정하지 않은 부정문(不淨門) 가운데 머무르면서 음욕과 진에(瞋恚) 등의 모든 결사(번뇌)가 온다 하여도(번뇌를 아직 끊어내지는 못하였을지라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있다면, 이를 승처(勝處)라 하며,

수승함의 승(勝)이란 청정하지 않은 가운데서 청정하다고 여기는 뒤바뀌어 전도된 생각 등의 모든 번뇌의 도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승(勝)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 行者, 云何 內色相外觀色?

묻나니, 수행하는 이는 어떻게 안의 육입의 색에 대하여 생각하고 어떻게 밖의 육경의 색(色)을 관하여아 하는 것입니까?

 

答曰; 是八勝處 深入定心調柔者可得。行者或時見內身不淨 亦見外色不淨。

不淨觀有二種; 一者 三十六物等種種不淨, 二者 除內外皮肉五藏 但觀白骨如珂如雪。

三十六物等觀是名“醜” 如珂如雪觀是名“好”。

답하나니, 이 팔승처(八勝處)는 깊은 정(定)에 들어가서 마음이 조복되고 유연하여진 이라야 얻을 수 있으니,

수행하는 이는 간혹 몸 안의 부정함을 보기도 하고 또한 바깥 색의 부정함을 보기도 하며, 

부정관(不淨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서른여섯 가지 몸 안의 부정한 요소인 삼십육물(三十六物) 등의 갖가지 부정함을 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외의 피부와 살과 오장(五臟)을 제외하고 다만 백골을 관하기를 마치 하얀 마노(śaṅkha. 법라패) 같고 백설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서른여섯 가지 몸 안의 부정한 요소인 삼십육물(三十六物) 대하여 관하는 것을 추(醜)하다 하고,

마치 마노와 같고 백설과 같다고 관하는 것은 좋을 호(好)라고 하느니라.

 

行者內 外觀時 心散亂 難入禪, 除自身相 但觀外色 如『阿毘曇』中說。

行者以得解脫觀 見是身死, 死已 擧出塚閒 若火燒 若虫噉 皆已滅盡

是時 但見虫火不見身 是名“內無色相外觀色”。

수행하는 이는 안팎으로 관을 행할 때에 마음이 산란하면 선정에 들기 어려우므로 자기 몸의 모양을 제외하고 다만 바깥의 색만을 관하는데, 이는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수행하는 이는 해탈하는 관= 해탈관(解脫觀, ādhyātmika-saṁjñā)을 얻음으로써 이 몸은 죽으며, 죽은 뒤에는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혀 벌레에게 파먹히며 결국은 없어지는 것을 보는데, 이 때에 벌레와 불만을 보고 스스로의 몸을 보지 않는다면 를 안으로의 육입에 색상(색온)이 없다고 여기고 밖의 색만을 관하는 것이라 하며,

 

行者如受 觀身是骨人 若心外還攝骨人緣中。

何以故, 是人初習行 未能觀細緣故 是名“少色”,

行者觀道轉深增長 以此一骨人 遍觀閻浮提皆是骨人 是名爲“多”,

還復攝念觀一骨人 以是故名“勝知勝見”。

수행자는 가르침대로 받아들여 몸은 뼈로 된 사람= 골인(骨人)이라고 관하다가 만약 마음이 바깥의 육경으로 인하여 흩어지면 돌이켜 골인(骨人)의 인연으로 마음을 거두어 들이나니,

왜냐하면 이 사람은 처음 행을 익히게 되어 아직은 미세한 인연을 관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를 적은 색= 소색(少色)이라 하며, 

그리고 수행하는 이의 관하는 관도(觀道)가 점차로 깊어지고 더욱 자라면 이러한 골인(骨人)으로써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사람이 바로 골인(骨人)이라고 두루 관하나니, 이러함을 많을 다(多)라고 하며,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골인(骨人)로 된 한 사람을 관하므로 수승하게 알고 수승하게 보는 승지승견(勝知勝見)이라 하며,

 

復次 隨意五欲中男女相 淨潔相能勝故 名爲“勝處”。

譬如健人乘馬擊賊能破 是名爲“勝”, 又能制御其馬 是亦名“勝”。

行者亦如是 能自於不淨觀中 少能多 多能少 是爲“勝處”,

亦能破五欲賊 亦名“勝處”。

또한 뜻에 따라 오욕 중에서 남녀의 모양과 정결한 모습을 능히 이기는 까닭에 승처(勝處)라 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건강한 사람이 말을 타고 도적을 능히 잘 물리쳐서 무찌르는 것을 수승하다 하는 것과 같으며,

또 그 말을 잘 제어(制御)하는 것 역시도 수승하다고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역시 그와 같아서 스스로 부정관(不淨觀)을 통하여 적은 것은 많게 하고 많은 것은 적게 할 수 있으므로 이를 승처(勝處)라 하고

또한 오욕의 도적을 깨뜨릴 수 있으므로 역시 승처(勝處)라 하며,  

內未能壞身 外觀色若多若少 若好若醜 是初 第二勝處。

안의 육입으로 된 몸을 아직 무너뜨리지 못한 채 밖의 색경을 관하여, 많거나 적거나, 좋거나 추한 것을 관하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승처(勝處)이며,

 

內壞身無色相 觀外色 若多若少 若好若醜 是第三 第四勝處。

안의 육입으로 된 몸을 무너뜨려 색상이 없어지고 밖의 색경을 관하여, 많거나 적거나, 좋거나 추한 것을 관하는 것이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승처(勝處)이며, 

 

攝心深入定中 壞內身 觀外淨 緣靑 靑色, 黃赤白白色 是爲後四勝處。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들여 깊은 정(定)에 들어가서 안의 육입으로 된 몸을 무너뜨리고 바깥의 깨끗한 대상=연(緣)으로하여 모든 청색의 대상을 청색으로 또는 황색ㆍ적색ㆍ백색을 황색ㆍ적색ㆍ백색으로 관하는 것이 나중의 네 가지 승처= 사승처(四勝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