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1권 2
大智度論釋初品中 八背捨義第三十四 卷二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4. 초품(初品) 중 팔배사(八背捨)의 뜻을 풀이함 2
問曰; 行者以不淨爲淨 名爲顚倒, 淨背捨觀 云何不顚倒?
묻나니, 수행자가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도(顚倒 뒤바뀐)된 생각이라 하나, 맑은 배사= 淨背捨(정배사)로 관하는 것은 어떻게 전도 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 女色不淨 妄見爲淨 是名顚倒。淨背捨 觀一切實靑色廣大 故不顚倒。
답하나니, 여색(女色)의 부정함을 망령되게 보아 청정하다 한다면 이를 전도된 생각이라 하며,
淨背捨(정배사)란 일체를 실로 청색(靑色)이며 광대한 것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전도 된 것이 아니다.
復次 爲調心故淨觀 以久習不淨觀 心厭 以是故習淨觀 非顚倒 亦是中不著故。
또한 마음을 조복(調伏) 받기 위하여 백골관의 정관(淨觀, śubhabhāvanā)을 오래 익히면 시체관의 부정관(不淨觀, aśubhāvanā)을 마음으로 싫어하게 되나니,
이러한 때문에 정관을 익히는 것은 뒤바뀐 것이 아닌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함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復次 行者先觀身不淨 隨身法所有內外不淨 繫心觀中 是時生厭 婬恚癡薄 卽自驚悟; “我爲無目 此身如是 云何生著?" 攝心實觀 無令復錯。
또 수행하는 이는 먼저 몸의 부정함을 관찰하되, 몸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온갖 안과 밖의 부정함을 따라 관찰하는 것에 마음을 매어 두면, 이러함에 싫증을 내게 되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지게 되나니,
곧 스스로도 놀라 깨치면서 “나에게 눈이 없었구나! 이 몸이란 이와 같은 것이거늘 어찌하여 애착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진실로 관하여 다시는 착오가 없게 하는 것이니라.
心旣調柔 想身皮肉血髓不淨 除卻 唯有白骨, 繫心骨人 若外馳散 攝之令還。
深攝心故 見白骨流光 如珂如貝 能照內外諸物 是爲淨背捨初門。
然後觀骨人散滅 但見骨光 取外淨潔色相。珂 옥 이름 가
마음을 이미 조복받게 되어 부드러워져서 몸의 가죽과 살과 피와 골수가 부정하기에 이들을 제거하여 물리치니, 오직 백골(白骨)만 남게 되었으니, 마음을 백골(白骨)로 된 사람에게 매어 두며,
만약 마음이 바깥으로 내달아 흩어지게 되면 그 마음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며,
그러한 깊은 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까닭에 백골에서 빛이 흘러 나오는 유광(流光)을 보게 되니,
마치 흰 마노=珂(가)와 같고, 조개=貝(패)와 같으며, 능히 안과 밖의 모든 물건을 비추게 되나니,
이러함이 맑은 배사= 淨背捨(정배사)의 첫 문이니라.
그런 뒤에 백골(白骨)로 된 사람이 흩어져 소멸하는 것을 관하나니,
다만 뼈의 광명만을 보고 바깥의 정결한 색상(色相, 색온)만을 취하여야 하며,
復次 若金剛 眞珠 金銀寶物 若淸淨地 若淨水 如無煙 無薪淨潔火,
若淸風無塵 諸靑色 如金精山, 諸黃色 如瞻蔔花, 諸赤色 如赤蓮華, 諸白色 如白雪等。
取是相 繫心淨觀 隨是諸色 各有淸淨光曜。是時行者得受喜樂 遍滿身中 是名淨背捨。薪 섶나무 신
또한 금강ㆍ진주ㆍ금ㆍ은 등의 보물이나 혹은 청정한 땅 혹은 맑은 물이 마치 연기도 없고 풀섶도 없이 타는 정결한 불과도 같고,
혹은 먼지가 없는 맑은 바람이며, 모든 청색은 마치 수미산 동쪽의 금정산(金精山)과 같고,
모든 황색은 마치 첨복화(瞻蔔花, 금색화, 황색화, 담복화, 치자꽃)와 같고,
모든 적색은 붉은 적련화(赤蓮華, saugandhika)와 같고,
모든 백색은 마치 흰눈 등과 같아지는 등과 같음을 보게 되나니,
이러함과 같은 상(相)을 취하여 마음을 정관(淨觀, śubhabhāvanā)에 매어서 관하면, 모든 색을 따라 저마다의 청정한 광휘가 있으니,
이 때에 수행하는 이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음이 온몸을 두루 채우게 되나니, 이를 맑은 배사= 淨背捨(정배사)라 하며,
緣淨故 名爲“淨背捨”。遍身受樂 故名爲“身證”。
得是心樂 背捨五欲 不復喜樂 是名“背捨”。
청정함을 연(緣)하는 까닭에 정배사(淨背捨)라 하며,
두루 온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까닭에 몸으로 증득하여 밝힌=身證(신증, 아나함과)이라 하나니,
이러한 마음의 즐거움을 얻고 오욕을 등지고 버리게 되니, 다시는 오욕으로 인하여 기뻐하거나 즐거워함이 없게 되니 이러함을 배사(背捨)라 하느니라.
未漏盡故 中閒或結使心生 隨著淨色。復懃精進 斷此著故 如是淨觀從心想生。
譬如幻主觀所幻物 知從己出 心不生著 能不隨所緣。是時“背捨”變名“勝處”。
그러나 유루(有漏)가 아직 다하지 않은 까닭에,
중간에 간혹은 번뇌에 묶인 結(결)과 부림을 당하는 사(使)의 마음이 생겨나서 청정한 색(色)에 집착하게 되기도 하나,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러한 집착을 끊게 되나니, 이러한 정관(淨觀)은 마음의 생각= 心想(심상)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라.
비유하자면 마치 환술사= 幻主(환주)가 환술로 만들어낸 물건을 살펴보고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임을 아는 까닭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능히 대상을 따라 반연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의 배사(背捨)를 승처(勝處)라고 바꾸어 부르며,
於淨觀雖勝 未能廣大 是時行者還取淨相, 用背捨力及勝處力故 取是淨地相 漸漸遍滿十方虛空, 水火風亦爾。
取靑相 漸令廣大 亦遍十方虛空, 黃赤白亦如是。是時“勝處”復變爲“一切處”。
비록 정관을 행함에 있어서는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직 능히 크고 넓지는 못하니,
이 때에 수행하는 이는 도리어 돌아가 청정한 모양= 淨相(정상)을 취하여,
배사의 힘을 이용하고 승처의 힘을 이용하는 까닭에,
이러함으로 청정한 지(地, 지위)의 상을 취하여, 점차 시방의 허공에 두루 가득 차게 되나니, 수(水)ㆍ화(火)ㆍ풍(風) 역시 그러하며,
청색의 실상= 靑相(청상)을 취하여 조금씩 광대하게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시방의 허공에 두루 가득 차게 되나니,
황색ㆍ적색ㆍ백색 역시도 그와 같으니,
이 때의 승처(勝處)는 다시 일체처(一切處)로 변한 것이니라.
是三事一義 轉變有三名。
이러한 배사(背捨), 승처(勝處) 일체처(一切處)의 세 가지는 하나의 의미이나,
바뀌어 옮겨가고 변하여 세 가지의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니라.
問曰; 是三背捨 八勝處 十一切處是實觀? 是得解觀?
묻나니, 이 세 가지의 삼배사(三背捨)와 여덟 가지의 팔승처(八勝處)와 열 가지의 심일체처(十一切處)는 곧 실상을 관찰하는 실관(實觀)입니까?
아니면, 해탈을 얻음을 관찰하는 득해관(得解觀)입니까?
若實觀 身有皮肉 何以但見白骨?
만약 실관이라면, 몸에는 피부와 살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백골만을 보는 것이며?
又三十六物合爲身法 何以分別散觀?
또 서른여섯 가지의 물상= 三十六物(삼십육물)이 합해서 몸의 현상과 작용을 이루거늘 무엇 때문에 분별하고 나누어서 관찰하는 산관(散觀)을 하는것이며?
四大各自有相 何以滅三大 但觀一地大?
지수화풍의 4대(大)는 각각 스스로의 실상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세 가지의 요소는 제외하고 굳은 성질의 지대(地大, pṛthivīmahabhūta) 하나만을 관찰하는 것이며?
四色非盡是靑 何以都作靑觀?
청황적백(靑黃赤白)의 네 가지 색깔이 모두 청색은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모두 청색으로 관찰하는 것입니까?
三十六物(삼십육물)= 몸 안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부정한 요소들, 곧 머리칼ㆍ털ㆍ손톱ㆍ이빨ㆍ눈곱ㆍ눈물ㆍ침ㆍ가래ㆍ소변ㆍ대변ㆍ때ㆍ땀과 간ㆍ쓸개ㆍ창자ㆍ위ㆍ비ㆍ신장ㆍ심장ㆍ폐ㆍ생장(生藏)ㆍ적담(赤痰)ㆍ백담(白痰)과 피(皮)ㆍ부(膚)ㆍ피ㆍ살ㆍ근육ㆍ핏줄ㆍ뼈ㆍ골수ㆍ지방ㆍ고(膏)ㆍ뇌ㆍ막 등.
答曰; 有實觀 亦有得解觀。身相實是不淨 是爲實觀。
外法中有淨相 種種色相 是爲實淨。觀淨不淨 是爲實觀。
以此少許淨 廣觀一切皆是淨, 取是一水 遍觀一切皆是水,
取是少許靑相 遍一切皆是靑。如是等 是爲得解觀 非實。
답하나니, 실상을 관찰하는 실관(實觀)도 있고 해탈을 얻음을 관찰하는 득해관(得解觀)도 있다.
몸의 실상은 실로 청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러함을 관찰하는 것은 실관(實觀)이 되며,
바깥 법 중에서 청정한 상이 있으니 갖가지의 색상(色相)이며, 이러함을 관찰하는 것은 실로 정관(淨觀)이 되지만,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은 것을 관찰하는 것은 바로 실관(實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간의 청정한 것으로써 일체가 모두 청정한 것으로 널리 관하고,
한 웅큼의 물을 취하여 일체 모두가 두루 물이라고 관하며,
약간의 푸른 모양을 취하여 일체 모두가 두루 푸른 것이라고 관하니,
이러함과 같은 것들은 바로 해탈을 얻음을 관찰하는 득해관(得解觀)이나, 실관(實觀)은 아니다.
四無色背捨 如四無色定中觀。欲得背捨 先入無色定 無色定是背捨之初門。
背捨色 緣無量虛空處。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무색(四無色)을 대상으로 관찰하여 얻는 해탈의 배사(背捨, ārūpyavimokṣa)는 마치 4무색정(無色定) 중의 관찰과 같으니, 배사(背捨)를 얻고자 하면, 먼저 무색정으로 들어가나니,
무색정은 바로 배사의 첫 문이니, 색(rūpyālambana)이라는 대상을 등져서 버리게 되면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 ākāśānantyāyatana, 공무변처)에 이르게 되는 연(緣)이 되느니라.
이 모든 말씀이 사선(四禪)에서의 아비발치지(阿毗跋致地)를 위주로 하시는 것으로, 초선(初禪)에서 사선(四禪)까지는 색온(色蘊)의 해탈을 통해 열반문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나머지 공무변처에서 비유상비무상처까지가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薀)의 걸림에서 하나씩 벗어나는 것이며 마지막 멸수상정(滅受想定)이 무여열반의 입구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問曰; 無色定亦爾 有何等異?
묻나니, 무색정(無色定)이 그렇다면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 凡夫人得是無色定 是爲無色, 聖人深心得無色定 一向不迴 是名背捨。
답하나니, 범부는 이 무색정(無色定)을 얻게 되면 바로 볼 수 없는 무색(無色)이라 여기지만,
성인의 깊은 마음으로 무색정(無色定)을 얻으면 한결같아 무상정등정각만을 향하는 일향(一向)으로, 돌이켜 다른 생각을 내지 않는 불회(不迴)이니, 이를 배사(背捨)라 하며,
餘殘識處 無所有處 非有想非無想處 亦如是。
나머지 식처(識處, vijñānānantyāyatana, 식무변처)ㆍ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nyāyatana)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naivasaṁjñānāsaṁjñāyatana)도 역시 그와 같으니,
背滅受想諸心心數法 是名滅受想背捨。
느낌의 受(수)와 생각의 想(상) 등의 여러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을 등지어 없애 버리는 것을 느낌과 생각을 멸하여 얻게 되는 해탈의 상태인 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 saṁjñāveditanirodhavimokṣa)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