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11
大智度論釋初品中 三三昧義 第三十二卷 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3. 초품 중 사무량(四無量)의 뜻을 풀이함 6
[佛說三種色, “有色可見有對 有色不可見有對 有色不可見無對"
過色相者 是可見有對色, 滅有對相者 是不可見有對色, 不念異相者 是不可見無對色。
부처님께서는 세 종류의 색(色, 색온)을
어떤 색은 볼 수도 있고 대할 수도 있는 가견유대(可見有對)요,
어떤 색은 볼 수는 없으나 대할 수 있는 불가견유대(不可見有對)요,
어떤 색은 대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불가견무대(不可見無對)라 하셨으니,
색상을 초월한다는 과색상(過色相)이라 함은 볼 수도 있고 대할 수도 있는 색의 가견유대(可見有對)요,
대할 수 있는 모습을 멸한다는 멸유대상(滅有對相)이라 함은 볼 수는 없으나 대할 수는 있는 색의 불가견유대(不可見有對)요,
다른 모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불념이상(不念異相)이라 함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 색의 불가견무대(不可見無對)이니라.-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10의 마지막 부분]
復次 眼見色壞故 名過色,
또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색이 있음을 초월한다고 하며,
耳聲 鼻香 舌味 身觸壞故 過有對相,
귀로 듣는 소리ㆍ코로 맡는 냄새ㆍ혀로 느끼는 맛ㆍ몸의 촉감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는 상(相)을 초월한다고 하며,
於二種餘色 及無教色種種分別故 名異相。
나머지의 두 종류 및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질의 무교색(無敎色, avijñapti-rūpa, 무작색無作色 또는 무표색無表色)에 대해서는 갖가지로 분별하는 까닭에 다른 모습의 이상(異相)이라 하나니,
如是觀 離色界中染 得無邊虛空處。得三無色因緣方便 如「禪波羅蜜品」中說。
이와 같이 관찰하여 색계 가운데에서 물들지 않는 것이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 공무변처)를 얻는 것이며,
삼무색(三無色)을 얻는 인연과 방편은 '선바라밀품(禪波羅蜜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니라.
是四無色 一常有漏 三當分別。
이러한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무색(四無色, 사무색정) 중의 하나인 수(受)는 항상 유루(有漏)이거니와 나머지의 상(想)·행(行)·식(識)의 셋은 마땅히 분별을 하는 것이며,
虛空處 或有漏 或無漏。
허공처(虛空處, 공무변처)는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니,
有漏者 虛空處攝有漏四衆,
유루(有漏)라 함은 허공처(虛空處)에 속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유루의 사중(四衆)이요,
無漏者 虛空處攝無漏四衆。
무루(無漏)라 함은 허공처(虛空處)에 속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무루의 사중(四衆)이니,
識處 無所有處亦如是。一切皆有爲。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도 이와 같이 생주멸(生住滅)이 있는 유위(有爲)의 선(禪)이니라.
사무색(四無色)= 사무색정(四無色定), 사공정(四空定), 무색정(無色定), 4공정(四空定), 4공처정(四空處定) 또는 4무색(四無色)이라고도 한다. 삼라만상은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고 모두 인연에 의하여 생긴다고 보는 네 가지 선정. 선정(禪定)이란, 선(禪)과 정(定)의 합성어로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함을 뜻한다. 사무색정(四無色定)은, 물질을 완전히 초월한 선정, 즉, 욕계의 조대(粗大, 거칠고 큼)한 물질과 색계의 미세(微細, 작고 꼼꼼함)한 물질 모두를 초월한 선정으로 오직 마음(citta)과 마음작용(cetasika)만이 남아 있는,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4가지 선정을 말한다. 달리 말해서,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중 명(名, 정신)만 있는 선정이다. 무색계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5온에서 색온이 없고 수상행식의 4온만 있는 선정이다. 오온(五蘊)이란, 불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4무색정의 선정 요소는 사(捨, 평온)와 심일경성(心一境性, 집중)이다.
네 가지 선정(禪定)이란,
①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허공은 무한하다고 주시하는 선정. 물질[色]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한한 공간에 집중하는 선정.
②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마음의 작용은 무한하다고 주시하는 선정. 공간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한한 공간과 함께하고 있는 무한한 마음에 집중하는 선정.
③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주시하는 선정. 마음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없음에 집중하는 선정이다. 무한한 공간과 함께하고 있는 무한한 마음이 없음, 즉 "거기에 그 무엇이건 아무것도 없음"에 집중하는 선정이다.
④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의 선정. 욕계·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경지의 선정. 다시말해서 무소유처정에서 더 나아간, 무소유처정의 마음을 명상 대상으로 하여 집중하는 선정으로, 그 상태가 극히 미세하여 마음[想]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마음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선정이다. -Ryu
*무기(無記)= 의식현상의 세 가지 양상 가운데 유기와 달리 선과 악의 분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무기는 인간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과 무기의 3성(性)으로 구분하는데, 이 중 무기는 선악의 분별이 없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 흑백 등의 상태가 분명한 것을 유기(有記)라고 하는데, 선·악이라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의 선과 악에는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따르지만, 무기에 대해서는 어떤 과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기의 업(業)에 대해서는 자성(自性)에 기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무기는 덮어 가릴 수 있는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덮어 가릴 수 없는 무부무기(無覆無記)로 크게 나뉜다. 유부무기는 번뇌에 오염되어 능히 수행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고, 무부무기는 수행 자체에는 방해를 주지 않는 무기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유부무기를 제거해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다움
善有漏虛空處是有報無記 及無漏虛空處是無報, 識處 無所有處 亦如是。
善非有想非無想處是有報 無記非有想非無想處是無報。
유루의 허공처는 과보가 있는 유보(有報)이고 무기(無記)이며,
무루의 허공처는 과보가 없는 무보(無報)이며, 식처ㆍ무소유처도 이와 같으며,
선(善, 훌륭한)한 비유상비무상처는 과보가 있는 유보(有報)이며,
무기의 비유상비무상처는 과보가 없는 무보이며,
善四無色定是可修 無記四無色定非可修。
선한 (훌륭한) 사무색정은 닦을 수 있는 것이며,
무기의 사무색정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隱沒者是有垢 不隱沒者是無垢。隱沒은몰= 자취를 감춤
숨어 없어진다는 은몰(隱沒)은 때= 垢(구)가 있음이요,
숨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불은몰(不隱沒)이라 함은 垢(구, 때)가 없음이며,
一 有三中 有漏者是有 無漏者是非有。
하나 가운데 셋이 있으니, 유루라 함은 있다는 것이요, 무루라 함은 있지 않다는 것이며,
四無色定 攝心心數法 是相應因, 心不相應諸行 是非相應因。
사무색정이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는 상응인(相應因)이요,
마음이 제행에 상응하지 않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 원인의 비상응인(非相應因)이며,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인과 연을 자세히 분류하여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한 가운데의 육인은 능작인(能作因) ․ 구유인(俱有因) ․ 상응인(相應因) ․ 동류인(同類因) ․ 편행인(遍行因) ․ 이숙인(異熟因)을 말한다.
상응인(相應因)은 서로 동반하는 원인. 서로 연결되어 있는 원인. 마음 즉 심왕(心王)과 마음 작용 즉 심소(心所)가 함께 발동할 때, 서로 조력하여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므로, 한쪽을 다른 쪽에 대해 상응인이라고 한다. 마음은 마음 작용을 일으키므로 원인이 되며, 그 마음 작용 역시 마음을 일으키므로 원인이 된다. 이 경우의 원인이 상응인이며, 결과는 사용과라고 불린다.-정각사
有善法 非四無色中
선법(善法)이면서도 사무색 안의 것이 아닌 것도 있고,
有四無色中非善法
사무색 안의 것이면서도 선법(善法)이 아닌 것도 있으며,
有亦善法 亦四無色中
선법(善法)이면서 또한 사무색 안의 것인 것도 있고,
有非善法亦非四無色中。
선법(善法)도 아니고 또한 사무색 안의 것이 아닌 것도 있으며,
有善法非四無色者 一切善色衆及四無色 不攝四衆 及智緣盡。
선법(善法)이면서도 사무색이 아니라는 것은 일체의 색중(色衆, 색온)과 사무색이 포섭하지 않는 선(善)한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중(四衆) 및 지혜의 연이 다한 지연진(智緣盡. 무상법, 열반)이며,
지연진(智緣盡)= 위가 없는 법(無上法) 열반(涅槃)이며, 유위법(有爲法)의 마지막인 갈무리를 다한 것.
비지연진(非智緣盡)= 위가 있는 법(有上法)이란 온갖 유위(有爲)의 법과 허공(虛空),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라고도 하며, 생주멸(生住滅)의 인연 법칙이 아니어서 유위법(有爲法)의 마지막인 갈무리라는 멸(滅)을 선택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라는 뜻입니다.
有四無色中非善法者 無記四無色。
사무색 가운데 있으면서도 선법(善法)이 아니라 함은 무기(無記)의 사무색이며,
有亦善法亦四無色者 善四無色。
선법(善法)이기도 하고 또한 사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선(善)한 사무색이며,
有非善法亦非四無色者 一切不善五衆 及無記色衆 及四無色不攝無記四衆
虛空及非智緣盡。不善法中不相攝。
선법(善法)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니라 함은 일체의 선(善)하지 못한 오중(五衆, 오온)과 무기의 색중(색온), 그리고 사무색이 포섭하지 못하는 무기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중(四衆)과 허공 및 지혜의 인연이 다하지 않은 비지연진(非智緣盡)이라.
선하지 않은 법에 서로 포섭되지 않는 것이니라.
有無記法非四無色有 四無色非無記法有 亦無記法亦四無色 有非無記亦非四無色。
무기법(無記法)이면서도 사무색이 아닌 것도 있고,
사무색이면서도 무기법(無記法)이 아닌 것도 있으며,
무기법(無記法)이기도 하고 사무색이기도 한 것이 있으며,
무기법(無記法)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닌 것도 있다.
有無記法非四無色者 無記色衆 及四無色不攝無記四衆 虛空及非智緣盡。
무기법(無記法)이면서도 사무색이 아닌 것이라 함은 무기(無記)의 색중(색온) 및 사무색에 포섭되지 않는 무기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중(四衆)과 허공 및 지혜의 연이 다하지 않은 비지연진(非智緣盡)이며,
有四無色中非無記法者 善四無色。亦無記法亦四無色者 無記四無色。
사무색 가운데 있으면서도 무기법이 아니라 함은 선(善)한 사무색이며,
무기이기도 하고 사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무기의 사무색이며,
亦非無記法亦非四無色者 不善五衆 善色衆 無色不攝善四衆及智緣盡。
무기의 법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니라 함은 선하지 못한 오중(오온)과 선한 색중(색온)과 무색에 속하지 않는 선한 사중 및 지혜의 연이 다한 지연진(智緣盡)이며,
或漏非四無色 或四無色非漏 或漏亦四無色 或非漏亦非四無色。
혹은 샘이 있는 누(漏)이면서 사무색이 아니거나, 혹은 사무색이면서 샘이 있는 누(漏)가 아니거나,
혹은 샘이 있는 누(漏)이기도 하고 사무색이거나, 혹은 샘이 있는 누(漏)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닌 것이라.
漏非四無色者 一漏及二漏少分。
샘이 있는 누(漏)이면서 사무색이 아니라 하는 것은 하나의 샘이 있는 누(漏)를 실마리로 사혹(思惑)과 수혹(隨惑)이 누(漏)의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며,
四無色非漏者 漏不攝四無色。
사무색이면서 샘이 있는 누(漏)가 아니라 함은 샘이 있는 누(漏)에 속하지 않는 사무색이며,
亦漏亦四無色者 二漏少分。
샘이 있는 누(漏)이기도 하고 사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사혹(思惑)과 수혹(隨惑)의 두가지 샘이 있는 누(漏)의 일부분이며,
非漏非四無色者 色衆及漏無色不攝四衆及無爲法。
샘이 있는 누(漏)도 아니요 사무색도 아니라 함은 색중(색온) 및 누(漏)와 무색에 속하지 않는 수상행식의 사중(四衆)과 무위의 법(無爲法)이요.
'루(漏)'는 번뇌를 의미한다. 원래는 누설(漏泄-새다), ‘흘러내린다’, ‘액체 같은 것이 샌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루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고, 유루는 번뇌가 있다는 말이다.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의미- 아미산
或有漏非四無色 或四無色非有漏 或有漏亦四無色 或非有漏非四無色。
혹은 유루(有漏)이면서 사무색이 아니거나, 혹은 사무색이면서 유루가 아니거나, 혹은 유루이면서 사무색이거나, 혹은 유루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니기도 하니,
有漏非四無色者 有漏色衆 及無色不攝有漏四衆。
유루이면서 사무색이 아니라 함은 유루의 색중과 무색에 속하지 않는 유루의 수상행식(受想行識) 사중(無色)이요,
四無色非有漏者 三無色少分。
사무색이면서 유루가 아니라 함은 삼무색계의 일부분이요,
亦有漏亦四無色者 一無色及三無色少分。
유루이기도 하고 사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하나의 무색 및 셋의 무색의 일부분이요,
亦非有漏非四無色者 無漏色衆 無色不攝無漏四衆及三無爲。
유루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니라 함은 무루의 색중과 무색에 속하지 않는 무루의 수상행식(受想行識) 사중(無色) 및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삼무위(三無爲)이다.
‘유루’는 번뇌가 있다는 말이며, 이것을 다른 말로는 유염(有染), 유염오(有染汚), 유쟁(有諍)이라고도 한다. 이때 염(染:물듦), 염오(染汚:더러움), 쟁(諍:말다툼)도 번뇌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우리가 잘못된 견해로 번뇌를 일으키고 키워나가는 것을 유루법이라 하고, 그와 반대의 개념을 무루법이라고 한다.
부연하면, 사성제(四聖諦) 가운데서 미혹의 결과(苦諦)와 원인(集諦)에 해당하는 제법은 유루법이고, 깨달음이나 그 원인(道諦)의 결과(滅諦)에 해당하는 제법은 무루법이다.
그리고 일체의 세속법을 대상으로 해서 일어나는 모든 범부의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고 하는 반면에, 사성제의 도리를 깨달은, - 사성제의 도리를 증득한 견도(見道) 이후의 성자의 지혜, -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無學道)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無漏智)라고 한다.
‘유루의 선(善)’이란, 바로 우리가 보통 일상에서 행하는 선행으로 '나는 지금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 선행을 말한다.
‘무루의 선’이란 전혀 걸림이 없는 선행을 말한다. 견도에 들어가서 성자가 일으키는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선을 무루선(無漏善)이라 한다. 이것은 선행을 행하면서도 한다는 의식이 없는 선행이다. - 아미산
或無漏非四無色 或四無色非無漏 或無漏亦四無色 或非無漏亦非四無色。
혹은 무루(無漏)이면서 사무색이 아니거나, 혹은 사무색이면서 무루가 아니거나, 혹은 무루이면서 4무색이거나, 혹은 무루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기도 하니,
無漏非四無色者 無漏色衆 及無色不攝無漏四衆及三無爲。
무루이면서 사무색이 아니라 함은 무루의 색중(색온)과 무색에 속하지 않은 무루의 수상행식의 사중과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삼무위(三無爲)이며,
四無色非無漏者 一無色及三無色少分。
사무색이면서 무루가 아니라는 것이란, 수온(受蘊)의 일무색(一無色)과 상행식(想行識)의 삼무색의 일부분이며,
亦無漏亦四無色者 三無色少分。
무루이기도 하고 사무색이기도 하다는 것은 상행식(想行識), 3무색의 일부분이다.
非無漏非四無色者 有漏色衆 及無色不攝有漏四衆。
무루도 아니고 사무색도 아니라 함은 유루의 색중(색온)과 무색계에 속하지 않은 유루의 수상행식(受想行識) 사중(四衆)이며,
虛空處 或見諦斷 或思惟斷 或不斷。見諦斷者 信行 法行人 用見諦忍斷。
何者是?二十八使 及二十八使相應虛空處 及此起心不相應諸行。
허공처는 혹은 견제(見諦, 견제도見諦道)인 사지(四地)에서 끊고, 혹은 사유(思惟)로써 끓으나, 혹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견제(見諦)에서 끊는다 함은 믿음으로 행하고 법답게 행하는 信行法行(신행법행)의 사람이 견제의 지혜= 見諦忍(견제인, 무생법인)을 얻어서 끊을 수 있으니,
무엇을 끊는가 하면, 곧 28개의 사(使) 및 28개의 사(使)에 상응하는 허공처(虛空處)와 여기에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마음에 서로 상응하지 않는 여러 행= 諸行(제행)들이며,
思惟斷者 學見道用思惟斷。何者是?思惟所斷三使 及此相應虛空處 及此起心不相應諸行 及無垢有漏虛空處。不斷者 無漏虛空處。識處 無所有處亦如是。
사유에서 끊는다 함은 견도의 법을 배운 이가 사유(思惟)를 써서 끊는 것이니,
무엇을 끊는 것인가 하면, 곧 사유로써 끊는 3사(使) 및 이에 상응하는 허공처와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諸行(제행)들과 때가 없는 무구(無垢)의 유루(有漏)인 허공처요.
끊어지지 않는 것이란 무루(無漏)의 허공처(虛空處)이며 식처(識處, 식무변처識無邊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도 이와 같으니라.
3도(三道, triṣu mārgeṣu, mārga-traya, three holy paths, three paths)는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수행(修行)의 3단계인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견도(見道, darśana-mārga)는 수행자가 모든 견혹(見惑)에서 벗어나는 지위이다. '진리[諦]를 보는 단계[道]'라는 뜻에서 견제도(見諦道)라고도 하고, '진리를 봄'이라는 뜻에서 견제(見諦)라고도 하며 또한 '견도의 지위'라는 뜻에서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번뇌론과 수행론에 따르면, 모든 견혹은 무루지(無漏智) 즉 무루의 지혜가 최초로 나타나는 순간에 마치 해머로 바위를 산산이 깨뜨리듯이 한꺼번에 끊어진다. 불교에서는 견도를 성취한 유정을 성인 또는 성자라 부른다.
견도(見道)는 부파불교의 수행계위인 성문의 4향4과에서는 수다원향(須陀洹向) 즉 예류향(預流向)에 해당하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5위(五位)의 수행계위에서는 제3위인 통달위(通達位)에 해당하고, 대승불교 일반의 52위(五十二位)의 보살 수행계위에서는 초지(初地), 즉 10지(十地) 가운데 첫 번째 계위, 즉 환희지(歡喜地)에 해당한다.-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