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8

Skunky 2024. 1. 16. 09:00

大智度論釋初品中 三三昧義 第三十二卷 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3. 초품 중 사무량(四無量)의 뜻을 풀이함 3

 

問曰; 悲心 捨心 可知有別, 慈心令衆生樂 喜心令衆生喜 樂與喜有何等異?

묻나니, 가엾고 안쓰럽게 여기는 悲心(비심)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捨心(사심)에 차별이 있음은 알수 있으나,

인자한 慈心(자심)은 중생으로 하여금 즐겁게 하는 것이고, 기뻐하는 喜心(희심)은 중생들로 하여금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즐거움의 樂(락)과 기쁨의 喜(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 身樂名樂 心樂名喜。五識相應樂名樂 意識相應樂名喜。五塵中生樂名樂 法塵中生樂名喜。先求樂 願令衆生得 從樂因令衆生得喜。如人憐愍貧人 先施寶物 是名樂, 後教令賣買 得受五欲樂 是名喜。

답하나니, 몸으로 좋아하는 身樂(신락)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마음으로 좋아하는 心樂(심락)을 기쁨의 희(喜)라 하고,

오식(五識)이 상응하여 좋아하는 것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의식(意識, 뜻)과 상응하여 좋아하는 것을 기쁨의 희(喜)라 하며,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오진(五塵) 을 통해서 생겨나는 좋아하는 느낌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법의 대경= 法塵(법진)을 통해서 가운데 생겨난 좋아하는 느낌을 기쁨의 희(喜)라 하나니,

먼저 즐거움의 낙(樂)을 원하여 구하게 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좇도록 하며, 그로 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기쁨의 희(喜)를 얻게 하는 것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겨 먼저 보물을 베풀어 보시한다면 이를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나중에 가르쳐서 사고 팔 수 있도록 하여 오욕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을 기쁨의 희(喜)라 할 수 있으며, 

 

復次 欲界樂願令衆生得 是名樂, 色界樂願令衆生得 是名喜。

또한 욕계의 즐거움을 원하는 중생들로 하여금 오욕의 좋은 느낌을 얻도록 하는 것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색계의 즐거움을 원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얻게 하는 것을 기쁨의 희(喜)라 하며, 

 

復次 欲界中五識相應樂 初禪中三識相應樂 三禪中一切樂 是名樂,

欲界及初禪意識相應樂 二禪中一切樂 是名喜。麤樂名樂 細樂名喜。

因時名樂 果時名喜。初得樂時是名樂, 歡心內發 樂相外現 歌儛踊躍 是名喜。

譬如初服藥時 是名樂, 藥發遍身時 是名喜。

또한 욕계에서의 오식(五識)이 즐거움과 상응하는 좋은 느낌과 초선(初禪)에서의 심(心) 의(意) 식(識)의 삼식(三識)이 즐거움과 상응하는 좋은 느낌과 삼선(三禪)에서의 일체의 좋은 느낌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욕계 및 초선에 이르기까지 의식(意識)이 즐거움과 상응하는 좋은 느낌과 2선(二禪)에서의 일체의 좋은 느낌을 기쁨의 희(喜)라 하며,

거칠게 느껴지는 좋은 느낌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좋은 느낌을 기쁨의 희(喜)라 하며,

원인일 때의 좋은 느낌을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결과일 때의 좋을 느낌을 기쁨의 희(喜)라 하며,

처음으로 좋은 느낌이 될 때를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환희심이 내면에서 일어나서 좋아하는 모습이 겉으로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추고 뛸 듯이 좋아하는 것을 기쁨의 희(喜)라 하나니,

예를 들자면 처음으로 약을 복용할 때를 즐거움의 낙(樂)이라 하고,

약효가 발생하여 온몸에 두루 퍼지는 때를 기쁨의 희(喜)라 하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 若爾者 何以不和合 二心作一無量 而分別爲二法?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낙(樂)과 희(喜)의 두 마음을 합쳐서 하나의 무량으로 하지 않고, 나누어서 두 가지의 법으로 한 것입니까?

 

答曰; 行者初心未攝 未能深愛衆生故 但與樂, 攝心深愛衆生 故與喜。以是故 先樂而後喜。

답하나니, 수행자가 처음에는 아직 마음을 잘 거두지 못하고 중생들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에 단지 즐거움의 낙(樂)만을 주고, 마음을 거두어 중생을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기쁨의 희(喜)을 주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먼저 즐거움의 낙(樂)을 들고 나중에 기쁨의 희(喜)가 되는 것이다.

 

問曰; 若爾者 何以不慈 喜次第?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사랑하는 자(慈)의 마음 다음에 순서대로 기쁨의 희(喜)를 들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行慈心時 愛衆生如兒子 願與樂。出慈三昧故 見衆生受種種苦 發深愛心憐愍衆生 令得深樂。

譬如父母雖常愛子 若得病急 是時愛心轉重, 菩薩亦如是 入悲心觀衆生苦 憐愍心生 便與深樂 以是故悲心在中。

답하나니, 중생을 사랑하는 慈心(자심)을 행할 때에는 중생을 사랑하기를 마치 자식과 같이 여기어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며,

자삼매(慈三昧)를 통하여 세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중생을 가엾고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으로 깊은 즐거움의 낙(樂)을 얻게 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부모가 비록 자식을 항상 사랑하는 마음이나, 만약 자식이 병에 걸려 위급하여 질 때에는 그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과 같으니,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가엾고 안쓰럽게 여기는 悲心(비심)을 통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관찰하고는 가엾이 여기는 연민의 마음을 내어 문득 깊은 즐거움의 낙(樂)을 주는 것이라.

이러한 까닭에 悲心(비심)이 중간에 있는 것이다.

 

問曰; 若如是深愛衆生 復何以行捨心?

묻나니, 만약 이와 같이 중생들을 깊이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도록 생각하는 捨心(사심)을 다시 행하는 것입니까?

 

答曰; 行者如是觀 常不捨衆生 但念捨是三種心。何以故?妨廢餘法故。

亦以是慈心欲令衆生樂 而不能令得樂, 悲心欲令衆生離苦 亦不能令得離苦,

行喜心時 亦不能令衆生得大喜。此但憶想 未有實事, 欲令衆生得實事 當發心作佛 行六波羅蜜 具足佛法 令衆生得是實樂。以是故 捨是三心 入是捨心。

답하나니, 수행자는 이와 같이 관찰하여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오직 자(慈) 비(悲) 희(喜)의 세 가지 마음을 버려야 하나니, 왜냐하면 다른 법을 방해하여 가로막기 때문이다.

또한 이 慈心(자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낙(樂)을 주고자 하나 즐거움을 얻게 하지 못하고,

悲心(비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게 하려 하나 괴로움을 여의게 하지 못하며,

喜心(희심)을 행할 때에도 역시 중생들로 하여금 큰 기쁨을 얻게 하지 못하나니, 

이러함은 다만 생각일 뿐이요, 아직 실제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의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발심하여 부처가 되게 하여야만 하리니,

육바라밀을 행하고 불법을 갖춘다면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실제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라.

이런 까닭에 자(慈) 비(悲) 희(喜)의 세 가지 마음을 버리는 捨心(사심)에 드는 것이니라.

 

復次 如慈悲喜心愛深故 捨衆生難 入是捨心故易得出離。

또한 자(慈) 비(悲) 희(喜)의 마음은 사랑이 깊기 때문에 중생을 버리기 어렵지만, 이러한 사심(捨心)에 들게 되는 까닭에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問曰; 菩薩行六波羅蜜 乃至成佛 亦不能令一切衆生離苦得樂

何以故 但言“是三心憶想心生 無有實事”?

묻나니,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성불하여 부처를 이루더라도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지는 못하나니, 왜냐하면, 단지 자(慈) 비(悲) 희(喜)의 세 마음은 생각하여 마음 가운데 일어난 것일 뿐 실제로 행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무량심은 사유의 대상일 뿐, 대상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실행체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答曰; 是菩薩作佛時 雖不能令一切衆生得樂 但菩薩發大誓願, 從是大願 得大福德果報, 得大報故 能大饒益。

답하나니,  보살이 부처를 이루고자 할 때에 비록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지는 못하였지만, 보살이 오로지  서원을 세우고, 이러한  서원에 의하여  복덕의 과보를 얻게 되어,  과보를 얻는 까닭에 범부들을 크게 이롭게   있는 것이다.

 

凡夫聲聞行 是四無量 爲自調自利故 亦但空念衆生。諸菩薩行是慈心 欲令衆生離苦得樂, 從此慈心因緣 亦自作福德 亦他作福德 受果報時 或作轉輪聖王 多所饒益, 菩薩或時出家行禪 引導衆生 令行禪 得生淸淨界 受無量心樂。

若作佛時 共無量阿僧祇衆生 入無餘涅槃, 比於空心願益 是爲大利! 乃至舍利餘法 多所饒益。

범부와 성문이 이러한 사무량심(四無量心)을 행함은 스스로를 제어하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이니, 중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이지만,

보살들이 이 자심(慈心)을 행함에는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떠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 인자한 마음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복덕을 짓고 다른 사람도 복덕을 짓게 하는 것이라,

과보를 받을 때에는 혹은 전륜성왕이 되기도 하여 넉넉하게 이익을 주는 바가 많으니, 

보살이 혹은 출가하여 선(禪)을 행하여 중생을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善)을 닦게 하여 청정한 세계에 태어나 한량없는 마음의 즐거움을 얻게 하기도 하며, 

만약 부처를 이룰 때에는 한량없는 아승기(阿僧祇, asaṃkhyeya. 헤아릴 수 없이 많은)의 중생들과 더불어 무여열반에 드나니, 공(空)한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고자 원을 세우나니 이러함으로 커다란 이익을 더해 줄 수 있게 되며, 

나아가서는 사리(舍利)나 그 밖의 다른 법(가르침)으로 이롭게 하는 바가 많게 되느니라.

 

復次 若一佛盡度一切衆生 餘佛則無所復度 是則無未來佛 爲斷佛種 有如是等過。以是故 一佛不度一切衆生

또한, 만약 한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시면 다른 부처님은 제도할 바가 없으리라 한다면, 이는 미래의 부처님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고, 부처의 종자를 끊는 등의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이라.

그러므로 한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復次 是衆生性 從癡而有 非實定法。三世十方諸佛 求衆生實不可得 云何盡度一切!

또한 이러한 중생들의 성품은 어리석음으로부터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결정된 법(실상)이 아니니,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중생을 구할지라도 실로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어찌 일체를 다 제도한다 하겠는가!

 

問曰; 若空 不可得盡度者, 少亦俱空 何以度少?

묻나니, 만일 공(空)하여 다 제도하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적은 수효도 공(空)하기는 마찬가지 이거늘 어찌하여 조금은 제도한다 하는 것입니까?

 

答曰; 我言“三世十方佛 求一切衆生 不可得故無所度”, 汝難言“何以不盡度” 是爲墮負處! 汝於負處不能自拔 而難言, “無衆生中 多少一種 何以度少”, 是爲重墮負處!

답하나니, 나는 말하기를 '시방 삼세의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구하여도 얻는 바가 없기에 (구한 바가 없기에) 제도한 바가 없다' 고 하였다.

하지만 그대는 질문하기를 '어찌하여 다 제도하지 못하는가' 하였으니, 이는 잘못됨에 빠진 것이다.

그대는 이러한 허물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중생 가운데 많거나 적은 것이 일종(一種)이거늘 어찌하여 조금만 제도하는가?'라고 묻고 있으니, 이는 거듭 잘못 됨에 떨어지는 것이다.

 

復次 諸法實相第一義中 則無衆生 亦無度, 但以世俗法故 說言有度。汝於世俗中求第一義 是事不可得, 譬如 瓦石中求珍寶不可得。

또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의 제일의제에는 중생도 없고, 또한 제도한다는 것도 없으나,

다만 세속의 법에 의하는 까닭에 제도함이 있다고 하는 것일 뿐이거늘 그대는 세속의 법에서 제일의제를 구하고 있으니, 그러함은 옳지 못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깨어진 기왓장과 돌 사이에서 귀한 보석을 찾으나 얻을 수 없는 것과도 같으니라.

 

復次 諸佛從初發心 乃至法盡 於其中閒所有功德 皆是作法 有限有量 有初有後 故所度衆生亦應有量 不應以隨因緣果報有量法盡度無量衆生。如大力士 弓勢雖大 箭遠必墮。亦如劫盡大火 燒三千世界 明照無量 雖久必滅。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일체중생구하고자 마음을 일으키신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법이 다함에 (법을 이룸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있는 공덕은 모두가 만들어진 작법(作法)으로서 유량(有量)한 것으로, 그 처음과 마지막이 있음이라. 

따라서 제도할 중생 역시 한량이 있는 유량(有量)한 것이어야 하나니, 인연과보의 유량(有量)한 법을 좇아 무량(無量) 중생을  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마치 힘센 장수의 활이 아무리 세력이 크다 하여 먼 거리를 날아가면 반드시 화살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으며, 

또한 겁(劫)이 다하여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태울 때, 밝게 비추는 광명이 한량없이 오래간다 하여도 반드시 멸하여 꺼지게 되는 것과도 같으니라.

 

菩薩成佛亦如是 從初發意 執精進弓 用智慧箭 深入佛法 大作佛事 亦必當滅。菩薩得一切種智時 身出光明 照無量世界 一一光明變化作無量身 度十方無量衆生, 涅槃後 八萬四千法聚舍利 化度衆生, 如劫盡火照 久亦復滅。

보살의 성불도 이와 같아서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정진의 활을 잡고 지혜의 화살을 써서 깊이 불법 속으로 들어가 큰 불사를 이룩한다 하여도 마침내 반드시 멸하게 되는 것이니, 

보살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을 때는 몸에서 광명이 나와 한량없는 세계를 비추고, 낱낱의 광명이 변화하여 무량한 몸을 만들어 내며,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게 되며,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뒤에는 8만 4천의 법 무더기= 法聚(법취)와 사리로써 중생들을 교화하여도, 겁이 다하는 불이 비추기를 오래하면 끝내는 멸하게 되는 것이다.

 

삼지(三智)에는 일체지(一切智智) . 도종지(道種智) · 일체종지(一切種智)이며,  
*일체지 (一切智 ), 우주의 본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지혜를 불법에서는 '일체지'라고 하며, '지법총상(知法總相)' 즉 '법의 총상(總相)을 아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글자는 불학(佛學)에서 하나의 대명사로서, 전체 우주와 인생의 총대명사입니다.
우주와 인생의 일체의 이론과 일체의 현상, 일체의 과정, 일체의 일체는, 크게는 전체 우주까지 작게는 하나의 미진(微塵)까지, 즉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원자 · 기본 입자까지를 모두 다 '법'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법은 우주만유의 총대명사입니다. 총상(總相)' 은 바로 공통 현상입니다. 어느 법이든 모두 예외가 없는 공통 현상이 있는데, 이 현상을 총상이라 하고, 각각의 법마다 서로 다른 것을 별상(別相) 즉 차별 현상입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 인연으로 생겨난 법은 그 자성이 공하다[綠生性空 ]' 에서, 성공(性空)은 바로 총상이고 연생(綠生)은 바로 별상입니다. -정토심 최희정

*도종지(道種智),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수행을 두루 아는 보살의 지혜.
*일체종지(一切種智). 모든 현상의 전체와 낱낱을 아는 부처의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