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7
大智度論釋初品中 三三昧義 第三十二卷 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3. 초품 중 사무량(四無量)의 뜻을 풀이함 2
復次 一切煩惱心 小人所行 生小事故名爲小 復小於此 故名 瞋恨怨惱。破是小中之小是名“廣”, “大”, “無量”。所以者何?大因緣常能破小事故。
또한 일체의 번뇌심은 소인(小人)들이 행하는 것으로 작은 일을 내기 때문에 소(小)라 하고,
다시 이보다 더 작은 때문에 성냄ㆍ원한ㆍ원망ㆍ번뇌라 하며,
이러한 작은 가운데에서 작은 것을 깨뜨리는 것을 광(廣) 대(大) 무량(無量)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인연이 크면 항상 작은 일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며,
“廣心”者 畏罪畏墮地獄故 除心中惡法, “大心”者 信樂福德果報故 除惡心, “無量心”者 爲欲得涅槃故 除惡心。
넓은 마음= 廣心(광심)이란 죄를 두려워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속의 삿됨= 惡法(악법)을 제거하여 없애는 것이요,
큰 마음= 大心(대심)이란 복덕의 과보를 믿고 즐기어 악심(惡心)을 제거하는 것이요,
한량없는 마음= 無量心(무량심)이란 열반을 얻기 위하여 악심(惡心)을 제거 하여 없애는 것이다.
復次 行者持戒淸淨故 是“心廣”, 禪定具足故 是“心大”, 智慧成就故 是“心無量”。
또한, 수행자는 계행을 청정(淸淨)하게 지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넓으며,
선정을 구족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크고, 지혜를 성취한 까닭에 그 마음이 무량하며,
以是慈心 念得道聖人 是名“無量心” 用無量法分別聖人故, 念諸天及人尊貴處故 名爲“大心”, 念諸餘下賤衆生及三惡道 是名廣心。
이렇게 자심(慈心)으로써 도(道)를 얻은 성인을 생각하는 것을 無量心(무량심)이라 하나니, 무량(無量)함으로써 성인을 분별하는 까닭이며,
모든 하늘과 사람의 존귀한 곳을 생각하는 까닭에 큰 마음=大心(대심)이라 하며,
그 밖의 나머지 하천한 중생과 삼악도를 생각하는 것은 넓은 마음= 廣心(광심)이니라.
於所愛衆生中 以慈念廣於念已故 名爲“廣心”, 以慈念中人 是名“大心”, 以慈念怨憎 其功德多故 名“無量心”。
중생을 사랑함에 있어서 자애로운 생각을 가지되 자신보다 넓게 생각하기 때문에 넓은 마음= 廣心(광심)이라 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맞추기 때문에 큰 마음=大心(대심)이라 하고,
인자한 생각으로 원망과 미움을 이겨내어, 그 공덕이 많게 된 까닭에 한량없는 마음= 無量心(무량심)이라 하며,
復次 爲狹緣心 故名爲“廣”, 爲小緣心 故名爲“大”, 爲有量心故 名爲“無量”。
如是等分別義。
또한, 반연하는 마음이 좁은 까닭에 넓을 광(廣)이라 하고,
반연하는 마음이 작은 까닭에 클 대(大)라 하고,
넓은 마음이기 때문에 한량이 없는 무량(無量)이라 하며,
이와 같은 것들이 이치를 분별하여 정의하는 것이니라.
“善修”者 是慈心牢固。初得慈心 不名爲修。非但愛念衆生中、非但好衆生中、非但益己衆生中、非但一方衆生中名爲“善修”,
‘잘 닦는= 善修(선수)’라 함이란, 중생에 대하여 이러한 자심(慈心)이 견고해지는 것이니,
처음으로 자심(慈心)을 얻은 것은 닦음=修(수)라 하지는 않나니,
단지 중생을 사랑하는 생각만이 아니고, 단지 중생을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에게 이로움을 더해주는 중생에 대한 것도 아닌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一方(일방)의 중생에 대한 것이 아닌 것을 일컬어 ‘잘 닦는= 善修(선수)’라 하는 것이니,
久行得深愛樂,愛憎及中三種衆生,正等無異。十方五道衆生中,以一慈心視之 如父如母 如兄弟 姊妹 子姪 知識 常求好事 欲令得利益安隱。如是心遍滿十方衆生中。如是慈心,名“衆生緣”。多在凡夫人行處,或有學人未漏盡者行。姪 조카 질
오랫동안 행하게 되면 그 얻음이 깊으니, 애락과 애증 및 그 중간의 세 종류의 중생에 대하여 차별없이 동등하게 대하게 되며,
시방의 오도(五道)의 중생을 동등하게 다름이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보게 되니, 마치 부모ㆍ형제ㆍ자매ㆍ자식ㆍ조카ㆍ친지와 같이 생각하며,
항상 좋은 일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로움과 평온함을 얻게 하고자 하나니,
이와 같이 마음이 시방의 중생에 대한 생각으로 두루 가득하게 되는 자심(慈心)을 중생연(衆生緣)이라 하는 것이며,
이는 대체로 범부들의 행하는 경지이거니와, 혹은 배울 것이 있는 학인(學人)으로서 아직 누(漏)가 다하지 못한 이들이 행하여야 하는 경지에 속하며,
“法緣“者 諸漏盡阿羅漢 辟支佛 諸佛。是諸聖人破吾我相 滅一異相故, 但觀從因緣相續生諸欲。以慈念衆生時 從和合因緣相續生 但空五衆卽是衆生 念是五衆。
법연(法緣)이란, 모든 샘=漏(누, 유루有漏)가 다한 아라한ㆍ벽지불ㆍ부처님들이니,
이와 같은 성인들은 “나”와 “내 것”이라는 상(相)을 깨뜨렸고, 같다 다르다 하는 상(相)을 멸한 까닭에 오직 인연의 상속을 따라 모든 욕망이 생함을 관찰하나니,
그러한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을 생각할 때에, 인연을 따라 화합된 인연의 상속에 의하여 생겨난 오온(五蘊)이 곧 중생이니, 이렇게 5중(오온)을 오직 공(空)한 것이라 생각하며,
以慈念衆生不知是法空 而常一心欲得樂, 聖人愍之 令隨意得樂 爲世俗法故, 名爲“法緣”。
중생들은 이렇게 인연화합에 의한 법의 공함을 알지 못하고 항상 일심으로 쾌락을 얻으려고만 하니, 성인은 그들을 가엾이 여기어 생각에 따라 즐거움을 얻게 하나니, 그것이 세속의 법이기 때문에 (그에 반하여) 이를 법연(法緣)이라 하며,
“無緣”者 是慈但諸佛有。何以故 諸佛心不住有爲無爲性中 不依止過去世 未來現在世, 知諸緣不實 顚倒虛誑故 心無所緣。
무연(無緣)이라 함이란, 이러한 자심(慈心)은 부처님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부처님들의 마음은 유위(有為)나 무위(無爲)의 성품(자성)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모든 인연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며, 전도되어 허망한 것임을 아시니
마음으로 반연하여 (취하고 버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佛以衆生不知是諸法實相 往來五道 心著諸法 分別取捨, 以是諸法實相智慧 令衆生得之 是名“無緣”。
부처님은 중생들이 이러한 제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여 오도(五道)를 왕래하면서 마음이 제법에 집착하여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제법의 실상을 아시는 지혜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이를 얻게 하시니, 이를 무연(無緣)이라 하나니,
譬如給賜貧人 或與財物 或與金銀寶物 或與如意眞珠, 衆生緣 法緣 無緣 亦復如是。是爲略說慈心義。
비유하자면,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 줄 때에 혹은 재물을 주거나 혹은 금은보물을 주거나 혹은 여의주를 주는 것과도 같으니, 중생연(衆生緣) 법연(法緣) 무연(無緣) 역시 이와 같은 것이라.
이와 같이 자심(慈心)의 정의를 간략히 설명하였느니라.
修慈心 爲除衆生中瞋覺故 자심(慈心)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생각을 없애기 위함이요,-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6
悲心義亦如是, 以憐愍心 遍觀十方衆生苦 作是念, 衆生可愍 莫令受是種種苦 無瞋 無恨 無怨 無惱心 乃至十方亦如是。
비심(悲心) 역시 이와 같으니, 가엾고 어여삐 여기는= 憐愍(연민)의 마음으로 시방 중생들의 고통을 두루 관찰하고는 이러함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중생들이 가엾기도 하니, 이러한 갖가지 고통을 받게 하지 않으리니, 성냄도 없고 한도 없으며 원망도 없고 남을 괴롭히는 마음이 없는 것이 시방에 까지 이르게 하리라.'하는 것이니라.
修悲心 爲除衆生中惱覺故 비심(悲心)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번거롭다는 생각을 제하기 위함이요,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6
問曰, 有三種衆生, 有受樂 如諸天及人少分, 有受苦 如三惡道及人中少分, 有受不苦不樂 五道中少分。云何行慈者觀一切衆生皆受樂?行悲者觀一切衆生皆受苦?
묻나니, 세 종류의 중생이 있으니,
곧 즐거움을 받는 이로서 모든 하늘과 인간의 일부분이요,
괴로움을 받는 이로서 삼악도 및 인간의 일부분이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 이로서 오도(五道)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悲)를 행하는 이는 일체 중생이 모두 즐거움을 받는다고 관찰하고,
비(悲)를 행하는 이는 일체 중생이 모두 괴로움을 받는다고 관찰하는 것입니까?
答曰; 行者欲學是慈無量心時 先作願, “願諸衆生受種種樂" 取受樂人相 攝心入禪 是相漸漸增廣 卽見衆生皆受樂。譬如鑽火 先以軟草 乾牛屎 火勢轉大 能燒大濕木。
답하나니, 수행자는 이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배우고자 할 때에 먼저 서원을 세우되 '원하건대 중생들로 하여금 갖가지 즐거움을 받게 하리라' 하고는 즐거움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선정에 드나니, 이 모습이 점점 늘어나면 곧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불을 지필 때 먼저 보드라운 풀이나 마른 쇠똥으로 불을 일으키거니와 불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 능히 젖은 큰 나무를 태울 수도 있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慈三昧亦如是 初生慈願時 唯及諸親族 知識, 慈心轉廣 怨親同等 皆見得樂 是慈禪定增長成就故。
자삼매(慈三昧)도 이와 같아서 처음에 인자한 慈(자)의 마음으로 서원을 세울 때에는 여러 친척이나 아는 이들에게만 미치다가, 인자한 마음이 더욱 넓어지면 원수와 친한 이가 동등하게 모두 즐거움을 얻음을 보게 되나니,
이는 자(慈)의 선정이 늘어나고 성취되었기 때문이니,
悲、喜、捨心亦如是。
비심(悲心)과 희심(喜心) 사심(捨心) 역시도 이와 같으니라.
修喜心 爲除不悅樂故 희심(喜心)을 닦는 것은 함께 기뻐하지 못함을 제하기 위함이요,
修捨心 爲除衆生中愛憎故 사심(捨心)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한 사랑도 미움도 제하기 위함이라.
問曰; 悲心中取受苦人相 喜心中取受喜人相 捨心中取何等相?
묻나니, 비심(悲心)에서는 괴로움과 고통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희심(喜心)에서는 기쁨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거니와
사심(捨心)에서는 어떤 모습을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答曰; 取受不苦不樂人相 行者以是心漸漸增廣 盡見一切受不苦不樂。
답하나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니, 수행자는 이 마음이 점차 늘어나게 하여 모두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問曰; 是三種心中應有福德 是捨心於衆生 不苦不樂 有何等饒益?
묻나니, 자(慈) 비(悲) 희(喜)의 세 가지 마음에는 마땅히 복덕이 깃들어 있어야 하거니와,
이 사심(捨心)은 중생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거늘 어떠한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넉넉하게 이익을 주는= 饒益(요익)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 行者作是念, “一切衆生離樂時得苦 苦時卽是苦 得不苦不樂則安隱" 以是饒益。行者行慈 喜心 或時貪著心生, 行悲心 或時憂愁心 生以是貪憂故心亂。入是捨心 除此貪憂 貪憂除故名爲捨心。
답하나니,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은 즐거움을 여읠 때에는 괴로우며, 괴로울 때에는 그대로가 괴로움이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면 곧 안온하다’고 하게 되나니, 이로써 饒益(요익)을 삼으며,
수행자가 자(慈) 희(喜)의 마음을 행할 때에, 때로는 탐착(욕심)의 마음이 일어나고, 비심(悲心)을 행할 때에 때로는 근심과 슬픔의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나니,
이러한 탐착(욕심)과 근심으로 마음이 산란하여지면, 이 버리는 마음의 사심(捨心)으로 들어가 탐착과 근심을 제거하나니, 탐착(욕심)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까닭에 이를 일컬어 사심(捨心)이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