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13
大智度論釋初品中 三十七品義 第三十一卷第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1. 초품 중 삼십칠품(三十七品)의 뜻을 풀이함 13
八聖道分者 正見 正方便 正念 正定 上已說, 正思惟今當說。
8성도분(八聖道分)이라 함은 정견(正見)ㆍ정방편(正方便)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니, 이제 정사유(正思惟)만을 설명하리라.
菩薩於諸法 空無所得 住如是正見中 觀正思惟相。知一切思惟 皆是邪思惟 乃至思惟涅槃 思惟佛皆亦如是。
보살은 제법이 공(空)하여 얻을 바 없음에 머무르나니, 이러한 정견 가운데서 정사유의 모습을 관찰하여, 일체의 사유가 모두 삿된 사유임을 아나니, 나아가 열반을 사유하고 부처를 사유함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하나니,
何以故, 斷一切思惟分別 是名正思惟。諸思惟分別 皆從不實虛誑顚倒故有 分別思惟相皆無。
왜냐하면 일체의 사유(思惟)를 통하여 분별을 끊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 하기 때문이니,
사유와 분별은 모두가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되고 전도된 것을 따르기 때문에 유(有)가 있는 것이나, 분별하고 사유하는 모습이란 모두 없는 것이니라.
菩薩住如是正思惟中 不見是正是邪 過諸思惟分別 是爲正思惟。
一切思惟 分別皆悉平等 悉平等故心不著。如是等 名爲菩薩正思惟相。
보살은 이처럼 정사유(正思惟) 가운데 머물러서 이것이 바른 것이고 저것은 삿된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지 않아 모든 사유와 분별을 초월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이며,
일체의 사유와 분별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며,
평등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으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보살의 정사유의 모습= 正思惟相(정사유상)이라 하느니라.
正語者 菩薩 知一切語 皆從虛妄不實顚倒 取相分別生 是時菩薩作是念,
語中無語相 一切口業滅 知諸語實相 是爲正語. 是諸語皆無所從來 滅亦無所去。
정어(正語)라 함이란, 보살은 일체의 말이란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전도 된 것을 따라 모습(相)을 취하고 분별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임을 알아,
이 때에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나니,
‘말함= 語(어)에는 말의 모습 語相(어상)이 없는 것이라 일체의 구업(口業)이 멸하고 모든 말의 진실한 모습을 아는 이것이 정어(正語)이니, 이러한 말은 모두가 온 곳도 없고, 또한 사라져도 가는 곳도 없는 것이라.
是菩薩行正語法 諸有所語 皆住實相中說, 以是故諸經說, '菩薩住正語中 能作淸淨口業'
知一切語言眞相 雖有所說 不墮邪語。
이러한 보살이 정어(正語)의 법을 행하여 말을 한다면, 이는 모두 실상 가운데 머물면서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경(經)에서 말하기를 '보살이 정어에 머무르면 청정한 구업을 짓게 되고, 일체의 언어= 語言(어언)의 실상을 알게 되며, 비록 말하는 바가 있으나 삿된 말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느니라.
語言眞相(어언진상)= 경(經) 율(律) 론(論) 삼장
正業者 菩薩知一切業邪相 虛妄無實 皆無作相。何以故, 無有一業可得定相。
정업(正業)이라 함이란, 보살은 일체의 업(業)은 삿된 모습이고, 허망하고 진실함이 없으며, 모두가 인연화합의 현상과 작용이 없는 무작(無作)임을 아나니, 왜냐하면 어떠한 업(業)도 정해진 상(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問曰, 若一切業皆空 云何佛說 '布施等是善業 殺害等是不善業 餘事動作是無記業'?
묻나니, 만일 일체의 업(業)이 모두 공(空)하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시 등은 착한 업이고, 살생 등은 나쁜 업이고, 그 밖의 동작은 무기업이다' 하신 것입니까?
答曰, 諸業中 尚無有一 何況有三! 何以故, 如行時已過則無去業 未至亦無去業 現在去時亦無去業, 以是故無去業。
답하나니, 모든 업 가운데는 하나조차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셋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행하는 순간= 行時(행시)가 이미 지났다면 과거의 업=去業(거업)은 없는 것이요,
아직 이르지 않은 미래에 과거의 업=去業(거업)이 있을 수 없을 것이요,
현재의 흘러가고 있는 때에도 역시 과거의 업=去業(거업)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去業(거업)은 없는 것이니라.
問曰, 已過處則應無 未至處亦應無 今去處應是有去!
묻나니, 이미 지나간 곳에는 마땅히 없는 것이며, 아직 이르지 않은 곳 역시 없는 것이지만, 지금 지나가는 곳이라면 마땅히 지나가고 있는 업이 있어야 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今去處亦無去。
何以故, 除去業 今去處不可得, 若除去業 今去處可得者 是中應有去 而不然。
除今去處則無去業 除去業則無今去處, 是相與共緣故 不得但言 今去處有去。
답하나니, 지금 지나가는 곳= 去處(거처)에 역시 去業(거업)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去業(거업)이 사라지게 되면 그 업도 사라져 없어지게 되는 것이나,
만약 去業(거업)이 사라진 뒤에도 그 거업이 지나간 去處(거처)를 지금 얻을 수 있다면,
여기에 마땅히 ‘간다는 것=去(거)’가 있어야 할 것이나,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지금의 지나가는 곳= 去處(거처)를 제외하면 곧 去業(거업)도 없는 것이고,
去業(거업)을 제외하면 곧 지금의 지나가는 곳= 去處(거처)도 없는 것이니,
이들은 서로 반연하는 것인 까닭에 去處(거처)에 감이 있다는 것만을 말 할 수 없느니라.
(지금이 과거가 있던 곳일지라도 과거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나니, 왜냐하면 과거가 사라져 없어지게 되면 업(業)도 사라져 없어지게 되거니와 지금이 과거가 있던 곳이나 그 어디에서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을 얻지 못하나니, 만약 과거가 사라져 없어지게 될지라도 업(業)은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이라면 지금이 과거가 있던곳이므로 그 어딘가에서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함을 통해서 보면 과거의 그 어딘가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사라져 없어진 과거가 있던 곳으로 즉 과거와 업(業)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나니, 과거가 사라져 없어지게 되면 업(業)도 사라져 없어지게 되어 즉 지금이 과거가 있던 곳이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으로, 이렇게 실상(實相)은 업(業)과 함께 마무리와 되갚음을 갈무리하고 있는 까닭에 부득이하게 오로지 말로 “지금이 과거가 머물던 곳으로 과거의 업(業)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만약 지금이 과거가 머물 던 곳인데도 과거의 업(業)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면 업(業)이 과거를 여의었으므로 마땅히 지금이라는 과거가 머물 던 곳에 있게 된 것이며, 지금이 과거가 머물던 곳을 여의었으므로 마땅히 과거의 업(業)이 고스란히 있게 된 것입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復次 若今去處有去業 離去業應當有今去處 離今去處應當有去業。
또한 만약 지금의 지나 가는 곳= 去處(거처)에 去業(거업)이 있다면 去業(거업)을 떠나서 마땅히 지금 가는 곳이 있어야 하고, 지금의 가는 곳을 떠나서도 마땅히 지난 업이 있어야 하리라.
問曰, 若爾者 有何咎?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答曰, 一時有二去業故。若有二去業 則有二去者。
何以故, 除去者則無去。若除去者 今去處不可得, 無今去處故 亦無去者。
답하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한 때에 두 가지 거업(去業)이 있게 되는 때문이다.
만약 두 가지의 거업(去業)이 있다면, 두 가지 가는 이=去者(거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去者(거자)를 제하고는 감도 없고, 去者(거자)를 제하고는 지금의 가는 곳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지금의 가는 곳= 去處(거처)가 없는 까닭에 去者(거자)도 없는 것이니라.
復次 不去者亦不去 故無去業。若除去者 不去者 更無第三去者。
또한 가지 않는 이 不去者(불거자)역시 가지 않는 까닭에 거업(去業)이 없나니,
만약에 去者(거자)와 不去者(불거자)를 제하면 제 삼의의 去者(거자)는 없는 것이라.
問曰, 不去者不去應爾 去者何以故言不去?
묻나니, 不去者(불거자)는 가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去者(거자)를 어찌하여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 除去業 去者不可得, 除去者 去業不可得。
답하나니, 거업(去業)을 제하고는 去者(거자)를 얻을 수 없고, 去者(거자)를 제하고서는 거업(去業)도 얻을 수 없느니라.
如是等一切業空 是名正業。諸菩薩入一切諸業平等 不以邪業爲惡 不以正業爲善,
無所作 不作正業 不作邪業 是名實智慧 卽是正業。
이와 같이 일체의 업이 공한 것을 정업(正業)이라 하나니,
보살들은 일체의 업의 평등함에 들어가서 삿된 업=사업(邪業)으로써 악을 이루지 않고, 바른 업= 정업(正業)으로써 선을 이루고자 하지 않으니, 곧 짓는 바가 없어서 바른 업도 짓지 않고 삿된 업도 짓지 않나니,
이러함을 진실한 지혜라 하며, 이러함이 곧 정업(正業)이니라.
復次 諸法等中無正無邪 如實知諸業, 如實知已 不造不休。
如是智人常有正業 無邪業 是名爲菩薩正業。
또한 제법의 평등함 가운데에는 정(正)도 없고 사(邪)도 없으니,
한결같이 여실하게 모든 업을 알며, 여실하게 한결같음을 알고 난 뒤에는 짓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니,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항상 정업만을 갖추어 있고 삿된 업은 없으니,
이러함을 일컬어 보살의 정업(正業)이라 하며,
正命者 一切資生活命之具 悉正不邪。
住不戲論智中 不取正命 不捨邪命 亦不住正法中 亦不住邪法中。
常住淸淨智中 入平等正命 不見命 不見非命。行如是實智慧 以是故名正命。
정명(正命)이라 하는 것이란, 보살은 일체의 생활수단이 모두 바르고 삿되지 않으며, 희론 아닌 지혜에 머물러서 정명(正命)을 취하고자 하지도 않고 삿된 생활 방법을 버리고자 하지도 않으며,
또한 정법(正法)에 머무르지도 않고 삿된 법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항상 청정한 지혜에 머물러서 평등한 정명(正命)에 들어가나니,
곧 정명(正命)과 사명(邪命)을 구별하여 보지 않으니 (중도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진실한 지혜를 행하므로 정명(正命)이라 하며,
若菩薩摩訶薩 能觀是三十七品 得過聲聞 辟支佛地 入菩薩位中 漸漸得成一切種智。
만약 보살마하살이 능히 이렇게 37조도품을 관한다면 성문ㆍ벽지불의 경지를 뛰어 넘게 되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점차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게 되느니라.
大智度論卷第十九 終 대지도론 제19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