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18권 3
大智度論釋初品中 般若波羅蜜 第二十九 卷第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0. 초품 중 반야(般若)의 모습[相]과 뜻[義]을 풀이함 2
問曰, 若如所說 一切智慧盡應入 若世閒 若出世閒 何以但言 '三乘智慧盡到其邊', 不說餘智?
묻나니, 만약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일체지혜(一切智慧)는 세간이나 출세간에 모두 들어가야 하거늘, 어찌하여 '삼승의 지혜만이 그 궁극에 이른다' 하시고, 다른 지혜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三乘是實智慧 餘者皆是虛妄 菩薩雖知 而不專行。
如除摩犂山 一切無出栴檀木, 若餘處 或有好語 皆從佛法中得 自非佛法
初聞似好 久則不妙。譬如牛乳 驢乳 其色雖同, 牛乳攢則成酥 驢乳攢則成尿。驢 당나귀 려
답하나니, 3승(三乘)이 곧 실다운 지혜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보살은 비록 그러함을 알지라도 오로지 그것만을 행하지는 않으니,
마치 인도의 남쪽에 있는 전단향의 주산지인 마리산(摩梨山, Malaya, 마라야산摩羅耶山)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전단(栴檀)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과 같으니,
혹 다른 곳에 좋은 말씀이 있다 하여도 (그 근원은) 모두가 불법에서 얻게 된 것으로, 그 자체가 불법(佛法)인 것은 아님에, 비록 처음 들을 때에는 좋은 것 같으나 오래지 않아 묘하지 않게 됨을 비유하자면, 소젖이나 당나귀의 젖과도 같음이라. 비록 그 빛깔은 같으나 우유는 저어서 숙성시키면 요거트=酥(락)이 되고 당나귀의 젖은 저어서 숙성시키면 오줌이 되고 마나니,
佛法語 及外道語 不殺 不盜 慈愍衆生 攝心 離欲 觀空雖同,
然外道語 初雖似妙 窮盡所歸 則爲虛誑。
불법(佛法)의 말씀과 외도(外道)의 말에서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중생을 가엾이 여기라,’ ‘마음을 거두어 모으라,’ ‘욕심을 여의라,’ ‘공을 관하라’ 고 하는 것은 비록 같으나, 외도의 가르침은 처음에는 묘한 듯하다가도 그 귀추를 끝까지 따지게 되면 마침내에는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니라.
一切外道 皆著我見, 若實有我 應墮二種, 若壞相 若不壞相。
若壞相 應如牛皮, 若不壞相 應如虛空。此二處無殺罪 無不殺福。
일체의 외도들은 모두가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소견=我見(아견, ātma-dṛṣṭi)에 집착되어 있으니, 만약 실제로 '나'가 있다면 응당 두 가지의 견해, 즉 무너지는 형상=壞相(괴상, 단멸견斷滅見)과 무너지지 않는 형상=不壞相(불괴상,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되나니,
만약에 무너지는 壞相(괴상, 단멸견斷滅見)이라면 응당 쇠가죽과 같아야 하고, 무너지지 않는 不壞相(불괴상, 상견常見)이라면 응당 허공과 같아야 하나니,
이 두가지 소견에는 살생의 죄=殺罪(살죄)도 없고 불살생의 복=不殺福(불살복)도 없는 것이라.
若如虛空 雨露不能潤 風熱不能乾 是則墮常相。
若常者 苦不能惱 樂不能悅, 若不受苦樂 不應避禍就福。
만일 허공과 같다면 비나 이슬이 적시지 못하고 바람과 열기가 마르게 하지도 못할 것이니, 이는 항상한 모습=常相(상상)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며,
만일 항상한 常相(상상)이라면 고통을 괴로운 것으로 받아 들이지 못할 것이고, 즐거움을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니, 고와 낙을 받아들여 느낄수 없다면 재앙을 피하고 복을 향해 나아감이 있을 수 없으며,
若如牛皮 則爲風雨所壞 若壞則墮無常 若無常則無罪福。
外道語 若實如是 何有不殺爲福 殺生爲罪?
만일 쇠가죽과 같다면 비바람에 무너지게 될 것이요, 무너진다면 무상(無常)에 떨어지 되니, 무상(無常)한 것이라면 죄도 복도 없는 것이 되나니,
그러므로 외도는 '만일 진실로 이러할진대 어찌하여 불살생이 복이 되고, 살생이 죄가 되리오' 라고 말하는 것이다.
問曰, 外道戒福 所失如是 其禪定 智慧復云何?
묻나니, 외도의 계율과 복에 이러한 허물됨이 있다면, 그들의 선정과 지혜는 어떠합니까?
答曰, 外道以我心 逐禪故 多愛 見 慢故 不捨一切法故 無有實智慧。
답하나니, 외도는 '나'를 내세우는 마음으로 선정을 추구하는 까닭에, 애착ㆍ견해ㆍ교만이 많은 연유로 일체의 법을 버리지 못하여 실다운 지혜가 없느니라.
問曰, 汝言 外道觀空 觀空則捨一切法, 云何言 '不捨一切法故 無有實智慧'?
묻나니, 말씀하시기를 ‘외도는 공(空)을 관찰한다’ 하셨는데, 공(空)을 관하게 되면 곧 일체법(一切法)을 버리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일체법을 버리지 못해서 진실한 지혜가 없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外道雖觀空 而取空相 雖知諸法空 而不自知我空 愛著觀空智慧故。
답하나니, 외도는 비록 공(空)을 관찰하나 그 공(空)의 모습을 취하나니, 비록 제법이 공(空)함을 알기는 하되 '나'라는 것이 공(空)한 것임을 몰라서 공(空)을 관하는 지혜=觀空智慧(관공지혜)에 애착하기 때문이다.
問曰, 外道 有無想定 心心數法都滅, 都滅故 無有取 相愛著智慧咎!
묻나니, 외도에는 일체의 마음작용이 모두 그친 선의 경지인= 無想定(무상정, asaṃjñi-samāpatti)이 있어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心數法(심수법)이 모두 멸하였으며, 모두 멸하였기 때문에 相(상)을 취하거나 지혜에 애착하는 허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答曰, 無想定力 强令心滅 非實智慧力。又於此中 生涅槃想 不知是和合作法 以是故墮顚倒中, 是中心雖暫滅 得因緣還生。譬如人無夢睡時 心想不行 悟則還有。
답하나니, 無想定(무상정)의 힘으로 억지로 마음을 사라지게 (갈아 앉게) 하는 것이니 실다운 지혜의 힘이 아니며, 또한 여기에서 (무상정을 통하여) 열반이라는 생각을 내나니, 그러함이 생각이라는 현상과 작용(法)에 '나'라는 마음이 화합하여 지어낸 것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전도(顚倒)하여 두 가지의 변견(邊見, 상견과 단멸견)에 빠지게 되나니,
무상정의 힘으로 마음이 잠시 사라지기는 하였으나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다시 생겨나게 되나니, 마치 사람이 꿈 없이 잠을 잘 때에는 마음 속의 생각= 心想(심상)이 움직이지 않다가 깨어나면 다시 생겨나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 無想定 其失如是 更有 非有想非無想定 是中無一切妄想 亦不如强作 無想定滅想 是中以智慧力故 無想.
묻나니, 무상정(無想定)의 허물됨은 그러하다 하여도 다시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선정=定(정)이 있나니, 비유상비무상정 가운데에는 일체의 망상이 없으며, 또한 억지로 무상정과 같이 생각을 멸하고자 하지도 않는 것이며, 비유상비무상정에서는 지혜의 힘 때문에 무상(無想)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미세하게 생각이 이어지나 번뇌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非有想(비유상)이라 하고, 생각이 미세하게 남아있는 까닭에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非無想(비무상)이라 함- 마하반야바라밀다경
答曰, 是中有想 細微故不覺。若無想 佛弟子復何緣 更求實智慧?
佛法中 是非有想非無想中識 依四衆住, 是四衆屬因緣故 無常, 無常故苦, 無常苦故空, 空故無我, 空無我故可捨。
汝等愛著 智慧故 不得涅槃。
답하나니, 그러함에도 생각이 있으나 미세하여 깨닫지 못할 뿐이다. 만약 생각이 없다면 불제자들은 무엇을 반연으로 삼아 더욱 진실한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것인가?
불법(佛法)에서는 이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의식=識(식)이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의 4중(四衆)에 의지하여 머문다고 하였는데, 이 4중(四衆)은 인연에 속하는 까닭에 무상한 것이며, 무상하므로 괴로운 것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며, 공한 것이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공(空)하여 무아(無我)인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 것이나,
그대들은 지혜에 애착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
譬如尺蠖 屈安後足 然後進前足, 所緣盡 無復進處而還。
外道依止初禪 捨下地欲 乃至 依非有想非無想處 捨無所有處,
上無所復依 故不能捨 非有想非無想處。以更無依處 恐懼失我 畏墮無所得中故。
비유하자면, 마치 자벌레=尺蠖(자확, 자나방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려 뒷발을 편안케 한 뒤에 앞발을 내밀어 나아가는 것과 같으니, 반연할 곳이 다하여 더 나아갈 곳이 없으면 돌아오게 되는 것과 같이
외도는 초선에 의지하여 아래 경지(境地)의 욕망을 버리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 구차제정의 8번째)에 이르기까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구차제정의 7번째)을 의지하여 버릴 것을 버리나, 다시 그 위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멸진정이므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定)를 버리지 못하나니,
다시 더 의지할 곳이 없어 '나'를 잃을까 두려워 하니, 얻을 것이 없는 경지=無所得(무소득, 무소유, 공 또는 무소유처)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니라.
무소득(無所得)이란 산스크리트어 시마티가(simatiga)를 번역한 말인데, 무소유(無所有)도 같이 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도 무소득(無所得)을 무소유(無所有)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두 낱말이 같은 뜻이란 것이다.
일반용어로는 ‘얻은 것이 없는 상태’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단순하게 ‘얻은 것이 없음, 소유하지 않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물욕(物慾)을 내지 않는다는 뜻보다는, 얻으려는 대상, 가지려고 하는 대상이 모두 공(空)이라는 이치를 터득했을 때, 얻을 것이 없음을 알고, 무엇을 가지려고 집착하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여기서 ‘무소유(無所有)’의 불교적 의미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에서 비롯된 가르침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갈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소유를 포기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무소유는 포기가 아니다. 유의미한 소독⋅소유는 인정한다. 가령 사찰에서 도서관을 설립해 책을 많이 수집해 공부하는 자료로 제공하는 것은 유의미한 소유요 소득이다. 지니친 물욕을 경계하는 것이다.
‘제법(諸法)이 공성(空性)인데 무엇을 얻고, 무엇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는 경지, 그리고 이와 같이 얻을 바 없는 공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무소유처(無所有處)라고 하면 삼매의 경지를 뜻한다. 번뇌가 소멸돼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범부중생이 살고 있는 현상의 세계는 어떠한가. 본래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 무소유인 공의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그들 삶의 목적이 오직 소득⋅소유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 아미산
復次 外道經中 有聽 殺盜婬妄語飮酒。言爲天祠 呪殺無罪, 爲行道故 若遭急難 欲自全身 而殺小人無罪。
또한 외도의 경(經)에는 살생ㆍ투도ㆍ음행ㆍ망어ㆍ음주 등을 허용하는 (들어주어도 된다) 말이 있으니,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사당에서 죽이는 것은 죄가 없으며, 도를 행하기 위해서나 위중한 환난을 만났을 때 스스로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소인(小人)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 無罪(무죄)라고 하며,
又有急難 爲行道故 除金 餘者得 盜取以自全濟 後當除此殃罪。殃 재앙 앙
또한 위급한 환난(재난)이 있거나 도를 행하기 위하여 금(金)을 제외한 그 밖의 것들은 훔칠 수 있나니, 그로써 스스로를 온전하게 구제하게 되면 그 뒤에 이 재앙의 죄를 당연히 제해야 하며(갚아야 하며),
除師婦 國王夫人 善知識妻 童女 餘者逼迫急難 得邪婬。
또한 핍박이나 위급한 환난을 당했을 때에는 스승의 부인이나 국왕의 부인이나 선지식의 부인이나 어린 소녀를 제외한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삿된 음행을 할 수 있으며,
爲師及父母 爲身 爲牛 爲媒 故聽妄語。
스승을 비롯한 부모를 위하거나 자신과 소를 위하거나 혹은 중개=媒(매) 때문이라면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寒鄕 聽飮石蜜酒, 天祠中 或聽嘗一渧 二渧酒。嘗 맛볼 상
추운 지역에서는 꿀을 넣은 엿술=石蜜酒(석밀주)를 마셔도 좋으며,
제사를 지내는 사당=天祠(천사)에서는 한 두 방울의 술을 맛보아도 좋다고 하나,
佛法中則不然。於一切衆生 慈心等視 乃至 蟻子亦不奪命 何況殺人!
一鍼一縷不取 何況多物!
불법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나니, 일체 중생을 인자한 마음으로 평등하게 보아서 개미에 이르기까지도 그 생명을 빼앗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을 죽이는 것이겠는가!
바늘 하나, 실 한 올이라도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거늘 하물며 많은 물건이겠는가!
無主婬女 不以指觸, 何況人之婦女! 戲笑不得妄語 何況故作妄語!
임자 없는 음녀일지라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의 아내이겠는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고의로 거짓말을 하겠는가!
一切酒 一切時 常不得飮 何況寒鄕 天祠! 汝等外道 與佛法懸殊 有若天地!
일체의 술을 어떠한 때에도 마시지 않거늘 하물며 추운 지방이나 사당 안에서 이겠는가!
그대들 외도는 불법에서 아득히 먼 것이, 마치 하늘과 땅의 사이와 같구나!
汝等外道法 是生諸煩惱處, 佛法則是滅 諸煩惱處 是爲大異。
그대들 외도의 가르침(법)은 모든 번뇌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요,
불법(佛法)은 곧 모든 번뇌를 멸하는 것이라. 이러함이 크게 다른 점이니라.
諸佛法無量 有若大海 隨衆生意故 種種說法。或說有 或說無, 或說常 或說無常,
或說苦 或說樂, 或說我 或說無我, 或說懃行三業 攝諸善法, 或說一切諸法 無作相。
모든 불법(佛法)은 무량하여 마치 큰 바다와 같으니, 중생들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갖가지의 법을 설하나니, 혹은 유(有)를 설하고 혹은 무(無)를 설하며, 혹은 항상 함=常(상)ㆍ무상(無常)을 설하며, 혹은 고(苦)ㆍ낙(樂), 혹은 아(我)ㆍ무아(無我)를 설하며, 혹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부지런히 행하여 모든 선근(善根)을 거두어 나갈 것을 설하며, 혹은 일체제법(一切諸法)이 작위 없는 모습=無作相(무자상)임을 설하나니,
如是等 種種異說 無智聞之 謂爲乖錯, 智者入三種法門 觀一切佛語 皆是實法 不相違背。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다르게 설하니, 어리석은 이가 들으면 어긋나고 뒤섞인 乖錯(괴착)이라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곤륵(蜫勒), 논장(論藏), 공(空)의 3종(三種) 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부처님의 말씀을 관하여, 이 가르침 모두가 진실된 법=實法(실법)이라 서로 어긋남이 없음을 보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