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5권 5

Skunky 2023. 11. 25. 09:00

大智度論釋初品中 羼提波羅蜜 法忍義 第二十五 卷第十五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25. 초품 중 찬제바라밀(提波羅蜜)의 법인(法忍)의 뜻을 풀이함 5

 

問曰, 佛法常空相中 非有非無, 空以除有空 空遮無 是爲非有 非無 何以言愚癡論?

묻나니, 불법은 항상 () 모습 가운데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니, () () 제함으로써 공이 되고 막힘이 없으므로 ()이니, 이것을 비유ㆍ비무라고 하나니, 어찌하여 우치한 주장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佛法實相 不受不著。汝非有 非無受著故 是爲癡論。

若言非有非無 是則可說可破 是心生處 是鬪諍處。佛法則不然 雖因緣故說 非有非無 不生著, 不生著 則不可壞不可破。

답하나니,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佛法(불법) 진실한 모습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거늘, 그대가 주장하는 비유(非有)ㆍ비무(非無) 받아들여 집착하는 까닭에 우치한 논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 비유ㆍ비무라고 말한다면 이는 말할 수도 있고 깨뜨릴 수도 있는 것이며, 이는 마음이 생기는 곳이며 투쟁이 일어나는 곳이 되나, 불법은 그렇지 않으니, 비록 인연에 의하여 비유ㆍ비무라고 말하기는 하거니와 집착을 내지 말아야 하나니, 집착을 내지 않는다면 무너뜨릴 없고 깨뜨릴 수도 없는 것이니라.

 

諸法若有邊 若無邊, 若有無邊 若非有無邊, 若死後有去 若死後無去, 若死後有去無去 若死後非有去非無去, 是身是神 身異神異 亦如是 皆不實。於六十二見中 觀諸法 亦皆不實。

제법(諸法) 만약 끝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거나, 만약 있으되 끝이 없다거나, 만약 있지 않되 끝이 없다거나, 만약 죽은 뒤에 곳이 있다거나, 만약 죽은 뒤에 곳이 없다거나, 만약 죽은 뒤에 곳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거나, 만약 죽은 뒤에 곳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거나, 몸이 정신(精神)이라거나, 몸과 정신(精神) 다르다고 하는 모두가 그와 같아서 모두 진실하지 않는 것이며,

62 가지 (외도의) 사견=六十二見(육십이견)으로 제법을 관찰하는 역시 진실하지 못한 것이니라.

 

如是一切除卻 信佛法淸淨不壞相 心不悔 不轉 是名法忍。

이와 같은 모든 사견을 제하여 버리고 불법의 청정하고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믿으며,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동요되지 않는다면, 이를 법인(法忍)이라 하느니라.

 

復次 有無二邊,觀諸法 生時住時 則爲有見相, 觀諸法 老時壞時 則爲無見相, 三界衆生 多著此二見相。是二種法 虛誑不實。若實有相則不應無。何以故, 今無先有 則墮斷中, 若斷 是則不然。

또한 유무의 두 변(邊)으로 모든 법의 나는 때와 머무는 때를 관찰하면 유견(有見)의 모습이요, 모든 법의 늙을 때와 무너지는 때를 관찰하면 무견(無見)의 모습이다.
삼계의 중생은 흔히 이 두 가지 소견의 모습에 집착되니, 이 두 가지 법은 거짓되고 진실치 않다. 만일 실로 존재하는 모습이라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은 없으나 먼저부터 있었다면 단견[斷]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단절된다고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復次,一切諸法,名字和合故,謂之爲有;以是故,名字和合所生法不可得。

또한 일체법은 이름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이 화합하여 생긴 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問曰, 名字所生法 雖不可得 則有名字和合?

묻나니, 비록 이름(가명)에 의하여 생긴 법을 얻을 수는 없으나, 이름으로 화합된 것은 있지 않습니까?

 

答曰, 若無法 名字爲誰而和合? 是則無名字。
답하나니, 만일 법이 없다면 이름(가명)이 누구를 위한 화합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름이 없는 것이 되리라.

 

復次 若諸法實有 不應以心識故知有, 若以心識故知有 是則非有。

如地堅相 以身根身識知故有 若無身根 身識知 則無堅相。

또한 만약 제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마음으로 인식하는=心識(심식)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心識(심식) 때문에 존재가 있음=有(유)를 알게 된다면,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땅의 굳은 모습=堅相(견상)은 몸의 감각인 신근(身根)과 신식(身識)으로써 알기 때문에 존재하듯이, 만일 몸의 감관인 신근(身根)없이 몸의 인식=신식(身識)만으로는 곧 땅의 굳은 모습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 身根身識 若知若不知 而地常是堅相!

묻나니, 몸의 감관=身根(신근)과 몸의 의식=身識(신식)이 알고 알지 못하건 간에 땅의 굳은 모습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까?

 

答曰, 若先自知有堅相 若從他聞 則知有堅相, 若先不知不聞 則無堅相。

답하나니, 만약 먼저부터 땅의 굳은 모습=堅相(견상)이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거나, 혹은 남에게 듣고 땅의 堅相(견상)이 있음을 아게 되었으나, 만약 먼저부터 스스로 알지도 못하였고, 남에게 들어서 알지도 못하였다면 堅相(견상)은 없는 것이다.

 

復次 地若常是堅相 不應捨其相 如凝酥 蠟蜜樹膠 融則捨其堅相 墮濕相中, 金銀銅鐵等亦爾。如水爲濕相 寒則轉爲堅相。如是等種種 悉皆捨相。濕 축축할 습

또한 땅이 만약 항상 堅相(견상)이라면 그 모습을 버리지 말아야 (바뀌지 않아야) 할것이니, 마치 응고된 연유ㆍ꿀ㆍ아교는 녹으면 그 굳은 모습을 버리고 액체=濕相(습상)이 되는 것과 같으며, 금ㆍ은ㆍ구리ㆍ무쇠 등도 그러하니라. 물은 액체이지만 추우면 도리어 굳어지는 것과 같이, 이러한 갖가지로 바뀌는 모두는 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復次 諸論議師輩 有能令無 無能令有, 諸賢聖人 坐禪人 能令地作水 水作地。如是等 諸法皆可轉 如十一切入中說。

또한 여러 논사(論師, 논의사)의 무리들은 유(有, 유위)를 무(無, 무위)로 바꾸려 하고, 무를 유로 바꾸기도 하며, 여러 현성들이나 좌선하는 사람들은 능히 땅을 물로 만들기도 하고 물을 땅으로 만들기도 하나니, 이와 같이 제법은 능히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열 가지 일체입=十一切入(십일체입) 가운데 설한 바와 같으니라.

 

十一切入(십일체입)=십일체처(十一切處, kasinayatana), 十遍處(십변처), 地·水·火·風·靑·黃·赤·白·空·識의 열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존재론·세계관. 

 

復次 是有見 爲貪欲 瞋恚 愚癡 結縛 鬪諍故生, 若有生 此欲恚等處 是非佛法。何以故, 佛法相善淨故 以是故非實。

또한 이러한 있는 것이라 여기는 유견(有見)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번뇌의 속박ㆍ투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니, 만약에 이러한 욕심ㆍ성냄 등이 생겨나는 곳이라면 이는 불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의 모습이란 착하고 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유견(有見)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며, 

 

復次, 一切法有二種, 色法 無色法。

色法 分析乃至微塵 散滅無餘 如'檀波羅蜜品'破施物中說。

無色法 五情所不知故 意情生住滅時觀故 知心有分 有分故無常 無常故空 空故非有。

彈指頃 有六十時 一一時中 心有生滅, 相續生故 知是貪心 是瞋心 是癡心 是信心 淸淨智慧禪定心。

行者 觀心生滅 如流水 燈焰 此名入空智門。何以故, 若一時生 餘時中滅者 此心應常。

何以故?此極少時中無滅故, 若一時中無滅者 應終始無滅。

또한 일체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이다.

색법(色法)은 분석하여서 미진(微塵)에 이르면 흩어지고 멸하여 남음이 없으니, 이미 단바라밀품(檀波羅蜜品)에서 재물의 보시=施物(시물)을 파하는 것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무색법(無色法)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는 오정(五情)으로는 알 수 없는 바이기 때문이고, 뜻과 감정=意情(의정)이 생기고 머물고 멸할 때를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에 나누어짐이 있음=知心有分(지심유분)을 알며, 나누어짐이 있는=有分(유분)이기 때문에 무상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있지 않은=非有(비유)이니,

손가락을 튕기는 탄지(彈指) 사이에 60心(심)이 있으며, 낱낱의 그 순간에 마음의 생멸이 있으며, 마음이 상속되어 생하는 까닭에 탐내는 마음=貪心, 성내는 마음=癡心, 어리석은 마음=癡心, 믿는 마음=信心, 청정하고 지혜로운 선정의 마음이 있음을 알며, 

수행자는 마음의 생멸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으며, 등잔불이 타는 것과 같음을 관찰하며, 이를 공(空) 지혜의 문에 들어가는= 入空智門(입공지문)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만일 한 때에 생겼다가 다른 때에는 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마음은 응당 항상해야 할 것이나, 이 마음은 생멸하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도 멸함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에 한 순간이라도 멸함이 없다면 끝끝내 멸함이 없는 것이다.

 

復次 佛說有爲法 皆有三相。若極少時中生而無滅者 是爲非有爲法。

若極少時中心生住滅者, 何以但先生而後滅 不先滅而後生?

또한 부처님께서 유위법을 말씀하실 때에, '유위의 법에는 생주멸(生住滅)의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하셨으니, 

만약 극히 짧은 시간에 생겨나서는 멸함이 없다면 유위의 법이 아닐 것이요,

만약 극히 짧은 시간에 마음이 생하고, 머물고, 멸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생각은) 단지 먼저 생겨난 뒤에야 멸하는 것이며, 앞의 생각이 미처 멸하기도 전에 그 뒤의 생각이 생겨나는 것인가?

 

復次 若先有心後有生 則心不待生。何以故, 先已有心故。若先有生 則生無所生。

又生滅性相違 生則不應有滅 滅時不應有生。以是故 一時不可得 異亦不可得 是卽無生,

若無生 則無住滅, 若無生住滅 則無心數法, 無心數法 則無心不相應諸行。

또한 만약 앞에 있던 마음(생각)이 나중에 생기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부터 마음(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며,

만약 앞서부터 마음이 생하여 있었다면 마음이 다시 일어날 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생과 멸은 성품(자성)이 서로 다른 것이니, 생에는 멸의 성품이 있을 수 없고, 멸에는 생의 성품이 있을 수 없으므로 동시=一時(일시)가 될 수도 없으며, 또한 다르다고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니, 그러하다면 생함이 없는 것이 되나니,

만약 생함이 없다고 한다면 머물고 멸함도 없는 것이며, 만약 마음의 생주멸(生住滅)이 없는 것이라면, 곧 마음에 속하는 (色蘊색온을 통하여 느낌을 받아들여서 기억 하는=受蘊수온과 수온에 의해 기억되어진 것을 생각해내는 想蘊상온에 의해 분별하고 사유하는=行蘊행온의) 법=心數法(심수법)도 없는 것이되며,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심수법)이 없다면 諸行(제행)에 마음이 상응하지 않는 법=不相應(불상응)법 또한 없는 것이 된다.

 

色無色法無故 無爲法亦無。何以故, 因有爲故有無爲 若無有爲則亦無無爲。

색온(色蘊)과 색온과 관계없는 현상 및 작용=無色法(무색법)도 없게 되고, 무색법도 없는 까닭에 무위법(無爲法) 역시도 없는 것이 되나니, 왜냐하면 유위(有爲)를 인하여 무위(無爲)가 있기 때문이라. 만약에 유위가 없다면, 곧 무위 역시 없는 것이 된다.

 

復次 見作法無常故 知不作法常。若然者 今見作法是有法 不作法應是無法。以是故 常法不可得。

또한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진 법이 무상(無常)함을 보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不作法(부작법)이 항상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만약 그러하다면 지금의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진 법이 존재하는 법=有法(유법)이라고 본다면, 만들어지지 않은 不作法(부작법)은 마땅히 없는 법이어야 하므로 항상한 법=常法(상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