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14권 2
大智度論釋初品中 尸羅波羅蜜義之餘 卷第十四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23. 초품 중 시라바라밀을 찬탄한 뜻을 풀이함② 2
云何持戒生忍辱?
어또한 것이 계를 받아 지니는= 지계(持戒)로써 인욕(인욕바라밀)이 생기는 것인가?
持戒之人心自念言, '我今持戒 爲持心故。
若持戒無忍 當墮地獄, 雖不破戒 以無忍故 不免惡道,
何可縱忿不自制? 心但以心故 入三惡趣。是故 應當好自勉强 懃修忍辱'
계를 지니는 사람=持戒人(지계인)은 이렇게 생각하나니,
'내가 지금 계를 지니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니, 만약 계를 받아 지니면서도 인욕하지 못한다면 지옥에 떨어지리라.
비록 계를 파하지는 않았더라도 인욕하는 마음이 없기에 악도를 면치 못하리니, 어찌 분함을 따라 스스로의 마음을 억제하지 못할 것인가? 오직 마음 때문에 3악취(三惡趣)에 들게 되나니, 마땅히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인욕을 닦으리라.' 하며,
復次 行者欲令戒德堅强 當修忍辱。所以者何, 忍爲大力 能牢固戒 令不動搖。
또한, 행자(行者)가 계행의 공덕을 견고히 하고자 원한다면, 인욕바라밀을 닦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인욕의 큰 힘으로 계행을 더욱 굳건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
復自思惟, '我今出家 形與俗別 豈可縱心如世人法?
宜自勉勵 以忍調心 以身 口忍 心亦得忍, 若心不忍 身口亦爾'
是故行者 當令忍 絕諸忿恨。勵 힘쓸 려
더욱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출가하여 속인들의 모습과 다르거늘, 어찌 마음을 방종히 하여 세상 사람들의 법과 같이 하겠는가? 마땅히 스스로 노력하여 힘써서=勉勵(면려)하여, 인내로써 마음을 조절하고(길들이고), 몸과 입의 인내로써 마음 역시도 인욕을 얻게 되리라. 만일 마음이 인욕하지 못한다면 몸과 입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였으므로, 행자는 몸(身)과 입(口)과 마음(心)으로 인욕하여, 모든 분노와 원한을 끊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復次 是戒略說 則有八萬, 廣說則無量. 我當云何 能具持此無量戒法? 唯當忍辱 衆戒自得。
또한, 이러한 계를 간략히 말하면 8만 가지요, 자세히 말하자면 무량하나니, 어떻게 내가 이 무량한 계법을 마땅하게 다 지닐 수 있겠는가? 오직 인욕함으로써 뭇 계법을 스스로 얻게 되리라.
譬如有人 得罪於王 王以罪人 載之刀車 六邊利刃 閒不容閒 奔逸馳走 行不擇路,
若能持身 不爲刀傷 是則殺而不死。奔 달릴 분, 馳 달릴 치
持戒之人 亦復如是 戒爲利刀 忍爲持身 若忍心不固 戒亦傷人。
又復 譬如老人夜行 無杖則蹶, 忍爲戒杖 扶人至道 福樂因緣 不能動搖。蹶 넘어질 궐
如是種種 名爲持戒 生羼提波羅蜜。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왕에게서 형벌을 받는 것과 같으니,
왕은 죄인을 칼수레=刀車(도거)에 싣고, 칼과 몸의 사이에 조금의 틈도 없게, 수레의 동서남북 위 아래의 여섯 방향으로부터 날카로운 칼을 꽃아 세운 뒤에 험한 길을 분별없이 마구 달리게 하나니, 이 때에 몸을 잘 가누어 지킨다면 칼에 몸이 상하지 않게 되니, 이는 (왕이) 죽이려 하되 죽지 않는 것이 되나니,
계를 지니는, 持戒人(지계인)도 그와 같으니, 계(戒)는 날카로운 칼날이요, 인욕은 몸을 잘 가누어 지키는 것이니, 만약에 인욕하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면 계율 역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됨이라.
다시 비유하자면, 노인이 밤길을 가는데 지팡이가 없으면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인욕은 계행(계율)의 지팡이이라, 사람을 부축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 복락의 인연이 되어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를 일컬어 지계바라밀이 찬제바라밀(인욕바라밀)을 낳는 것이라 하느니라.
云何持戒 而生精進?
어떻게 지계바라밀이 정진바라밀을 낳게 하는 것인가?
持戒之人 除去放逸 自力懃修 習無上法 捨世閒樂 入於善道 志求涅槃 以度一切 大心不懈 以求佛爲本, 是爲持戒能生精進。
계를 지니는, 持戒人(지계인)은 방일(放逸)을 제거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부지런히 위없는 법=무상도(無上道)를 닦아 익히며,
세간의 즐거움을 버리고 선한 도=善道(선도)에 들어가 열반을 구함에 뜻을 두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大心(대심)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부처 구하는 것으로 본분을 삼나니,
이러함을 일컬어 지계(持戒, 지계바라밀)가 능히 정진(정진바라밀)이 낳는 것이라 하느니라.
復次 持戒之人 疲厭 世苦 老病死患 心生精進 必求自脫 亦以度人。
또한 계를 지니는 持戒人(지계인)은 세상의 고통과 늙음ㆍ병듬ㆍ죽음의 근심=患(환)을 싫어하여, 정진할 마음을 내어 스스로 해탈을 구하는 한편 다른 이들을 구하고자 하나니,
譬如 野干在林樹閒 依隨師子 及諸虎豹 求其殘肉 以自存活。虎 범 호, 豹 표범 표
비유하자면, 마치 야간(野干, 狐호, 여우의 일종)이 숲 속에서 호랑이나 표범 등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남긴 고기를 얻어먹고 살아가는 것과 같으니,
有時空乏 夜半踰城 深入人舍 求肉不得 屛處睡息 不覺夜竟, 惶怖無計 走則慮不自免 住則懼畏死痛, 便自定心 詐死在地。屛 병풍 병, 물리칠 병
간혹 먹이를 얻지 못하면, 밤에 성을 넘어 인가(人家) 깊숙이 숨어 들어가서 고기를 찾다가 얻지 못할 경우, 으슥한 곳에 숨어서 잠시 잠에 들어 쉬다가, 모르는 결에 밤이 다하여, 새벽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두려움에 떨며 갈피를 잡지 못하여, 달아나자니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 걱정이요, 머물러 있자니 죽음의 고통이 두려워서, 문득 스스로 결정하기를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려 있기로 하였다.
衆人來見 有一人言, '我須野干耳' 卽便截取。野干自念, '截耳雖痛 但令身在'
여러 사람들이 오가며 보았으나, 어떤 한 사람이 '나는 야간의 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귀를 베어내니, 이에 야간이, ‘귀를 베이니 아프기는 하나 몸만은 보전케 되리라.’ 생각하였으나,
次有一人言, '我須野干尾' 便復截去。野干復念, '截尾雖痛 猶是小事'
다시 어떤 사람이 '나는 야간의 꼬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꼬리를 베어 가니, 야간이 다시 생각하기를, ‘꼬리를 베이니 아프기는 하나 아직은 작은 일이다.’ 하고 있었으나,
次有一人言, '我須野干牙' 野干心念, '取者轉多 儻取我頭 則無活路'
卽從地起奮其智力 絕踊閒關 徑得自濟。儻 뛰어날 당
다시 어떤 사람이 '나는 야간의 어금니가 필요하다”라고 말하자, 야간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베어가고자 하는 자가 점점 많아지니, 혹 나의 머리를 끊는 자가 있다면 살아날 길이 없겠구나.’
그리고는 바로 땅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지력(智力)을 다하여 트인 길을 찾아 용맹스럽게 빠져나가 겨우 살아나게 되었다.
行者之心 求脫苦難 亦復如是, 若老至時 猶故自寬 不能慇懃 決斷精進,
病亦如是 以有差期 未能決計, 死欲至時 自知無冀 便能自勉 果敢慇懃 大修精進 從死地中 畢至涅槃。冀 바랄 기
수행자의 마음이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나니, 만약 늙음에 이르르면 그나마 너그러워서 정성스럽게 결단을 내려 정진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그러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더 바랄 것이 없음을 알고는 문득 스스로 힘써서 과감하게 성의를 다하여 크게 정진을 닦아, 죽음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復次 持戒之法 譬如人射 先得平地 地平然後心安 心安然後挽滿 挽滿然後陷深。
戒爲平地 定意爲弓 挽滿爲精進 箭爲智慧 賊是無明。
若能如是展力精進 必至大道 以度衆生。挽 당길 만, 陷 빠질 함, 箭 화살 전
또한 持戒人(지계인)의 법은 마치 사람이 활을 쏘는 것과 같아서 먼저 平地(평지)를 찾은 다음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이 안정된 후에 마음껏 활과 활시위을 당기며, 힘껏 활과 활시위를 당겨야 깊이 꽂히게 되나니,
계율은 平地(평지)요, 뜻을 정함=定意(정의)는 활이요, 힘껏 당기는=挽滿(만만)은 정진이요, 화살은 지혜요, 도적은 무명이니,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힘써 정진한다면, 반드시 大道(대도)에 이르러 중생을 제도하게 되리라.
復次 持戒之人 能以精進 自制五情 不受五欲, 若心已去 能攝令還, 是爲持戒能護諸根。
護諸根則生禪定 生禪定則生智慧 生智慧得至佛道。是爲持戒 生毘梨耶波羅蜜。
또한 持戒人(지계인)은 능히 정진으로써 오정(五情, 안이비설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으니,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오욕(五欲)을 받지 않나니, 만약 마음이 흩어지면 거두어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이것이 곧 지계에 의해 능히 모든 감관=諸根(제근)을 잘 보호하는 것이라.
諸根(제근)이 흔들리지 않게 잘 보호하면 선정(禪定)이 생기게 되고, 선정(禪定)이 생기게 되면 지혜(智慧)가 생기게 되고, 지혜(智慧)가 생기면 불도(佛道)에 이르게 되나니,
이러함을 일컬어 지계(持戒)에서 비리야바라밀(선바라밀)이 난다고 하는 것이니라.
인도자칼(Indian jackal, Canis aureus indicus Hodgson)은 황금자칼(C. aureus)의 아종으로 히말라야자칼(Himalayan jackal)이라고도 부른다. 늑대, 승냥이, 여우 등과 혼동되는 개과에 속하는 육식동물이다. 외형적으로 늑대와 여우를 섞어 놓은 생김새에 승냥이와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인도에서 승냥이(C. alpinus)는 인도들개(Indian wild dog)라고 하고, 영어명인 돌(Dhole)로 불리며 자칼과 구분한다. 하지만 자칼과 승냥이는 같은 조상에서 기원했다는 생물학적 주장이 있을 정도로 매우 흡사하다. 자칼(jackal)이라는 말 자체가 산스크리트어 스리갈라(śṛgāla)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칼이 없기 때문에 야간(野干)으로 음사할 때는 승냥이나 야생늑대를, 실가라(悉伽羅)라고 음사할 때는 여우를 나타낸다. 특히 승냥이를 뜻하는 한자 ‘시(豺)’는 자칼과 혼용하여 쓰이며, 황금자칼은 금시(金豺)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도에서 자칼은 무덤가와 화장터를 배회하면서 시신을 뜯어먹는 짐승으로 간주돼 터부시된다. 신화에서도 파괴와 죽음의 깔리(Kālī)와 짜문다(Cāmuṇḍā) 여신과 동반해 나타나면서 여신의 잔인함과 난폭성을 부각시킨다.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에서는 호랑이, 늑대, 몽구스, 쥐 등이 서로를 오해하게 하는 지략을 짜서 가젤(gazelle)을 독식하는 야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불교경전에서 자칼은 주로 사자와 같이 등장한다. 짐승의 왕인 사자 옆에 기생하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지능이 낮고 비열한 동물로 자주 표현된다. 부처님이 사자로, 데바닷따(Devadatta)가 자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비로짜나 자따까(Virocana-jātaka)’에 전한다. 히말라야의 칸짜나구하(Kañcanaguhā)라는 동굴에 힘센 사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숲에서 만난 자칼이 사자의 발 앞에 몸을 던지며 목숨만 살려주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사자는 자칼의 제안을 수락하고 그를 다정하게 대한다. 자칼은 높은 곳에 올라 자신이 먹고 싶은 짐승을 찾을 때마다 사자에게 달려가 “주인님, 당신의 빛나는 능력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자는 말, 코끼리 등을 재빠르게 사냥한 후 자신이 먹고 남은 고기를 자칼에게 주었다. 점점 몸집이 커지고 교만해진 자칼은 자신이 사자 못지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다리가 네 개가 아닌가? 내가 왜 사자가 남긴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라고 자문한다. 이내 자칼은 사자가 사냥감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주인님, 당신의 빛나는 능력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자신의 명령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이제부터 스스로 코끼리와 다른 짐승들을 죽일 것이라고 다짐한다.
자칼은 사자에게 달려가 “사자이시여! 지금까지 나는 당신이 남긴 음식을 먹었지만 이제 내가 코끼리를 죽여서 먹고 남은 음식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말한다. 사자는 코끼리와 같은 맹수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자칼을 말리지만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칼은 이를 무시한다. 사자는 자칼의 요청대로 산 위에 올라가 코끼리가 오는지 감시하다 동굴로 돌아와 “자칼이시여, 당신의 빛나는 능력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해준다. 자칼은 사자처럼 소리치며 동굴에서 나와 코끼리에게 달려든다. 격노한 코끼리는 앞다리를 들어 자칼의 두개골을 으깨고 짓밟아 죽인다.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의 ‘아누이경(阿㝹夷經)’에도 자따까와 거의 동일한 짧은 이야기가 전한다. 사자가 사냥 후에 먹다 남은 고기로 기운이 충족해진 자칼은 “저 숲의 사자가 도대체 어떤 짐승이기에 나보다 낫단 말인가? 나도 이제는 돌아다니면서 짐승을 잡아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침에 굴에서 나와 사자처럼 몸을 떨치면서 세 번 포효한 뒤 사방을 돌아다녔으나 숲에 퍼지는 것은 자칼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이와 같은 자칼의 무모한 행위는 어질고 존경할만한 사자와 같은 존재를 공경하려 하지 않는 오만(傲慢)함에 근거한다. 자신과 타자의 관계에서 그 우세함과 하열(下劣)함을 끊임없이 분별하는 허물을 ‘만사(慢使)’라 한다. 흔히 오만을 타인을 낮추거나 스스로를 뽐내는 건방짐이나 거만함으로만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칼의 이야기를 반추해보면 자신보다 나은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이를 간과하기 쉬운 번뇌가 바로 오만이다.- 법보신문, 김진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