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11권 14
大智度論釋 初品中 '檀波羅蜜 法施義’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20. 초품 중 단바라밀의 법시(法施)를 풀이함 ① 2
于時 國王愧喜交集 白比丘言, '未曾有也! 說法功德 大果乃爾!'
比丘言, '此名爲華 未是果也'
王言, '其果云何? 願爲演說'
答言, '果, 略說有十 王諦聽之' 卽爲說偈言:
그 때에 국왕이 부끄러움과 기쁨이 엇갈려 비구에게 말하기를, '처음 보는 일이로다. 설법하는 공덕의 과보가 이렇게 크다니'
비구가 말하여, '이는 꽃이 핀 것이라고는 할지언정 아직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닙니다.'
왕이 묻기를, '그 과보란 어떤 것입니까? 부디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구가 대답하여,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그 과보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대왕께서는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는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大名聞端政 得樂及恭敬, 威光如日月 爲一切所愛。
큰 명예와 단정함을 지니게 되며, 즐거움과 공경을 얻으며,
위광(威光)이 마치 일월 같아서 모두의 사랑을 받음이라.
辯才有大智 能盡一切結, 苦滅得涅槃 如是名爲十。
말을 잘하는 변재에 큰 지혜까지 얻고, 일체의 번뇌가 능히 다하며
괴로움이 멸하고 열반을 얻으니, 이것이 모두 열 가지입니다.
王言, '大德, 讚佛功德 云何而得 如是果報?' 爾時 比丘以偈答曰,
왕이 묻기를, '대덕이시여,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 어찌하여 그러한 과보를 얻는 것입니까?' 그러자 비구가 게송으로 대답하였으니,
讚佛諸功德 令一切普聞, 以此果報故 而得大名譽。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여 모두가 두루 듣게 하였으니
이러한 과보로 커다란 명예를 얻게 되며,
讚佛實功德 令一切歡喜, 以此功德故 世世常端正。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여 모두가 두루 기뻐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공덕으로 세세에 항상 단정함을 얻게 되며,
爲人說罪福 令得安樂所, 以此之功德 受樂常歡豫。
사람들을 위하여 죄와 복을 말해 주어 편안하고 즐거움을 얻게 하였으니
이러한 공덕으로 즐거움을 누리니 항상 기쁜 마음이며,
讚佛功德力 令一切心伏, 以此功德故 常獲恭敬報。
부처님의 공덕의 힘을 찬탄하여 모두의 마음을 굴복시켰으니
이러한 공덕이 있는 까닭에 항상 공경 받는 과보를 얻음이네.
顯現說法燈 照悟諸衆生, 以此之功德 威光如日曜。
참된 가르침을 설하여 법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어 중생들이 깨닫도록 비추었나니
이러한 공덕 있는 까닭에 위광이 마치 해와 같이 밝다네.
種種讚佛德 能悅於一切, 以此功德故 常爲人所愛。
갖가지로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여 능히 일체를 기쁘게 하였으니
이러한 공덕 있는 까닭에 항상 남의 사랑을 받는다네.
巧言讚佛德 無量無窮已, 以此功德故 辯才不可盡。
묘하고 재치있는 말로 부처님을 찬탄하여, 그 덕이 한량없고 끝이 없으니
이러한 공덕 있는 까닭에 辯才(변재, 말재주)가 다하지 않네.
讚佛諸妙法 一切無過者, 以此功德故 大智慧淸淨。
부처님의 묘한 법을 찬탄하여, 일체의 아무런 허물도 없게 되었으니
이러한 공덕으로 청정(淸淨)한 큰 지혜 지니게 되네.
讚佛功德時 令人煩惱薄, 以此功德故 結盡諸垢滅。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할 때, 사람들의 번뇌가 얇아지게 되었으니
이러한 공덕이 있는 까닭에 번뇌(結결)가 다하여 모든 때가 멸하였으며,
二種結盡故 涅槃身已證, 譬如澍大雨 火盡無餘熱。
두 가지 번뇌(結결)가 다하였기에 열반의 몸을 증득하였으니,
마치 소나기가 큰 비가 쏳아 내려, 불이 꺼져 열기조차 남지 않게 된 것과 같다네.
重告王言, '若有未悟 今是問時 當以智箭破汝疑軍'
王白法師, '我心悅悟 無所疑也。大德福人善能讚佛'
如是等 種種因緣 說法度人 名爲法施。
법사가 거듭 왕에게 설하기를,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면, 지금이 바로 물을 때입니다. 지혜의 화살로 그대의 의혹의 마군(魔軍)을 당연히 무찔러 드리겠습니다.'
왕이 법사에게 말하기를, '법사여, 나는 마음에서 깨달음의 기쁨이 우러나며, 아무런 의심이 없습니다. 커다란 복덕을 지닌 이께서는 부처님의 공덕을 잘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법을 설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것을 법시(法施, 법보시)라 하느니라.
問曰, 財施 法施, 何者爲勝?
묻나니, 재물보시와 법보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수승합니까?
答曰, 如佛所言, '二施之中 法施爲勝' 所以者何, 財施果報 在欲界中, 法施果報 或在三界 或出三界。
復次 口說淸淨 深得理中 心亦得之 故出三界。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이러한 두 가지 보시 가운데서 법보시(法施)가 수승하나니, 왜냐하면 財施(재시)=재물보시의 과보는 욕계에 머무를 뿐이지만, 法施(법시)의 과보는 삼계에 있거나 혹은 삼계를 벗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또한, 입으로 말함이 청정(淸淨)하여, 깊은 도리가 통함을 얻는다면, 마음 역시 그것을 얻게 되는 까닭에 삼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라.
復次 財施有量 法施無量。財施有盡 法施無盡, 譬如以薪益火 其明轉多。
復次 財施之報 淨少垢多, 法施之報 垢少淨多。
또한, 재물보시는 한량이 있거니와 법보시는 무량하며,
재물보시는 다함이 있거니와 법보시는 다함이 없는 것이라.
비유하자면, 풀섶을 불 속에 넣으면 그 불길의 광명이 점점 많아지는 것과 같으며,
또한 재물보시의 과보는 청정(淸淨)함이 적고 때가 많으나,
법보시의 과보는 때가 적고 청정(淸淨)함이 많음이라.
復次, 若作大施 必待衆力, 法施出心 不待他也。
復次 財施能令 四大諸根增長, 法施能令無漏 根 力 覺 道具足。
또한, 만일 큰 보시를 하려면 반드시 대중의 힘을 기다려야 하지만, 법보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남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또한, 재물보시는 능히 사대(四大)와 육근(六根)을 키우는 것이나, 법보시는 능히 무루(無漏)의 사선근(四善根)과 오력(五力) 칠각(七覺, 칠각지) 팔정도(八正道)를 갖추게 하며,
復次, 財施之法 有佛無佛 世閒常有, 如法施者 唯有佛世乃當有耳。
是故當知 法施甚難! 云何爲難? 乃至有相 辟支佛 不能說法, 直行乞食 飛騰變化 而以度人。
또한 재물보시의 방법은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세상에 항상 있지만, 법보시는 오직 부처님이 계신 세상에서만 음성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이므로 법보시가 매우 어려운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어찌하여 어려운 것인가? 有相(유상)의 견해를 지닌 벽지불에 이르기까지도 설법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다니면서 걸식하고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변화하여 사람들을 제도할 뿐이다.
復次 從法施中 能出生財施 及諸聲聞 辟支佛 菩薩及佛。
復次 法施能分別諸法, 有漏 無漏法 色法 無色法 有爲 無爲法 善 不善 無記法 常法 無常法 有法 無法。
一切諸法實相 淸淨 不可破不可壞。如是等法 略說則 八萬四千法藏 廣說則無量。
또한, 법보시를 따라 능히 재물보시가 생기게 되며, 모든 성문ㆍ벽지불ㆍ보살들에 이르고 부처님까지 나오시게 되는 것이며,
또한, 법보시는 능히 제법을 분별하여,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色法(색법)=물질의 법과 無色法(무색법)=겉으로 나타나는 형상이 없는 법, 유위(有為)와 무위(無為)의 법, 선(善)과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법, 常法(상법)=항상한 법과 계속 변하여 무상(無常)한 법, 있음의 有法(유법)과 없음의 無法(무법) 등 온갖 일체법의 진실한 모습과 청정하여 파괴할 수 없음을 잘 분별하나니, 이런 법을 간략히 설명하면 8만 4천의 法藏(법장)이 되거니와 자세히 설명하자면 한량이 없느니라.
如是等種種 皆從法施 分別了知。以是故 法施爲勝。
是二施和合 名之爲檀行. 是二施願求作佛 則能令人 得至佛道 何況其餘?
이러한 갖가지 모두를 법보시에 의하여 분별하여 밝게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법보시가 수승하다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財施(재시)와 法施(법시) 두 가지 보시를 합쳐서 단(檀)이라 하나니, 이 두 가지 보시를 행하여 부처가 되고자 원을 세우며,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불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것들이겠는가!
問曰, 四種捨 名爲檀。所謂 財捨 法捨 無畏捨 煩惱捨。此中何以不說 二種捨?
묻나니, 네 가지 버림=四種捨(사종사)를을 단(檀)이라 하나니, 이른바 財捨(재사)=재물의 버림과 法捨(법사)=법의 버림과 無畏捨(무외사)=두려움 없음의 버림과 煩惱捨(번뇌사)=번뇌의 버림이나,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나머지 두 가지의 버림은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無畏捨 與尸羅無別 故不說。有般若故 不說煩惱捨。
若不說 六波羅蜜 則應具說四捨。
답하나니, 無畏捨(무외사)=두려움 없음의 버림은 시라(尸羅, śīla, 지계)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므로 설명하지 않았고, 반야바라밀이 있으므로 煩惱捨(번뇌사)=번뇌의 버림을 설명하지 않았다.
만일 6바라밀을 설명하지 않았다면 의당 네 가지 버림 모두를 다 설명하였을 것이다.
시라(尸羅 śīla)는 행위(行爲)ㆍ습관(習慣)ㆍ성격(性格)・도덕(道德)ㆍ경건(敬虔) 등의 뜻을 갖는다.
선악(善惡)에 두루 통하며 , 좋은 습관을 익히는 것을 선계(善戒) 또는 선율의(善律儀)라고 한다.
그리고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을 악계(惡戒) 또는 악율의(惡律儀)라고도 한다.
하지만, 계(戒)에는 청정(淸淨)의 뜻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정계(淨戒) 선계(善戒)의 뜻에 한해서 쓰인다.-불교 진리와 실천
大智度論卷第十一終 (대지도론 제 11 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