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권 8
大智度初品中 佛土願釋論 第十三 卷第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14. 초품 중 放光=광명 놓으심을 풀이함 3
▶經. 爾時 世尊從三昧安庠而起 以天眼觀視世界 擧身微笑。庠 학교 상, 擧 들 거
▷經. 이때 세존께서는 삼매로부터 편안히 일어나시어 천안으로 세계를 관찰하시고는 온몸으로 미소 지으셨다.
▶論. 問曰, 云何世尊 入三昧王三昧 無所施作 而從定起 觀視世界?
▷論. 묻나니,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삼매왕삼매에 드셨다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고 선정에서 일어나셔서 세계를 관찰하셨습니까?
答曰, 佛入是三昧王三昧 一切佛法 寶藏悉開悉看。是三昧王三昧中 觀已自念, ‘我此法藏無量無數 不可思議!’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이 삼매왕삼매에 드시면 모든 불법의 보배 창고가 열리어 모두 보이게 되나니,이 삼매왕삼매 가운데서 살펴 보신 뒤에 생각하시기를, ‘나의 이 가르침의 보배 창고=法藏(법장)은 무량 무수하여 가히 불가사의 하도다.’
然後 從三昧安庠而起 以天眼觀衆生 知衆生貧苦。此法藏者 從因緣得 一切衆生 皆亦可得 但坐癡冥 不求不索。以是故 擧身微笑。
그런 뒤에 다시 삼매로부터 천천히 일어나셔서 천안으로 중생들을 관찰하시고는 중생들의 가난과 고통=貧苦(빈고)를 아셨으며, 이 가르침의 보배 창고=法藏(법장)은 인연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일체 중생들 모두가 얻을 수 있건만, 다만 우치하여 무명(無明)속에 앉은 채 구하려 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을 뿐이라. 그러므로 온몸으로 미소하신 것이니라.
問曰, 佛 有佛眼 慧眼 法眼 勝於天眼, 何以用天眼 觀視世界?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불안(佛眼), 혜안(慧眼) 법안(法眼)을 지니고 계셔서 천안(天眼)보다 훌륭하거늘 어찌하여 천안으로 세계를 관찰하셨던 것입니까?
答曰, 肉眼所見不遍故, 慧眼知諸法實相, 法眼見是人以何方便 行何法得道, 佛眼 名一切法 現前了了知。
답하나니, 육안(肉眼)으로 보는 바는 두루하지 못한 까닭이요, 혜안은 제법의 실상만을 알 수 있는 것이요, 법안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방편으로 어떠한 법을 행하게 하여야 도를 얻게 하겠는가 함을 보는 것이요, 불안은 눈앞에 펴쳐지는 일체법을 명료하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今天眼緣世界及衆生 無障無㝵 餘眼不爾。
이제의 천안은 세계와 중생을 반연하되 장애가 없으나 다른 눈은 그렇지 못하느니라.
慧眼 法眼 佛眼雖勝 非見衆生法, 欲見衆生 唯以二眼 肉眼天眼。以肉眼不遍 有所障故 用天眼觀。
혜안ㆍ법안ㆍ불안이 비록 수승하나 중생을 보는 법이 아니니, 중생을 보고자 하시면 오직 두 가지 눈, 즉 육안과 천안이어야 하나니, 육안은 두루하지 못하여 장애가 있기 때문에 천안으로 관찰하시는 것이니라.
問曰, 今是眼在佛 何以名爲'天眼'?
묻나니, 지금의 부처님께는 불안이 있으시거늘 어찌하여 '천안(天眼)'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此眼多在天中 天眼所見 不㝵山壁樹木。若人 精進持戒禪定 行力得 非是生分。以是故 名爲天眼。
답하나니, 이러한 눈은 하늘 세계에 많기 때문에 천안으로 보는 것이며, 또한 천안으로 보는 바는 산이나 수목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나니, 어떤 사람이 지계와 선정을 부지런히 닦아 방편의 힘=行力(행력)을 얻게 되는 것은 타고 나는=生分(생분)이 아닌 까닭에 천안이라 하는 것이니라.
復次 人多貴天 以天爲主 佛隨人心 以是故名爲天眼。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귀히 여기어 하늘을 주인=主(주)로 삼나니, 부처님께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르는 까닭에 천안이라 하며,
復次 天有三種 名天 生天 淨天。
또한 하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하늘이라 불리는=名天(명천)ㆍ하늘에 나는=生天(생천)ㆍ청정한 하늘=淨天(정천)이라.
名天, 天王 天子是也。生天, 釋 梵諸天是也。淨天, 佛 辟支佛 阿羅漢是也。淨天中尊者是佛 今言'天眼' 亦無咎也。
하늘이라 불리는=名天(명천)이라 함은 천왕이나 천자 등이요, 하늘에 나는=生天(생천)이라 함은 제석(석제환인)과 범천왕 등 여러 하늘이요, 청정한 하늘=淨天(정천)이라 함은 부처님과 벽지불 그리고 아라한을 이르는 것이라. 정천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 부처님이시니, 지금 '천안'이라 하여도 허물이 없느니라.
'天眼觀視世界'者,以世界衆生 常求安樂 而更得苦, 心著吾我 是中實無吾我. 衆生常畏 苦而常行苦 如盲人求好道 反墮深坑。如是等 種種觀已 擧身微笑。
‘천안으로써 세계를 관찰한다’는 것이란, 세계의 중생은 항상 안락을 구하나 더욱 고통을 받으며, 마음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에 집착하나,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 여기에는 실제로 '나'라 할 것이 없거늘, 중생들은 항상 괴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도리어 괴로움을 행하니(괴로움의 원인을 행하니), 이는 마치 맹인이 좋은 길을 구하건만 도리어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과 같음이라. 이와 같이 갖가지로 (일체중생을) 관찰하신 뒤, 온몸으로 미소지으신 것이니라.
問曰, 笑從口生 或時眼笑 今云何言'一切身笑'?
묻나니, 웃음이란 입으로 나오거나, 눈으로 웃을 뿐이거늘 지금 어찌하여 온몸으로 웃는다 하는 것입니까?
答曰, 佛 世界中尊 得自在 能令 一切身 如口 如眼 故皆能笑。復次 一切毛孔皆開 故名爲笑, 由口笑歡喜故 一切毛孔皆開。
답하나니, 부처님은 세상 가운데 가장 존귀하시고 자재를 얻으셨기에, 능히 일체의 몸을 마치 입 같이, 마치 눈같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같이 능히 웃으실 수 있으시며, 또한 몸의 모든 모공이 모두 열리므로 웃는다 할 수 있고, 입으로 웃으면서 기뻐하시므로 온갖 모공이 모두 열리는 것이니라.
問曰, 佛至尊重 何以故笑?
묻나니, 부처님은 지극히 존귀하시어 몸가짐이 무겁고 중하시거늘 어찌하여 웃으시 것입니까?
答曰, 如大地 不以無事 及小因緣而動, 佛亦如是 若無事 及小因緣則不笑, 今大因緣故一切身笑。云何爲大? 佛欲說'摩訶般若波羅蜜' 無央數衆生 當續佛種 是爲大因緣。
답하나니, 대지는 아무 일이 없거나 작은 인연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같이 아무런 일이 없거나 작은 인연으로 웃으시지 않으시나, 이제 큰 인연이 있는 까닭에 온몸으로 웃으신 것이니, 무엇이 그 큰 인연인가? 곧 부처님께서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無央數(무앙수)의 중생들이 부처의 종자를 잇게 될 것이라. 이것이 큰 인연인 것이니라.
復次 佛言, '我世世曾作 小虫 惡人 漸漸集諸善本 得大智慧, 今自致作佛 神力無量 最上最大。一切衆生 亦可得爾 云何空受勤苦 而墮小處?' 以是故笑。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여러 생 동안을 살아오면서 작은 벌레나 악한 사람으로부터, 차츰차츰 여러 선함의 근본=善本(선본)을 쌓아서, 큰 지혜를 얻었으며, 지금은 스스로가 부처를 이루어 신통력이 무량하기가 가장 으뜸이고 가장 크다 할 수 있나니, 모든 중생도 그렇게 될 수 있거늘 어찌하여 (하잘 것 없는 삿된 견해로) 공연히 헛고생을 하여 작은 길에 빠져 있는가'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까닭에 웃으신 것이며,
復次 有小因大果 小緣大報。如求佛道 讚一偈 一稱南無 佛 燒一捻香 必得作佛, 何況聞知 諸法實不生不滅 不不生不不滅 而行因緣業亦不失! 以是事故笑。捻 비틀 념
또한 작은 원인=因(인)으로 큰 결과=大果(대과)를 얻을 수 있고, 작은 조건들=緣(연)으로 큰 갚음=大報(대보)을 얻게 되나니, 마치 불도를 구하는 자가 한 게송으로 찬탄하거나, 나무불(南無佛)을 한 번 외우거나, 하나의 향을 사르거나 하게 되면 반드시 부처를 이루나니, 하물며 제법이 실로 나지 않는=不生(불생)이며 멸하지도 않는=不滅(불멸)이며, 나지 않는 것도 아닌=不不生(불불생)이요,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不不滅(불불멸)임을 듣고 알며, 행한 업(業)을 따라 인연이 어긋나지 않음을 듣고 알면 이루지 못할 리 없나니, 이러한 까닭에 웃으시는 것이며,
復次 般若波羅蜜相 淸淨如虛空 不可與 不可取。佛種種方便 光明神德 欲教化 一切衆生令心調柔 然後 能信受般若波羅蜜。以是故 因笑放光。
또한 반야바라밀의 모습(실상)의 청정함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건네 줄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께서 갖가지 방편과 광명과 신통으로써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마음의 번뇌를 조복 받아 부드럽게 하신 뒤에 반야바라밀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자 하시는 까닭에 웃으시면서 광명을 놓으신 것이니라.
笑有種種因緣, 有人歡喜而笑 有人瞋恚而笑 有輕人而笑 有見異事而笑 有見可羞恥事而笑 有見殊方異俗而笑 有見希有難事而笑。今是第一希有難事 羞 부끄러울 수, 恥 부끄러워할 치,
웃음에는 갖가지 인연이 있나니, 어떤 사람은 기뻐서 웃고, 어떤 사람은 성나서 웃고, 어떤 사람은 남을 경멸하여 웃으며, 또한 이상한 일=異事(이사)를 보고 웃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羞恥事(수치사)를 당하여 웃기도 하고, 낮선 지방의 이상한 풍속을 보고 웃기도 하고, 희유하고 어려운 일=難事(난사)를 보고 웃기도 하나니, 지금은 가장 희유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 때문에 웃으시는 것이라.
諸法相 不生不滅 眞空無字無名 無言無說 而欲作名立字 爲衆生說 令得解脫 是第一難事。
제법의 모습(실상)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不生不滅(불생불멸)이며, 참으로 공한=眞空(진공)이라,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는= 無字(무자)이요, 이름도 없는=無名(무명)이요, 말도 없는=無言(무언)이요, 설명할 수도 없는=無說(무설)이거늘, 이름을 지어서 중생들을 위해 설명해 주어 해탈을 이루게 하고자 하나니, 이는 실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
譬如 百由旬大火聚 有人負乾草入火中過 不燒一葉 是甚爲難。
비유하자면, 백 유순(由旬, yojana)이나 되는 큰 불길 속에 어떤 사람이 마른 풀을 짊어지고 그 불 속을 통과하되 하나의 마른 풀잎도 태우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이 매우 어려운 것이니,
유순 (由旬, yojana)= 고대 인도, 태국, 미얀마에서 사용된 거리 측정법으로, 1유순은 왕이 하루에 행군하는 길의 길이로 7마일, 10~12키로 정도-ambudīpa
佛亦如是 持八萬法 衆名字草 入諸法實相中 不爲染著火所燒 直過無㝵 是爲甚難 以是難事故笑。如是種種 希有難事故 擧身微笑。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8만이나 되는 온갖 가르침의 법 이름=名字(명자)라는 풀을 짊어지고 제법의 실상 속으로 들어가서 물들어 애착하는=染著(염착)이라는 불에 태우지 않고 장애 없이 곧장 통과하여 지나가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라. 이 어려운 일 때문에 웃으신 것이니, 이와 같이 갖가지 희유하고 어려운 일 때문에 온몸으로 미소를 지으신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