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1권 22
2. 초품(初品) 중 여시아문일시(如是我聞一時)를 풀이함 -4
摩犍提問曰(마건제문왈)
마건제가 여쭙기를,
若不見聞等(약불견문등) 亦非持戒得(여비지계득)
見聞=보고 듣는 것도 아니요, 持戒=계를 지켜서 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非不見聞等(비불견문등) 非不持戒得(비불지계득)
見聞=보고 들음 아님도 아니요, 持戒=계를 지켜서 터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如我心觀察(여아심관찰) 持啞法得道(지아법득도) 啞 벙어리 아
마치 내 마음을 관찰하면서, 벙어리의 법을 지켜야 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까!
佛答言(불답언) 부처님께서 답하셨으니,
汝依邪見門(여의사견문) 我知汝癡道(아지여치도)
그대는 삿된 견해의 문에 의지해 있나니, 나는 그대의 어리석은 길을 아노라.
(너는 삿된 견해를 열반문으로 삼아 의지하니, 나는 네가 생사고해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道)이 아닌 어리석은 길에 있음을 아느니라.)
汝不見妄想(여불견망상) 爾時自當啞(이시자당아)
그대가 망상을 보지 않는다면, 그때엔 저절로 벙어리가 되리라.
(네가 망상(妄想)에 의한 일체법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그 어떠한 견해도 지니지 않게 되면, 스스로 그 어떠한 논쟁도 벌이지 않는 벙어리가 되리라.)
復次(부차) 我法眞實 餘法妄語(아법진실 여법망어)
또한 나의 법은 진실이고 다른 법은 망어이며,
我法第一 餘法不實(아법제일 여법부실) 是爲鬪諍本(시위투쟁본)
나의 법은 제일이고 다른 법은 진실치 못하다 한다면, 이는 투쟁의 근본(다툼의 바탕)이 되느니라.
今'如是'義 示人無諍法(금’여시’의 시인무쟁법) 聞他所說 說人無咎(문타소설 서인무처)
咎 허물 구
이제 ‘如是=이와 같다’는 뜻은 사람들에게 다툼 없는 법을 보임이니, 남이 말하는 바를 듣고는 그 말한 사람에게 머묾이 없다는 뜻이니라.
(지금 “이와 같이”에 대한 정의(定義)를 통해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法)은 다툼이 없는 것임을 일러주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以是故 諸佛經初稱“如是(이시고 제불경초칭 ‘여시’) 略說“如是”義竟(약설 ‘여시’의경)
그러므로 모든 경전의 첫머리에서 ‘如是=이와 같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이와 같은 義=정의를 이상으로써 간략히 설명해 마치느니라.
◎“我”를 설함
“我”者 今當說(‘아’자 금당설) 이제 나=我라고 함을 설명하리라.
問曰(문왈) 若佛法中言 一切法空(약불법중언 일체법공) 一切無有吾我(일체무유오아)
云何佛經初頭言“如是我聞”(운하불경초두언 ‘여시아문’)?
묻나니, 불법에서는 ‘모든 법이 공하여 모든 것에 나라 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불경 첫머리에 내가 들었다고 하는가?
(만약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佛法)에서 “일체법이 ‘공(空)’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일체법 속에서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을 ‘내 것’이라고 하는 마음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불경(佛經)은 맨 처음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佛弟子輩雖知無我(불제자배수지무아) 隨俗法說我 非實我也(수속법설아 비실아야)
답하나니, 비록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 없음을 알기는 하나, 세속의 법을 따라 '나'를 이름이나 실제의 '나'는 아니니라.
(부처님의 제자들은 비록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줄 알지라도 세속의 법도(法度)를 따르므로 “나”라고 말하는 것이어서 “나”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譬如 以金錢買銅錢 人無笑者(비여 이금전매동전) 何以故(하이고) 賣買法應爾(매매법응이)
비유하건대 金錢=금화로 동화=銅錢를 사도 아무도 비웃을 이가 없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사고파는 법이 의례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言我者亦如是(언아자역여시) 於無我法中而說我(어무아법중이설아)
隨世俗故不應難(수세속고불응난)
'나'라는 것도 그와 같아서 무아의 법 가운데에서 나를 말함은 세속을 따르는 까닭이니, 힐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나”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일체법에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을지라도, “나”라고 말하는 것은 세속의 법도를 따르는 까닭이므로 따지려 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如 ‘天問經’ 中偈說(여 ‘천문경’ 중게설) 마치 천문경에서 말하는 게송과 같으니라.
有羅漢比丘(유나한비구) 諸漏已永盡(제루이영진)
어떤 羅漢=아라한을 이룬 비구가 諸漏=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羅漢(나한)= 아라한 arhat , 阿羅漢.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상태로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 본다.
팔리어 불교 경전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미혹을 끊고 성자의 대열에 들어야 하며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줄여야 하며 죽은 다음 색계나 무색계에 나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는데 아라한은 남자든 여자든 출가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단계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의 이상보다 다른 사람들이 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 있는 보살의 상태를 더 중히 여긴다.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보고 있다. 팔리어 불교 경전은 아라한이 되는 4단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수다원(須陀洹), 팔리 원어 소타판나(sotāpanna:전향)를 음사한 말로서 번역하여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도 한다. 미혹을 끊고 성자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이며 부처와 그의 가르침과 승가[僧]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의심을 극복함으로써 도달되는 단계이다.
② 사다함(斯陀含), 사카다가민(sakadāgāmin)의 음사이며 일래(一來)로 번역된다. 한 번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재생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며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줄임으로써 도달되는 단계이다.
③ 아나함(阿那含), 안아가민(anāgāmin)의 음사이며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번역된다. 욕계(欲界)의 번뇌를 모두 끊어 결코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는 성자를 가리킨다. 죽은 다음 색계나 무색계에 나고 거기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는 앞의 두 단계를 얻은 뒤 감각적 욕망과 그릇된 의지를 이겨내면서 얻게 된다.
④ 아라한(阿羅漢), 깨달음에 이른 경지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든 여자든 출가(出家)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불도를 성취하는 데 보다 높은 목표가 보살이라고 확신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의 이상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윤회하는 세계에 남아 있기를 서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상좌부, 즉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의 하나로 계속 남아 있다.
한국·일본·티베트·중국에서는 보통 16명의 아라한(흔히 약칭하여 나한이라고 함)을 사원의 벽에 그렸다(뒤에는 아라한의 수가 18명에서 500명까지 늘어남). 이들은 석가모니의 부탁으로 다음 부처가 올 때까지 사람들이 섬길 수 있도록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하는 석가모니의 가까운 16제자들을 나타낸다.
於最後邊身(어최후변신) 能言吾我不(능언어아부)
최후의 마지막 몸에도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라한의 몸 마칠 때까지도 “나”와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佛答言(불답언)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으니,
有羅漢比丘(유나한비구)諸漏已永盡(제루이영진)
어떤 아라한 비구가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於最後邊身(어최후변신) 能言有吾我(능언유오아)
최후의 마지막 몸에도 '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世界法中說我(세계법중설아) 非第一實義中說(비제일실의중설)
세간의 법=世界法에서 '나'라고 함은 제일의제의 진실한 뜻 가운데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니라.
(제법(諸法)의 그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그 어떠한 삿된 견해에서 비롯된 사량(思量)과 분별(分別)로 펼쳐지게 되는 무의식속에 있는 모든 불선업이 배어나오는 유루(有漏)를 이미 다하게 되었을지라도, 아라한의 몸을 마칠 때까지 “나”와 “내 것”이라는 세계의 법도(法度)를 따라 “나”라고 말하는 것이나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니라.”)
以是故 諸法空無我(이시고 제법공무아) 世界法故 雖說我無咎(세계법고 수설아무구)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여 '나'가 없으나, 세계의 법에 따라 '나'라고 말하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느니라.
復次 世界語言有三根本(부차 세계어언유삼근본)
一者邪見 二者慢 三者名字(일자사견 이자만 삼자명자)
또한 세간의 語言=말에는 세 가지 근본이 있으니, 첫째는 삿된 소견이요, 둘째는 교만이요, 셋째는 이름이라.
(또한, 세계의 언어에 있어 세 가지 바탕이 있나니, 첫째는 삿된 견해로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남을 얕잡아 보느라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무언가 정(定)해진 모습이 없어 말과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잠시 이름 붙여 말하는 것(名)입니다.)
是中二種不淨 一種淨(시중이종부정 이종정)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한 가지는 깨끗하나,
一切凡人三種語(일체범인삼종어) 邪 慢 名字(사 만 명자)
모든 범부들은 세 가지 말을 하니, 삿된 소견과 교만과 이름이 그것이니라.
見道學人二種語(견도학인 이종어) 慢 名字(만 명자)
견도의 학인은 두 가지 말을 하니, 교만과 이름이요,
(사지(四地)인 견도(見道)에 이르러 제법(諸法)이 ‘공(空)’하여서 삼세에 걸쳐 어느 것 하나 치우치지 않는 것임을 배우는 사람은 남을 얕잡아 보느라 말하고 무언가 정(定)해진 모습이 없어 잠시 말과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잠시 이름 붙여 말하는 것(名)입니다.)
견도(見道)=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내어서 진리를 비춰보게 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견도(dṛṣṭimārga)란 3도(道) 가운데 하나이다.
諸聖人一種語(성도인일종어) 名字(명자) 성인은 한 가지 말만 하니, 이름이 그것이라.
內心雖不違實法(내심수불위실법) 而隨世界人故 共傳是語(이수세계인고 공전시어)
속마음으로는 진실한 법을 어기지 않으나, 세간의 사람을 따르는 까닭에 더불어 이러한 말로 의사를 전하는 것이나,
除世界邪見 故隨俗無諍(제세계사견 고수속무쟁)
하지만 세간의 삿된 소견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세속의 법을 따라도 다툼이 없느니라.
以是故 除二種不淨語(이시고 제이종부정어) 本隨世故用一種語(본수세고용일종어)
이런 까닭에 두 가지 부정한 말의 근본을 제거하고 세속을 따르는 까닭에 한 가지 말만을 사용하나니
佛弟子隨俗故說我(불제자수속고설아) 無有咎(무유구)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속을 따르기 때문에 '나'라고 말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느니라.
復次(부차) 若人著無吾 我相言是實(약인착무오 아상언시실) 餘妄語(여망어)
또한 어떤 사람이 '나'없는 형상에 집착되어 “이것만이 진실하고 나머지는 거짓말이다”라고 한다면
是人應難(시인응난) 汝一切法實相無我(여일체법실상무아) 云何言如是我聞(운하언여시아문)?
이 사람은 당연히 “그대여,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은 '나' 없음이거늘 어찌하여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하는가?”라고 힐난 받으리라.
(또한, 만약 사람이 “무아(無我)”가 실상(實相)이라는 말에 집착하게 되어, 이러함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들은 거짓말이라고 여기게 되어, 이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따지기를, “너는 일체법의 실상(實相)이 ‘무아(無我)’이거늘, 어쩌자고 ‘여시아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냐?”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今諸佛弟子(금제불제자) 一切法空無所有(일체법공무소유) 是中心不著(시중심불착)
이제 모든 불제자들은 일체 법이 공하여 정해진 자성이 없는 무소유임을 알았고 여기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亦不言著諸法實相(역불언착제법실상) 何況無我法中心著(하황무아법중심착)?
또한 모든 법의 실상에도 집착하지 않거늘 하물며 無我法='나' 없는 법에 마음이 집착하리오.
以是故 不應難言何以說我(이시고 불응난언하이설아)
이러한 까닭에 “어찌하여 '나'라고 말하는가?”라며 힐난해서는 안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