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維摩經)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4

Skunky 2023. 5. 10. 07:00

21.심혜보살
深慧菩薩曰(심혜보살왈) 是空是無相(시공시무상) 是無作爲二(시무작위이)

심혜(Gambhīramati)보살이 말하였다. 공함이 차별의 모습을 떠난=無相이니, 구하는 바가없는=無作(aparaihit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지만, 

The bodhisattva Deep Wisdom said, Whether it is emptiness, formlessness, aimlessness-constitute a duality. 

空卽無相(공즉무상) 無相卽無作(무상즉무작

그러나 공은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무작이니,  

Emptiness is formlessness, and formlessness is aimlessness. 

若空無相無作(약공무상무작) 則無心意識(즉무심의식

만약 공하고 모양도 없고 작위도 없다면, 곧 마음=心意識이 없다는 것이며  

If empty, formless, and aimless, then there is no mind, intent, or consciousness. 

於一解脫門卽是三解脫門者(어일해탈문즉시삼해탈문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이 중 하나인) 한 해탈의 문=一解脫門에서   가지 해탈의 문=三解脫門 (체득하는 )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o is in one liberating gate is within all three gates of liberation, and this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若空無相無作(약공무상무작則無心意識(즉무심의식)()()() 나집은 이하의 가지 것에 관계시켜 이것들이 없는 것에는 식의 가지 작용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겸, 현장, 티베트 역에서는 모두 가지 것을 바라는 생각이 없는 [無作․無願]”이라고 했다.]

[공과 무상과 무작이 다른 것[]이지만 공이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무작이라서 결국 다른 셋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하나하나가 각각 한 가지 해탈문이지만 셋이 하나이므로 삼해탈문이 곧 일해탈문이다.]
[대승의 3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하고 있으며, 3해탈문은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입니다. ‘무작’을 어떤 경전에서는 ‘무원(無願)’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무원’= ‘무작’은 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空) 반야심경에서는 ‘제법공상(諸法空相)’을, 금강경에서는 ‘온갖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 같나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합니다. 
이 공(空)은 절대 궁극의 필경공(畢竟空)을 말합니다. 
공(空)은 철저한 무상(無相)이고 당연히 무작(無作)ㆍ무원(無願)입니다. 내가 공의 경계나 광명 경계를 하나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짓는 행위[作]가 있는 것입니다. 짓는 행위가 있음은, 닦음이 있고 증득함이 있습니다. 무작은 닦음도 없고 증득도 없습니다. 공ㆍ무상ㆍ무작에 도달한다면, ‘심의식(心意識)’은 자연히 공해지고 해탈하게 됩니다. 해탈이란? 지혜에 의한 해탈, 대지혜의 성취입니다.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 ‘심(心)ㆍ의(意)ㆍ식(識)’ 에서 ‘무작’은 ‘심’과 ‘무상’은 ‘의’와 ‘공’은 ‘식’과 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심혜보살은 ‘어느 하나의 해탈문으로 깊이 들어가도 곧 3해탈문이니, 이것이 절대적인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홍남서원] 

 

22.적근보살
寂根菩薩曰(적근보살왈) 佛法衆爲二(불법중위이)

적근(ntendriya)보살이 말하였다.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가르침을 행하는 승단=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Serene Root said, Buddha, Dharma, and the Sangha are a duality. 

佛卽是法(불즉시법) 法卽是衆(법즉시중)

부처님은  법(가르침)이며, 법(가르침)은  그것을 실천하는 승단이니,

Buddha is the Dharma, and the Dharma is the Sangha. 

是三寶皆無爲相(시삼보개무위상) 與虛空等(여허공등)

 3 모두가 모양이 없는=無爲으로서 허공과 같으며, 

The three treasures are the marks of the unconditioned, the same as emptiness, 

一切法亦爾(일체법역이) 能隨此行者(능수차행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일체법 또한 이와 같아서 이것을 알고  행하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and all Dharmas are also thus. Who cultivates according to this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佛卽是法(불즉시법)=  부분을현장은 “() 본성(本性:法性) 그대로 법의 본성,” 티베트 역에서는 “불의 본성은 가르침이다,” “가르침의 본성은 승단(僧團)이다 했다.]

[부처님과 법과 대중[]이 둘이라는 말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삼보가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무위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무위라는 것은 허공과 같다따라서 일체법도 또한 그렇다일체법이 무위법이며 불법이다.]

 

23.심무애보살

心無碍菩薩曰(심무애보살왈) 身 身滅爲二(신신멸위이)

심무애(Apratihatanetra)보살이 말하였다. 몸=身과 몸의 멸=滅身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The bodhisattva Unimpeded Mind said, The body and body cessations are a duality. 

身卽是身滅(신즉시신멸) 所以者何(소이자하) 見身實相者(견신실상자)

不起見身及見滅身(불기견신급견멸신) 

몸이 그대로 몸의 멸함이니, 왜냐 하면, 몸의 진실한 본성=實相을 보는 사람은 몸도 몸의 멸함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 body is the extinguishment of the body. Why? Those who perceive the body’s true form do not give rise to perceiving the body or of the body’s extinguishment. 

身與滅身無二無分別(신여멸신무이무분별) 於其中不驚(어기중불경)

不懼者(불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몸과 몸의 멸함은 상대적인 차별이나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알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re’s no duality nor distinc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extinguishment of the body. Those from among this without fright nor fear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몸은 번뇌를 뜻하고 몸의 소멸은 열반을 뜻한다. 번뇌를 소멸한 자리가 열반이며 열반은 번뇌의 반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두 가지가 아니며 나누어 질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에도 놀랄 것이 아니며 두려울 것도 아니다.]


24. 상선보살

上善菩薩曰(상선보살왈) 身口意善爲二(신구의선위이) 是三業皆無作相(시삼업개무작상) 

상선(Suvinīta)보살이 말하였다.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삼업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이 삼업 모두에는 지음이 없는=無作相이니, 

Bodhisattva Supreme Goodness said, Good body, speech, and mind form a duality. The three types of karma are all marks of non-action. 

身無作相(신무작상) 卽口無作相(즉구무작상) 口無作相(구무작상) 卽意無作相(즉의무작상)

몸의 지음이 없는 상이 곧 입의 지음이 없는 상이며, 입의 지음이 없는 상 그대로가 곧 뜻의 지음이 없는 것이니,  

Body’s marks of non-action is the same as the mark of non-action of speech. Mark of non-action of speech is the same as mark of non-action of the mind. 

是三業無作相(시삼업무작상) 卽一切法無作相(즉일체법무작상)

이들 삼업의 지음 없음이 곧 일체법의 지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能如是隨無作慧者(능여시수무작혜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능히 이와 같이 지음이 없음=無作의 지혜에 따르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ose who can follow the wisdom of non-action like this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작위(作爲)하는 것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셋 하나하나가 지어도 지음이 없는 무작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모두 지음이 없는 모습이다. 지음이 없는 모습은 곧 지음이 없는 지혜다.] 

[몸과 말과 생각<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 이 셋은 모두 억지로 작위 함이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애써 짓지 않으면 곧 말도 애써 짓지 않고 동시에 생각도 애써 짓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에 애써 작위 함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며 이와 같이 아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25. 복전보살
福田菩薩曰(복전보살왈) 福行罪行不動行爲二(복행죄행부동해위이)

복전(Puyaketra)보살이 말하였다. “(욕계의 선행인) 복행과 (10악도의 악행인) 죄행과 (색계, 무색계의 선행인) 부동행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Blessed Field said, Meritorious deeds, sinful deeds, immovable deeds are a duality. 

三行實性卽是空(삼행실성즉시공) 空則無福行(공즉무복행)

이들 세 가지 행의 실다운 본성=實性이 곧 공한 것이며, 공하므로 곧 복의 행도 없으며,

The true nature of the three kinds of deeds is empty. Since they are all empty, 

無罪行無不動行(무죄행무부동행) 於此三行而不起者(어차삼행이불기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죄의 행도 없으며, 무동행도 없으며, 이 세 가지 행을 일으키지 않는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re are no meritorious deeds, sinful deeds, or immovable deeds. Those not raising distinctions between the three deeds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부동행(不動行, nijybhisaskra)= 나집의 설명에 의하면, 복덕은 욕계의 선행으로 업의 과보를 가져오고, 악행은 10불선도(不善道)를 행하는 것으로 고의 과보를 가져오며, 무동행(無動行), 즉 부동행(不動行)은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행위라고 주석했다.(卍續藏 27, p.506下)]

[복이 되는 행동죄가 되는 행동 등의 문제는 일반적인 불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다또 죄도 복도 아닌 움직임이 없는 행동도 있으나, 이 세 가지 행동은 모두가 실다운 자성이 없다는 이치를 아는 것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덕과 비공덕과 그 어떤 것도 아닌 부동(不動)이라는 이 세 가지 행위를 둘이라고 하며 반대로 공덕과 비공덕과 부동이 모두 무작위인 것을 불이라고 합니다.
공덕과 비공덕과 부동을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이며, 거기에는 공덕도 없고 비공덕도 없으며, 또 부동인 것도 없고 작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 셋 모두를 행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순야 착지]

['유정(有情)은 제대로 동(動)하거니와 무정물(無情物)은 도무지 동(動)하지 못하니
어떤 사람은 부동행(不動行)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무정물의 부동(不動)과 같으리.
만약 참된 부동 찾으려 하면 움직임 그 위에 부동이 있음을 알라.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무정에는 원래로 불(佛) 종자 없느니라.
능히 모든 상을 잘 분별하되 제1의(義)엔 동함이 없으니
다만 이 같은 견해 가지면, 이는 바로 진여(眞如)를 씀이로다.'
유정은 사람이나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무정은 돌이나 나무처럼 못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있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그건 돌맹이와 같은 것이니 그런데 현혹이 돼서는 안 된다. 정말 부동이란 게 뭔지를 알고자 하거든 늘 움직이는 그 속에 부동이 있음을 알아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속에도 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을 부동이라 한다,
몸뚱이를 움직이지 않고 생각을 안 하는 것으로 참부동을 구한다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분별하지 말라니까 콩인지 팥인지도 구분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모든 상을 잘 분별하되 옳으니 그르니 하는 상을 짓지 않으면 제1의 근본 자리에서는 동함이 없다.-법륜스님의 육조단경]

 

26.화엄보살
華嚴菩薩曰(화엄보살왈) 從我起二爲二(종아기이위이)

화엄(Padmavyha)보살이 말하였다. 我=나로인해 일어나는 구별(법)을 서로 대립한 두 가지라 하지만, 

The bodhisattva flower Adornment said, Dualism arises from the self, which is a duality. 

見我實相者(견아실상자) 不起二法(불기이법)

나의 진실한 실상을 (공이라고) 보는 사람은 (남과 나라는) 두 가지 분별=二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Those who see the true form of the self do not arise dualistic Dharmas.

若不住二法(약불주이법) 則無有識(즉무유식) 無所識者(무소식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이 두 가지 법에 집착=住하지 않으면 (나와 남이라는) 식별함=有識이 없고, 식별되는=所識도 없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One has no consciousness when there’s no abiding upon dualistic Dharmas. Those without consciousness of anything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세상사는 모두가 나로부터 남이 있게 된다그래서 두 가지가 되지만 나라는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아 텅 비어 공한 줄 안다면 나와 남이라는 두 가지 법을 일으키지 않는다.]

[“자아가 일어나면서부터 둘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지만, 자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이에게는 둘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둘 사이의 대립을 벗어나게 되면 정작 알려는 주체도 없고 그 대상도 없다는 뜻입니다.”- 순야 착지]

 

27.덕장보살
德藏菩薩曰(덕장보살왈) 有所得相爲二(유소득상위이)

덕장(rīgarbha)보살이 말하였다. 얻을 바가 있는 모습을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니,

The bodhisattva Virtue Treasury said, The appearance of having something to attain is dualistic. 

若無所得(약무소득) 則無取捨(즉무취사無取捨者(무취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제법이 공하다고 깨달아) 얻을 것(집착할 대상) 없다면, 취하고 버릴 것이 없으며,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en there is nothing to gain, there is no seizing or forsaking. The ones who neither grasp nor forsake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얻을 것이 있으면 얻는 자가 있고, 따라서 취할 것도 있게 되고, 버릴 것도 있게 되어서 상대적인 차별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얻을 것이 없는 불교의 근본 이치를 알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식행위에 의하여 둘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지만 인식이 없는 곳에는 둘 사이의 대립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식의 결과를 바탕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