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維摩經)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2

Skunky 2023. 5. 8. 07:00

3. 불순보살

不眴菩薩曰(불순보살왈) 受不受爲二(수불수위이)

불순(Animia)보살이 말하였다.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受(dna)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는=不受(andna)를 둘이라고 하며, 

The bodhisattva Unblinking said, Experiencing and non-experiencing being a duality. 

若法不受(약법불수) 則不可得(즉불가득以不可得(이불가득) 故無取無捨(고무취무사)

無作無行(무작무행)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존재하는 것= 受=받아들이 않으면, (사물을) 얻을 수가 없으며, 얻을  없기 때문에 취함도 없고, 버림 없으며, 지음도 없고, 행하는 다 없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There will be no attainment where there is non-experiencing of the Dharmas. When there is no attainment, there is no seizing, renouncing, creating, or enforcing. Which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사람의 삶이란 다만 이 받아들임 뿐이다. 감수하고 느껴 아는 모든 것으로부터 사람의 삶이 영위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경계를 어떻게 감수하고 또 감수하여 어떻게 반응하면서 일생이 다 지나간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대해서 감수하는 것이 해결되면 취하고 버릴 것이 없게 되므로, 지음도 없고 행함도 없어서,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4.덕정보살

德頂菩薩曰(덕정보살왈) 垢淨爲二(구정위이)

덕정(Śrīka)보살이 말하였다. 垢=더러움(saklea)과 淨=청정함(vyava-dna) 둘이라고 합니다.

Virtue peak bodhisattva said, Defilement and purity are a duality. 

見垢實性(견구실성) 則無淨相(즉무정상) 順於滅相(순어멸상)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더러움의  實性=실다운 성품(bhla-kana) 보면, 곧 청정한 모습=相도 없는 적멸 모습=滅相 따르게 되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Hence, when one perceives the real nature of defilement, there will no longer exist marks of purity, leading to the extinction of marks. That is to enter Dharma gate of nonduality. 
[見垢實性(견구실성) 則無淨相(즉무정상) 順於滅相(순어멸상)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문장을 현장은 번뇌와 청정함이 둘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 분별은 없고 깊이 분별을 끊어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현장의 역문 참고했다.]

[삶의 대부분은 깨끗하고 더럽다, 좋고 나쁘다, 선이고 악이라는 상대적인 문제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깨끗한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그 실체를 잘 관찰해 보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없다. 오직 텅 빈 적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5.선숙보살

善宿菩薩曰(선숙보살왈) 是動是念爲二(시동시념위이)

선숙(Bhadrajyotis)보살이 말하였다. (마음 또는 행동이) 움직이는=動(vikepa) 念=생각(manasikr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Excellent Dwelling said, The mind’s movements and thoughts are a duality. 

不動則無念(부동즉무념) 無念則無分別(무념즉무분별)

通達此者(통달차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은 곧 생각이 없는=無念이요 생각 없다는 것은 곧 분별이 없는=無分別이니 통달한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선숙보살이 말하기를 동[행동]과 염[생각]이 둘이 되거늘  움직이지 아니하면 생각도 없음이요, 생각이 없으면 분별이 없음이라  이것을 통달하는 사람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So, if there are no mental movements, then there will be no thoughts, and without thoughts, there will be no distinctions. The one who realizes this is the one who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是動是念爲二(시동시념위이)= 이에 대해서 현장은 산동(散動) 사유(思惟),” 티베트 역에서는 동요(動搖) 집착(執着)”이라고 했다.]

[경계가 움직이는 것이 먼저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생각하여 아는 것이 먼저인가? 또 이런 말도 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바람 때문인가? 깃발 때문인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는 것이 없다면 분별이 없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6.선안보살

善眼菩薩曰(선안보살왈) 一相無相爲二(일상무상위이)

선안(Sunetra)보살이 말하였다. 하나의 모양=一相(ekalakaa) 모양 없음=無相(alaka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The Excellent Eyed bodhisattva said, Oneness of forms and formlessness is a duality. 

若知一相卽是無相(약지일상즉시무상) 亦不取無相(역불취무상)

入於平等(입어평등)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일상 무상으로 알고 무상을 취하지 않아 평등을 체득하게 되면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Understand that the oneness of forms is non other than formlessness. Non-grasping of what’s formless is to perceive all things as equal. Which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여기서의 일상은 절대적인 일상이다. 하나나 둘이나 셋 등에서의 일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의 일상은 곧 무상이나 마찬가지이고, 무상은 그 무상마저 없는 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一相과 無相 만법이 모두 하나이니, 상대적 개념으로 크고 작다, 가깝고 멀다 등의 분별을 떠난 곳에서 한 모양(一相)이 된다. 어느 정신적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올랐다는 상이 있으면 이미 한 모양이 아니다.  하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아무 모양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즉 무상(無相)이 된다.

法性, 즉 법의 성품이란 바로 공(空)이며, ​일체가 공하기에 일체개공이고, 일체가 공하기에 한 모양(一相)이며, 한 모양이란 곧 無相입니다. 즉 空과 無相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7.묘비보살

妙臂菩薩曰(묘비보살왈) 菩薩心聲聞心爲二(보살심성문심위이)

묘비(Subbu)보살이 말하였다. 보살의 마음=菩薩心과 성문 마음=聲聞心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The Exquisite Arm bodhisattva said, The bodhisattva mind and the sravaka mind are a duality. 

觀心相空(관심상공) 如幻化者(여환화자) 無菩薩心(무보살심) 無聲聞心(무성문심)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마음의 모습=心相 공하여 허깨비=幻化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관찰하게 되보살심 없고 성문심 없는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By perceiving the mind’s forms as empty, like a conjured figure, that there is no bodhisattva mind and no sravaka mind.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보살의 마음과 성문의 마음 뿐이 아니라, 내 마음과 너의 마음, 갑이라는 사람의 마음을이라는 사람의 마음남자의 마음여자의 마음젊은이의 마음늙은이의 마음동양 사람의 마음서양 사람의 마음 등등 무수히 많다그러나 마음의 실체는 텅 비어 공한 것이라고 아는 것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8.불사보살

弗沙菩薩曰(불사보살왈) 善不善爲二(선불선위이)

불사(Puya)보살이 말하였다. (kuala) 불선(akual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니,

The bodhisattva Pusya said, Virtuous and unvirtuous are a duality. 

若不起善不善(약불기선불선) 入無相際而通達者(입무상제이통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만약 선도 불선도 일으키지 않고, 상이 없는 경지(실제)=無相際 들어가서 이를 통달하면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합니다.
So, if one does not arise the virtuous and unvirtuous, but understand thoroughly and enter the realm of the formless,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선함과 선하지 않음은 틀림없는 두 가지이나, 그러나 그것은 그와 같은 행위를 일으켰을 때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만약 선함과 선하지 아니함이 형상이 없음을 통달한다면 그것은 둘이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9.사자보살

師子菩薩曰(사자보살왈) 罪福爲二(죄복위이)

사자(Siha)보살은 말하였다. 죄(svadya)와 복(anavady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Lion bodhisattva said, Sin and blessing are a duality. 

若達罪性(약달죄성) 則與福無異(즉여복무이) 以金剛慧決了此相(이금강혜결요차상)

無縛無解者(무박무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죄악  자체의 본성(성품)을 통달하면 복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니금강의 지혜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속박되지도 않고, 해방=벗어남 없으니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you realize the nature of sin, then there is no difference with blessing. When one resolves such an appearance by using diamond wisdom, without bondage or liberation,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罪福爲二(죄복위이)= 현장티베트 역은 “유죄와 무죄이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죄와 복이라는 이 두 가지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며 산다죄의 성품도 본래 공하고 복의 성품도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안다면 그것은 금강의 지혜다그렇게 되면 죄나 복에 대해서 속박도 없으며 벗어남도 없을 것이다.]

 

10. 사자의보살
師子意菩薩曰(사자의보살왈) 有漏無漏爲二(유루무루위이)

사자의(Sihamati)보살은 말하였다. 유루(ssrava)와 무루(ansrava)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Lion Intent bodhisattva said, Outflow and non-outflow are a duality. 

若得諸法等(약득제법등) 則不起漏不漏想(즉불기누불누상) 不著於相(불착어상)

亦不住無相(역불주무상)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함을 알면, 그 때 번뇌=漏나 번뇌가 없는 생각=無漏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생각에 집착함도 없으며, 생각이 없는=無想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one receives the Dharmas as equals, there will not be distinctive thoughts between outflow and non-outflow, and no attachment to form nor any dwelling upon the formless,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不著於相(불착어상) 亦不住無相(역불주무상)=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각’을 나집은 ‘상(相)’이라고 했으나, 전문(前文)과의 관계로 보아 ‘상(想)’이 옳을 듯하고, 현장과 티베트 역도 ‘상(想)’이다. 또 이곳을 ‘상(相),’ ‘무상(無相)’이라고 한다면, 앞의 선안(善眼)보살과 중복되므로 지금은 ‘상(想),’ ‘무상(無想)’으로 번역했다.]

['루(漏)'는 번뇌를 의미하고 무루는 번뇌가 없다는 뜻이며, 유루는 번뇌가 있다는 말이다. 유루는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적인 자극이 오면 그것에 물들어 내적인 습기로 말미암아서 번뇌에 노출되는 현상을 '루(漏)'라 한다. 따라서 ‘유루’란 육근에서 ‘번뇌’라는 허물을 항상 만들어 누출한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무루’란 물이 새지 않는다는 말인데, 구경위(究竟位 -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 단계의 마음으로서 일체 세간사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원만해 번뇌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아미산]

 

11. 정해보살

淨解菩薩曰(정해보살왈) 有爲無爲爲二(유위무위위이)

정해(uddhdhimukti)보살이 말하였다. 유위(saskta)와 무위(asaskta)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며,

The bodhisattva Pure Liberation said, The conditioned and the unconditioned are a duality. 

若離一切數(약리일체수) 則心如虛空(즉심여허공)

以淸淨慧無所碍者(이청정혜무소득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일체 (유위의) 헤아림=數(saskara)를 떠나면 마음은 허공과 같아져 (집착을 떠나) 맑은 지혜는 걸림이 없게 된,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But if one transcends all enumerations, then the mind will be like emptiness, free from all obstacles with pure and tranquil wisdom.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有爲無爲爲二(유위무위위이) 이 부분의 티베트 역은 “이것은 업이다, 이것은 불업이다”이다.]

[인과 연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멸 변화하는 유위나 반대로 각종의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무위나 둘이라면 둘이지만 백법(百法중에 6종 무위이니, 나머지 수의 유위니 하는 그 숫자를 떠나면 마음은 텅 빈 허공과 같다.]

[유위법(有爲法)이란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다.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역사이래로 사람이 만든 법은 모두 유의법인 셈이다. 성경, 불경, 코란, 헌법 등등 모두 유의법이다. 선풍기 바람은 유의에 의한 바람이다.   

무위법(無爲法)이란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연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 생멸변화 등의 작용을 갖지 않는 상태, 생멸변천 현상을 초월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절대의 법을 말한다. 이는 탐(貪) 진(瞋) 치(癡)가 소멸돼 온갖 분별 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상태이며, 고락(苦樂)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지리산 천년 3암자길]

 

12. 나라연보살

那羅延菩薩曰(나라연보살왈) 世閒出世閒爲二(세간출세간위이)

나라연(Nryana)보살이 말하였다. 세간(laukika)과 출세간(lokottar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며,

The bodhisattva Narayana said, The human world and transcendental world are a duality.  

世閒性空(세간성공) 卽是出世間(즉시출세간) 於其中不入(어기중불입)

不出不溢不散(불출불익불산) 是爲入不二法門(시위윕불이법문)

그러나 세간의 본성 자체가 공(함을 깨닫는 것)이 그대로 출세간이며, 그 가운데에서 들어가고 나감이 없으며, 넘치거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 human world is inherently empty, thus is the transcendental world. Which is without entering nor exiting, without outflow nor scattering; this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불교에서는 출세간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그런데 흔히 세속에서 사는 것을 세간이라 하고 사찰이나 특별한 수행처에서 사는 것을 출세간이라고 생각한다유마경에서는 세간의 본성이 공한 그 자리가 곧 출세간이라고 하였다세간도 출세간도 사람의 안목에 달려있다어디에 살든지 사는 곳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면 곧 출세간이다.]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에서 세간과 출세간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번뇌와 욕망의 속박여부에 따라 둘로 나눈 이다. 즉 세간이란 번뇌와 욕망에 속박된 미망의 세계를 말하며, 반면에 출세간이란 번뇌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지칭한다. 예컨대 세간은 중생들의 정신적인 단계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살아가는 세계를 의미하는 3계(욕계․색계․무색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출세간은 생사윤회의 세간을 뛰어넘은 경지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세간과 출세간은 물질적인 세계가 아닌 정신적인 세계나 그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세간(世間)이란 산스크리트 원어로는 ‘로카(loka)’인데, 이는 ‘부수다(to break)’ 등을 의미하는 ‘동사어근 √luj’에서 파생된 명사로 ‘부서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출세간(出世間)이란 산스크리트 원어로는 ‘로코타라(lokottara)’인데, 이는 ‘loka(세간)’와 위쪽이나 반대편을 의미하는 접두어(ut)에 ‘벗어나다(to escape from)’ 등을 의미하는 ‘동사어근 √tṝ’가 결합된 형태에서 파생된 명사로 ‘세간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요컨대 세간과 출세간은 윤회와 업에 종속되는 세속적인 삶과 윤회와 업을 벗어나고자 하는 출세간적인 삶으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세간과 출세간은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부정적인 잠재적 번뇌로 인한 업과 윤회의 굴레에 종속됐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이 두 차원의 삶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삶을 짚어보고 되돌아보는 깊은 성찰을 하거나 수행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인 노력을 어떻게 기울이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나 그 차원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앙굿따라니카야’에서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 무엇이 여덟인가? 그것은 이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 등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

한편 출세간적인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앙굿따라니카야’에서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득이 생기면, 그는 다음과 같이 숙고한다. 나에게 이득이 생겼지만 이것은 참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그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 통찰한다. …그리하여 이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하고, …괴로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순응함과 적대함을 버려서 생로병사로부터 해탈한다.” 

사실 세간적인 삶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나 자아의식(ego)에 따라 살아가는 범부들의 을 말한다. 이러한 범부들의 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성욕․수면욕․재물욕․명예욕 등의 5욕락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는 8가지 세상의 법들을 쫓아 허둥지둥 분주하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살아왔는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무상함이나 허망함 등을 뒤늦게 실감하게 된다. 

결국 세간적인 삶과 출세간적인 삶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5욕락의 경계와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에 기인하는 애착이나 집착 등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거나 성찰하는 수행적인 노력 및 그 통찰적인 지혜계발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활동과 더불어 이러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노력, 즉 사티(sati)를 통한 성찰과 지적 통찰이 세간적인 삶과 출세간적인 삶을 매개하고 지혜롭게 중도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요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김재권,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