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또한 영락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불자(佛子)여, 초지에서 일념무상(一念無相)한 법신의 법신지(法身智)로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성취해서, 2제(二諦, 진제와 속제)를 함께 비추어 본다면, 마음 마음마다 적멸해서 법류수(法流水) 중에서는 범부의 심식(心識)으로는 두 종류의 이종법신(二種法身)을 측량할 수 없느니라.”


이를 해석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두 종류의 이종법신(二種法身)의 하나는 법성신(法性身)이고, 다른 하나는 보화신(報化身)이며, 

또 법류수(法流水)라는 것은 초지 보살이 법성지(法性智)의 흐름 가운데에서, 그 흐름에 맡겨 부처님 지위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닦거나 이룩한 바가 없으니, 어찌 2지(二地)나 3지(三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지(地) 이전의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迴向)의 3현(三賢) 보살이 성인 지위에 들게 되면, 다만 법성의 흐름 가운데에서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여서, 자연히 묘각(妙覺)의 대해(大海)로 흘러 들어가나니,

불자여, 나아가 3현(三賢)과 10지(十地)의 명칭 또한 명칭이나 모습이 없는 명무상(名無相)이지만, 단지 응화(應化)한 까닭에 옛 부처님의 도법(道法)에서는 10지(十地)라는 명칭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전은 화엄경을 설한 뒤에 3승인(三乘人)을 교화한 것이니, 즉 다른 때의, 별시(別時)에 처음 성불한 보리수 아래에서 화엄의 법문을 간략하게 거듭 서술한 것이다.

이 영락경에서 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예전에 보광명당(寶光明堂)에서 정토법문(淨土法門)을 설하고,

나아가 도리천(忉利天)에서 10주(十住)를 설하였는데, 이제 다시 간략히 설한다”고 하였으니, 자세히는 경전에 설해져 있다.

ㅡ화장세계는 비로자나의 보토(報土)이기 때문에 정토이나, 이는 예토와 정토를 구별해서 말하는 정토가 아니다.

 

이 경전의 다음 내용을 보면, 10지(十地)를 설한 이후에는 제3선(第三禪)에서 11지(十一地) 법문을 설했지만,

경전에서는 서방에서 오지 못하였으니,

경전에서 설하기를, 

“불자야, 내가 먼저 제3선(第三禪) 중에서, 색계의 4선천과 무색계의 4천의 8선(八禪)의 대중들을 모아 놓고,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불화삼매(佛華三昧)에 든 것을 설하면서 백만억의 게송을 읊었으니, 이제 간략하게 한 게송의 뜻만 설하여서 중생의 마음을 열겠으니, 그대들은 받아 지니도록 하여라.”

ㅡ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 지금의 일생이 끝나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르는 등각위의 보살로서, 예를 들면,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이 세상에 나와서 성불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10지(十地)에서 미혹을 끊는 법상(法相)의 문을 세운 영락경에 의거해서 본다면,

경전에서는 “불자여, 앞의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迴向)의 3현(三賢)은 삼계의 무명을 조복하면서도 거칠고 조잡한 업인 추업(麤業)만을 없애나니, 왜냐 하면 생을 받아서 수생(受生)할 때 인연이 있는 연자(緣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주해(注解)에서는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迴向)의 3현 보살이 처음 법성의 지혜를 받아서 불가(佛家)에 태어날 때에는 자비심이 두드러져서, 삼계의 모든 중생을 자식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을 것을 서원(誓願)하고,

자비심 때문에 삼계의 업을 윤택하게 하는 까닭에 삼계에서 생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경전에서는 “업을 윤택하게 해서 미래의 과(果)를 받는 까닭에 그것을 이름하여 식용(息用)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주해(해설)에서는 “삼계에서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까닭에 작용을 쉬게되어서 식용(息用)이 된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는 “그러나 사랑의 작용인 애용(愛用)을 끊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는데,

주해(해설)에서는 “삼계의 업은 없으나, 자비의 자업(慈業)으로 생을 받는 일은 없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며, 

 

경전에서는 “11인(十一人)이 법계 가운데에서 삼계의 업과(業果)를 조복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주해(해석)으로, “11인(十一人)이라는 것은 10지(十地)와 등각위(等覺位)를 합쳐서 11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또한 경전에서는 “초지(初地)에서부터 7지(七地)까지는 삼계의 업과(業果)가 남김없이 모두 조복하였으므로,

8지(八地)에서야 비로소 소진(消盡)하게 된다”고 설하는데,

이에 대한 주해(해설)는 “7지(七地) 이전에는 조복시켜서 소진하는 것이요,

8지(八地)에서는 법에 부합해서 소진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경전에서 “8지(八地) 이상은 부처를 짓는 것을 보여주는, 시현작불(示現作佛)하는 것으로,

즉 왕궁에 태어나서 출가를 하고, 도를 얻어 전법륜(轉法輪)을 하고, 마지막으로 멸도(滅度)하시어 열반에 드심으로서, 모든 화신불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삼계의 과보는 없고, 오로지 무명의 습기만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주해(해석)로는 “이 8지(八地)가 현전하니, 무공용지(無功用智)에 맡겨서 중생을 제도하지만 중생의 상이 없는 무중생상(無衆生想)이다.

7지(七地) 이전은 자비가 두드러지고, 8지(八地) 이후부터는 무상지(無相智)와 현전지(現前智)가 두드러져서, 비록 생을 받지는 않을지라도 운행에 맡긴 임운(任運)으로 사람을 제도한다.

법을 사랑하는 습기가 없지 않기 때문에 불지(佛地)에서 처음으로 소진하고, 본원력(本願力)을 쓰기 때문에 변화로 태어나다”고 설하는 것이니,

 

그래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내가 옛날 하늘에서 생(生)과 불생(不生)의 뜻과 업생(業生)과 변생(變生, 변화의 생)을 설하였다.

불자여, 성인의 성위(聖位)에는 두 가지의 이종업(二種業)이 있으니,

하나는 혜업(慧業)으로, 상념도 없는 무상(無想)이고 낳음도 없는 무생(無生)의 지혜로서 마음 마음마다 법을 반연하면서도 비춤이 없는 무조(無照)을 낳으니, 이를 혜업이라 이름하며,

또 다른 하나는 공덕업(功德業)이니, 진실한 지혜의 실지(實智)가 유제(有諦, 세간의 세제)를 초월하여 유위(有爲)와 무루(無漏)에 백만 아승기의 공덕을 모아서 쌓은 까닭에 공덕업(功德業)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초성(初聖) 이상은 생을 받는 수생(受生)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변역(變易)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며,

원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 겁 또는 천 겁 동안 변화의 생에 머무는 것이다.”

 

이상은 모두 본업영락경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니, 이는 바로 원교(圓敎) 속의 돈(頓)이기도 하고 점(漸)이기도 한 이문(二門)인 것이다.

 

돈(頓)이기도 하다는 것이란, 이 경전에서 “10주(十住) · 10행(十行) · 10회향(十迴向)의 3현 보살이 곧바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서 법성의 흐름 속에 들어가서, 그 흐름에 맡겨 불해(佛海)에 이르면서도 다시 작위하는 것이 없다”고 설한 것이고,

점(漸)이라는 것은 미혹을 끊는 단계를 따라 하나하나 닦아 나아가는 것으로, 이 영락경의 3현(賢)의 10주(住)에서 곧바로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은 초지(初地)에서 도를 보아 견도(見道)하고, 그 이전에는 미혹을 조복하는 권교(방편)와는 다른 것이다.

가령 화엄경과 비교해 보면, 십지품(十地品)의 초지(初地)는 범부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는 것으로, 성인이라야 배운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다. 

 

또한 나아가고 물러서는 진퇴(進退)를 밝히는 것으로, 영락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자여, 나아가는 자도 있고 물러서는 자도 있으니, 10주(十住) 이전에는 항하사(恒河沙)와 같이 많은 중생이 모든 범부의 법에서 보리심을 발하여 불법을 배우고 행하는데, 믿는다는 생각의 신상심(信想心) 가운데에서 행하는 자가 물러남이 있는 퇴분(退分)의 선근(善根)이다.

 

여러 선남자(善男子)들이 1겁ㆍ2겁에서부터 10신(十信)을 수행하여 10주(十住)에 들어 가지만,

이 선남자가 그 때의 초주(初住)에서부터 제6주(第六住)에 이르기까지,

만약 제6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정관(正觀)이 현전하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이 호념(護念)하는 바가 되는 까닭에 제7주(第七住)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자재(不退自在)하므로,

7주(七住) 이전은 물러남이 있을 수 있는 영역의 퇴분(退分)이라 이름한 것이다.

 

불자여, 만약 물러서지 않는 자라면, 제6 반야바라밀에 들어가 공(空)을 수행하여서 무아(無我)이고, 상대도 없는 무인(無人)이고,  주체도 없는 무주(無主)의 자(者)라야 필경에는 태어나지 않는 불생(不生)이고, 필경에는 정해진 불위(佛位)의 정위(定位)에 들어가는 것이다.

 

불자여,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자라면, 1겁이든 2겁이든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되나니,

예를 들면 나의 초회(初會) 대중의 중회(衆會) 가운데에서 8만 명이 물러난 것기 그러한 것이다.

즉 정목천자(淨目天子)나 법신왕자(法身王子), 사리불(舍利弗) 등과 같은 이들이 제7주(第七住)에 들고자 하였지만, 도중에 악한 인연을 만난 까닭에 범부의 불선(不善)으로 물러나게 되어서 종자의 성품을 익히는 습종성인(習種性仁)이라 칭하지도 못하고,

외도(外道)로 물러나서 1겁이나 10겁 또는 나아가 천겁(千劫) 동안 대사견(大邪見)과 5역(五逆)을 지어서 악한 짓을 하지 않음이  없었다.”

ㅡ5역죄(五逆罪), 무간 지옥에 떨어지는 죄로서, 5무간죄(五無間罪)라고도 하며,

첫째, 부모를 해치거나 살해산 죄,

둘째, 화합하는 승려의 교단을 깨뜨리는 죄,

셋째,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죄,

넷째, 아라한을 죽이는 죄,

다섯째, 갈마승을 깨뜨리는 죄이다.


여쭙겠습니다; 열반경에서는 “항상 머무는 상주(常住)라는 두 글자를 듣고서도 오히려 7겁(七劫) 동안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화엄경에서도 “설사 여래의 명호와 설법을 듣고서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지 못하였을지라도, 역시 종자를 성취해서 반드시 해탈을 얻어서 성불에 도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제6주(第六住)의 마음과 범부로부터 믿는 지위의 신위(信位)를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물러남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러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답하여 해석한다; 10신(十信) 가운데에서 뛰어난 이해의 승해(勝解)를 성취하지 못하였으며서도, 얻었다고 하면서 문득 교만한 마음을 내고, 착한 선우(善友)를 가까이하지 않고, 어진 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이러한 교만한 마음으로 인천(人天)에 오랫동안 거처하면, 홀연히 악업(惡業)이 일어나서 대지옥의 업을 숙성시킬 수 있는 것이나,

만약 태만하지 않고 한결같이 믿으면서, 훌륭한 벗을 구한다면, 즉시 이러한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니,

가령 권교(방편의 가르침)의 제6주(第六住)의 마음(心)이라면 물러나는 퇴위(退位)가 있을 수 있지만,

실교(實教) 중에 정체되어서 계체(稽滯)되는 이들을 질책하여서 닦아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리불은 성문(聲聞)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을 뿐, 실제는 성문은 아니므로, 그 지어낸 방편이 모두 중생을 제도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저 권교(權教, 방편의 가르침)의 제6주(第六住)의 마음(心)은 실제로 물러나는 것을 설하고 있으니, 왜냐 하면 권교(방편의 가르침)에서의 지(地) 이전의 3현(三賢) 모두가 아직 도를 보지 못한 미견도(未見道)이기 때문이다.

즉 수행의 작업이 모두 유위(有爲)이고, 모든 무명(無明)이 전부 절복(折伏)되 않아서 공(功)이 강하지 못한 자는 문득 퇴보하는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절복(折伏)하는 것에 힘이 있다면, 또한 퇴보하여 상실하지는 않을 것이니, 마치 뱀에게는 독이 있지만 주문의 힘 때문에 독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만 불법(佛法) 속 신심(信心)을 심어서 항상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이며, 어진 사람을 공경하고 따를 것이며,

모든 악인에게도 항상 자애로운 마음을 낼 것이며,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으로부터 모른는 것을 배울 것이며,

뛰어난 법을 들으면 한시라도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할 것이며, 일체의 허망함을 가르침에 의거하여 없애버리고,

3보리도(三菩提道)에 항상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야 하는 것이다.

무릇 인생의 법에 맞추어 사는 것이 법이니, 다만 악을 키우지만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퇴보할 것을 염려할 것인가?

 

이상으로 다섯 가지의 오종십지(五種十地)에서의 권교의 삼종10지(三種十地)는 다른 것이니,

즉 대품반야경에서는 단지 10지(十地)의 명칭만이 있을 뿐이니, 제8지는 대인지(大人地)라 하고, 제9지는 간혜지(乾慧地)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 명칭이 약간씩 다르다.

 

해심밀경에 나오는 10지(十地)의 명칭은 화엄경의 10지(十地)의 명칭과 같기는 하지만, 초지(初地)에서부터 11지(十一地)에 이르기까지 11 가지의 11추중(十一麤重, 거칠고 조잡한 번뇌)과 22 가지의 어리석음의 22우치( 二十二愚癡)가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품반야경과 해심밀경의 두 경전에는 단지 10지(十地)만 있을 뿐, 지(地) 이전의 4자량위(四資糧位)는 없는 것이다.

 

인왕경에서는 지(地) 이전에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의 4자량위를 설하고 있기는 하지만,

10신(十信)은 내범(內凡)이 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는 실교(實敎)에서 10주(十住)의 초심(初心)에서 거룩한 불성에 올라, 그 바탕(體)이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만약 10신(十信)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과 불신(佛身)의 인과가 둘이 아닌 무이(無二)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신해(信解)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출현품에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자기 마음의 일념 속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서 정법의 전정법륜(轉正法輪)을 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부처님의 불심(佛心)음과 자기 마음의 자심(自心)이 둘이 아닌 무이(無二)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신심(信心)을 믿음(信)이라고 이름할진대, 어찌 10주(十住)의 지위에서 이 마음을 증명하지 못하겠는가?

만약 이 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어찌 주(住)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바로 뜻으로, 불주(佛住)에 머무는 것을 주(住)라 이름붙인 것이며,

따라서 초발심의 주(住)에서 문득 정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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