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교의(敎義)의 차별을 10법의 의리(義理)로써 설명한 다섯 번째의, 각 지위(地位)에서 행하는 행상(行相)이 다른 것을 밝히는 것이란,
무릇 대승심(大乘心)을 일으킨 자는 그 근기에 의거해서 여섯 가지 수레의 육종승(六種乘)과 세 가지의 삼종오위십지(三種五位十地)의 차별행상(差別行相)이 같지 않으니,
육종승(六種乘)이란 무엇인가?
첫째, 염불(念佛)을 통해서 정토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염불문(念佛門)이요,
둘째, 정토의 관행(觀行)을 지어서 정토에 태어나는 관행문(觀行門)이요,
셋째, 공관(空觀)과 무아관(無我觀)을 닦아서 나아가는 문이요,
넷째, 유(有)와 무(無)를 회통하는 관지문(觀智門)이요,
다섯째, 점진적으로 불성을 보아서 닦아 나아가는 점견불설진수문(漸見佛性進修門)이요,
여섯째, 불성을 단박에 증명하는 원융문(圓融門)이니,
대승을 수행하는 자는 이 여섯 가지 수레의 행상(行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세 가지 삼종오위십지(三種五位十地)란 무엇인가?
첫째는 완전하지 못한 교설의 가전(假詮)과 완전하지 못한 지혜의 가지(假智)와 가진여(假眞如) 등을 닦아서 오위십지를 세우는 것이며,
둘째는 분수(分修)와 분진(分眞)과 분증(分證)의 부분적인 진여의 일분진여(一分眞如)로 오위십지를 세우는 것이며,
셋째는 돈수(頓修)와 돈진(頓眞)과 돈증(頓證)인 부처님 경계의 원만진여(圓滿眞如)로 오위십지의 행상을 세우는 것이니,
이 불승(佛乘) 중에는 가법(假法)이 없어서 언설과 명상(名相)이 모두 실(實)한 것이다.
이상의 삼종오위십지(三種五位十地)의 행상 속에는 보리를 지향하는 향보리자(向菩提者)와
보살행을 행하고자 하는 행보살행자(行菩薩行者)와
불과를 원만하게 하는 만불과자(滿佛果者) 모두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제 총체적으로 거론하자면,
저마다 스스로가 나아가고 있는 종지(宗旨)로 방편과 실제를 분간해서 장애를 벗어나게 하며,
수행의 공(功)이 있어서 서로를 비방하지 않게 하며,
차별을 분명히 요달함으로써 의심이나 후회가 없게 하니,
이는 수행이 진척된 자로 하여금 방편과 실제를 분명히 요달하게 한 때문이며,
성불한 자로 하여금 그 공(功)에 막히지 않게 한 때문이다.
육종승(六種乘)의
*첫째, 염불(念佛)을 통해서 정토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염불문(念佛門)이란, 화신불의 정토이지 진실한 정토가 아닌 것으로, 성품을 보안 견성(見性)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명(無明)이 바로 모든 여래의 근본지(根本智)임을 요달하지 못한 까닭이므로 유위(有爲)인 것이며, 예를 들면 아미타경(阿彌陀經)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정토의 관행(觀行)을 지어서 정토에 태어나는 관행문(觀行門)이란, 마음의 상념으로부터 생기는 까닭이며, 유위(有爲)인 까닭이며, 불성의 근본지혜를 보지 못한 까닭이며, 예를 들면 무량수경(無量壽經)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공관(空觀)과 무아관(無我觀)을 닦아서 나아가는 문(門)이란, 처음으로 반야를 설해서 범부의 실유(實有)와 2승의 생공(生空)의 아집(我執)을 타파하기 때문인 것으로, 공법(空法)을 많이 닦은 까닭에 유(有)와 무(無) 모두가 공문(空門)이 되면서 공(空)만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데, 비록 6바라밀을 행하고, 갖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서 6신통을 얻고, 보살행을 행해서 그 복(福)이 인천(人天)보다 뛰어나게 될지라도 부처의 집안의 불가(佛家)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불성을 보지도 못하는 것인, 왜냐 하면 법을 분석해서 공(空)을 밝혀, 무명이 바로 여래의 지혜란 것을 요달하지 못한 때문이니, 화엄경에서도 이와 같이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이미 서술하였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만약 8만 4천의 법문을 갈무리한 12부 경전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6신통을 얻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오히려 이 경전을 듣고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은 설법은 법화경이 불승(佛乘)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보살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열반경에서 “일체의 중생이 다 불성의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다”고 설하신 것이며,
모든 보살들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면서 “우리가 무량겁 동안 생사(生死)에서 유전한 것은 단지 무아(無我)에 미혹된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이 있는 까닭에 마음을 돌이켜서 회심(廻心)한 뒤에야 비로소 성품을 보아 나(我) 스스로가 지혜(智)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반야 속에서 문수사리보살이 문답(問荅)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일분(一分)의 법신불성(法身佛性)의 도리를 논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문수반야(文殊般若)가 그것인 것이다.
가령 성문과 함께 문답하는 것이라면, 이는 다분히 2승의 생공(生空)의 아집을 타파하기 위해서 법의 공(空)함을 설하기 위한 때문이며,
또 보현과 함께 문답을 한 것은 다분히 행문(行門)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무릇 법은 근기에 따라 설하는 것인 까닭에 단순히 문답의 주체(主)와 객체(伴)를 보고서도 그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을 추측하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넷째, 유(有)와 무(無)를 회통하는 관지(觀智)의 문이라는 것이란,
해심밀경의 제3시(第三時) 교설에서는 9식(九識)이 정식(淨識)이 되어서 업 종자와 함께 의지처가 된다고 설하고 있으며, 아울러 3성(三性)과 3무성(三無性)을 설였으니, 이른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의 3성(三性)이 상호간에 서로 이루어지고(成) 무너지면서(壞) 온갖 집착과 장애를 벗어난다면, 이루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성품이 저절로 열반인 것이다. 그래서 해심밀경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니,
“일체제법개무성(一切諸法皆無性),무생무멸본래적(無生無滅本來寂),
제법자성항열반(諸法自性恒涅槃),수유지혜밀의(誰有智慧無密意),
일체의 법이 다 성품이 없어서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으며,
본래부터 적멸이라서 제법의 자성(自性)이 항상 열반이니,
지혜 있는 자라면 어느 누가 비밀스런 뜻의 밀의(密意)가 없겠는가?”
이 경전은 반야의 공(空)만을 두드러지게 닦은 자가 연생법(緣生法)을 무너뜨리는 것을 막고,
공견(空見)이 현전해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전에서는 인연 소생의 모든 법은 그 자체가 열반이라서 결코 거부할 필요가 없으며,
유(有)를 말하든 공(空)을 말하든 상호간에 배척하게 해서 유(有)도 생각하게 하지 않고 무(無)도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을 성취하고 있다.
또 이 경전에서는 비록 화엄과 이름이 똑같은 10지(十地)를 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상의 의미와 궤칙(軌則)은 서로가 다르며,
또 지(地) 이전에 3현(三賢)이나 10신(十信) 등의 지위가 없으며, 다만 10지를 세워서 미혹의 행상(行相)을 끊을 뿐이며, 아울러 불지(佛地)가 11지(十一地)가 되다고 설하면서, 그 11지 안에 다시 11 가지 번뇌와 22 가지 어리석음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지(地) 이전의 3현(三賢)과 10신의 행문(行門)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니, 그 이유는 이 경전이 지(地) 이전에 도(道)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제3시(第三時)의 가르침이라서 중간에 단지 유(有)와 무(無)를 회통시켰을 뿐, 화엄처럼 문수와 보현의 이(理)와 사(事)가 서로 수용하면서 행(行)이 원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법문을 설할 때에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모두 오셔서 인가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불국토가 이 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열세 가지 종류로 서로 가피(加被)하여서 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승의 경전 속에서도 11지(十一地)를 설하였지만, 모든 중생을 완전히 다 수용하지 못했으니, 이는 세 가지의 10지(十地) 중에서 가전(假詮)ㆍ가지(假智)ㆍ가진여(假眞如)의 10지행(十地行)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이 11지(十一地)는 불위(佛位)인데도 그 불위 안에 오히려 장애가 있기 때문이니, 따라서 11지(十一地) 이전에는 진리(眞理)와 본지(本智)가 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참된 이법의 지혜인 전진이지(全眞理智)라면 어찌 11지(十一地)에 열한 가지 번뇌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번뇌가 있다면, 이는 곧 각 경지마다 불지(佛智)가 있어서 인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전은 점진적으로 유(有)와 무(無)를 회통해서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이지, 보현과 문수처럼 이(理)와 사(事)의 지혜로써 대용(大用)을 설한 것은 아니다.
인왕경(仁王經)에서는 5위(五位)의 10지(十地)의 행문(地行)을 안립하고 있는데, 범부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익혀 나아가 여러 생의 수행을 쌓으면서 가진여(假眞如)를 닦는 것을 세우고 있다.
또 어떤 종파의 가르침은 지(地) 이전에 미혹을 굴복시키고, 지(地)에서 도(道)를 보는 것을 설하고 있고,
혹은 미혹에 걸려 끊지 못하다가 3승기겁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방편으로 근기에 대치하기 위해서 임시로 시설한 것일 뿐 진실한 교설은 아니다.
다만 화신불이 설한 것은 모두 중근기나 하근기를 인도하는 것이라서 진실을 다한 교설이 아니니, 나머지는 이에 준하여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승인(二乘人)이 마음을 돌이켜 권교(權敎)로 나아가면서 우러러 흠모하는 불과(佛果)와 권교의 보살이 우러러 흠모하는 불과는 아승기가 다 찬 뒤에 단지 삼천대천세계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이 교화하시는 국토의 보과(報果)만을 기꺼이 추구하는 것일뿐, 10불(佛)의 경계인 비로자나의 다함 없는 시방 경계의 무진시방경계(無盡十方境界)의 보과(報果)를 희구하는 것은 아닌 것이라서 화엄경의 10신보살이 희구하는 불과 보다는 못한 것이다.
즉 10신의 지위에서 이미 모든 부처님의 과덕이 자신의 무명(無明)과 털끝만치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기 때문에 뛰어나게 이해하는 마음, 즉 승해심(勝解心)을 갖춘 구족범부(具足凡夫)는 기꺼이 10신(十身) 비로자나의 경계를 닦아서 깊은 마음의 심심(深心)이 광대하고 전체적으로 거듭 원만하고 오묘한 경계의 무극중현(無極重玄)의 오묘한 경계를 다하고 있으니,
이는 권교의 부처님 경계가 모두 분제(分齊)와 한계(限界)를 세우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니,
권교는 여전히 근기가 좁고 넓지 못한 자를 위하고 있기 때문에 방편을 세운 것이다.
가령 해심밀경에서는 10지(十地)의 미혹을 끊는 분제(分齊)가 있으니,
제일지(第一地)의 초지(初地)에서는 악취(惡趣, 악도)의 번뇌업(煩惱業)에서 생긴 온갖 오염의 장애의 잡염장(雜染障)을 대치(對治)하고,
제2지(第二地)에서는 미세하게 잘못 범하는 현행장(現行장障)를 대치하고,
제3지(第三地)에서는 탐욕의 장애인 욕탐장(欲貪障)을 대치하고,
제4지(第四地)에서는 선정과 법에 애착하는 정급법애장(定及法愛障)에 대치하고,
제5지(第五地)에서는 생사와 열반 중에서 일방적으로 등지거나 나아가는 장애의 생사열반일향배취장(生死涅槃一向背趣障)에 대치하고,
제6지(第六地)에서는 거친 모습으로 현행하는 장애인 추상현행장(麤相現行障)에 대치하고,
제7지(第七地)에서는 미세한 모습으로 현행하는 장애인 세상현행장(細相現行障)에 대치하고,
제8지(第八地)에서는 모습도 없고 작위도 없는 무상무작(無相無作)의 공용(功用)과 유상(有相)으로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장애에 대치하고,
제9지(第九地)에서는 일체의 능숙한 언변으로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장애에 대치하고,
제10지(第十地)에서는 원만한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는 장애에 대치한다.
선남자(善男子)는 마음의 온갖 망념을 쉬는 선정의 지(止)ㆍ적정(寂靜)의 사마타(奢摩他)와
법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관(觀)ㆍ정견(正見)의 비발사나(毘鉢舍那)로
여래지(如來地)에서 지극히 미세하고, 지극히 미세한 번뇌로서 스스로의 성품을 가로막는 조잡하게 분별하는 번뇌장(煩惱障)과
아는 것이 스스로의 성품을 가로막는 미세한 흐름의 소지장(所地障)에 대치한다.
그러나 화엄경은 단지 지(地) 이전의 3현(三賢)의 초발심에서 불과(佛果)의 법문을 단박에 증득하여 널리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등각(等覺) 등의 각 지위를 인(印)칠 수 있으니, 이는 마치 도장을 찍을 때 문상(文相)이 구족하여서 먼저의 전제(前際)와 나중의 후제(後際)가 없는 것과 같아서, 초발심일 때, 삼계의 무명(無明)이 바로 불지(佛智)의 바다가 된다는 것을 단박에 인(印)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래의 법신(法身)ㆍ지신(智身)ㆍ대비(大悲)의 인(印)으로써 일시에, 단박에 세간이 법계의 대용(大用)이 되는 것을 인(印)치면서도 먼저와 나중이 없으니,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권교(權敎)의 법을 벗어난 시설과는 같지 않으며,
또 세 가지 근기를 인도하여 하나의 진실인 일실(一實)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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